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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씨 Feb 08. 2017

#71터키-비오는 날에

-이스탄불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스텔로 돌아오며 K와 내일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유람선을 타자고 약속했지만 다음날 역시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비만 내리는 이스탄불이라는 K의 저주(?)가 들어맞았던 걸까. 

비가 오자 외출의 의지가 급격히 떨어진 나는 가장 먼저 리셉션에 내려가, 하루치 숙박을 연장시켰다.  원래 이날까지가 처음 묵겠다고 했던 숙박날이었다. 아마도 원래의 느슨한 계획대로였다면 이날 저녁쯤엔 카파도키아에 가볼까 했었지만 밖은 비가 내리고 나는 이스탄불이 좋았다. 며칠 여기서 먹고 자고, 여유롭게 관광하고 낮잠자고 일어나 먹고 다시 자고를 반복하다보니 이 숙소도 마치 내집마냥 편해졌다. 

내게 내집마냥이라는 의미는 이 장소에서 하루종일 무의미하게 눌러붙어 인터넷을 하고 잉여롭게 놀 수 있다는 뜻이며, 그게 며칠동안 이어지더라도 전혀 낯설지 않을 것 같다는 뜻이었다. 카파도키아며 나중의 일정을 모두 포기하면 터키에서 남은 날짜는 십몇일 정도.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여기 있을까 싶은 마음과, 그래도 터키에 왔으니 카파도키아 정도는 가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은 반반이었다. 

이 날은 반반의 마음에서 이스탄불에 있고싶다는 쪽에 물 한방울 정도 마음이 더 기울어 하루 더 있기로 결정했지만 다음날엔 카파도키아쪽에 조금 더 마음이 기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때 떠나면 된다. 

  


아침을 먹으며, 일단 최소 내일 최대 언제일지 모르는 일인 카파도키아는 둘째 치더라도 오늘은 어딜 나가야하나 말아야하나 하며 고민하고 있을 무렵 우울한 얼굴로 K가 식당에 올라왔다. 아침인사를 나누고는 바로 어디에 갈 거냐고 물었다. 평소처럼 대답했다. 

I have nothing.

둘 다 아무 계획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란히 앉아 빵과 계란을 씹었다. 아마도 K는 추적거리는 비를 뚫고 어디로든 다녀올 마음인듯 했다. K는 명소에 다 가보고 싶어하고, 하루종일 지치지 않고 걸어다니는 열정적인 여행자타입이라 하루종일 호스텔에서 뒹굴거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귀찮지만 얘를 따라 잠깐이라도 밖이라도 나갔다올까 수십번 갈등하고 있을 때 아무말 없이 한참을 밥을 먹던 K가 말했다.  

‘우리 톱카프 궁전에 갈까?’

당연한 수순인 것마냥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나섰다. 



귀차니즘과 비로 인한 약간의 우울함이 섞인 나는 가는 내내 머릿속이 멍했다. 그에 비해 아침을 먹을 때까지는 왜 내 이스탄불은 비만 내리느냐며 우울하던 K는 숙소를 나서자마자 다시 기운을 충전했는지 속사포로 수다를 쏟아내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쩐지 동행이 사진을 많이 찍고 있으면 괜히 덩달아 찍는 것 같아 부끄럽고, 동행이 사진을 너무 안 찍으면 혼자 멈춰서서 찍는게 부끄러운, 의외의 면에서 수즙은 나는 K가 멈춰서서 사진을 찍을 때 옆에서 멍하니 구경해주고 인물사진을 찍어주고 ‘너도 찍을래?’하면 단호하게 ‘노’를 말하다 가끔은 너무 거절만 하는 것 같아 사진을 찍혀주며 따라갔다.  

그렇게 도착한 톱카프궁전.  

톱카프궁전은 세계 최강대국으로 명성을 떨쳤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거주하던 본 궁전으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세 대륙을 거느리는 궁전이었기에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해, 골든혼의 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스탄불에 짓게 되었다고 가이드북이 말해줬다.  어마어마한 규모와 전시품들도 유명하고, 말로만 들어왔던 하렘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원래 나는 궁전엔 별로 흥미가 없어 들어갈까말까 하다 비오는 바람에 급히 정한 행선지이지만 다른 관광객들은 원래 궁전에 흥미가 많은 건지, ‘비오는 날은 실내’라는 관광원칙을 모두들 알고있었던건지 톱카프궁전 안은 관광객들로 바글바글했다.  

그림이나 의복, 장신구, 무기 들을 진열해둔 전시관을 보려면 한참 줄을 서서 겨우 안에 들어가 사람들에 밀려 구경하고 전시관 밖으로 방출되는 식이었다. 나역시 사고회로의 한두개쯤은 작동하지 않는 기분으로 몰려다녔다. 

제4정원까지 있을만큼 정원도 크고 멋지게 꾸며놓았지만, 비를 맞고 싶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은 처마 밑과 옛날엔 궁궐의 방이었을 전시실에만 몰려있었다.   

전시관 안을 떠도는 습한 공기에 앞뒤를 꽉 채운 사람들의 눅눅한 옷자락, 거기에 인구밀도 높은 전시관안은 정말이지, 이럴 줄 알았더라면 맑은 날 구경올텐데 싶은 기분이었다. 

이곳에 86캐럿의 다이아몬드가 있다며 자기는 그것이 꼭 보고 싶다던 K는 엄청난 크기의 다이아몬드를 보고도 내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이거보다 더 큰 거를 본 적 있다며 실망스럽다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아마 이 전시실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언어의 대부분은 불평불만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돌다 곧 그, 하렘이 나왔다.   

나는 여행을 갈 때 각 나라에 대해 몇 가지의 이미지 정도만 가지고 다니곤 한다. 워낙 기초상식과 세계사상식이 부족하기도 하지만(초4때 사회과목을 포기한 문과생) 부족한 시간에 그 모든 것을 다 보는 것은 부족하니 최소한의 기대를 가지고 도착해 기대 이상의 것을 건지자는 안일한 여행 철학의 결과라고나 할까.   

그렇기 때문에 말로는 들어봤던 곳이지만 실제로 볼 거라고 생각지 않던 곳에 도착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예전 유럽여행에서 바티칸 투어를 갔을 때 거기에 '천지창조'가 있었다든지, 기차 안에서 스쳐 지나간 바티칼 호수 앞에 도착해 이 물은 정말 바다가 아니라 호수인가 하며 맛을 볼 때라든지, 카이로에서 예수피난교회에 갔을 때, 그 안에 전시된 콥틱 흔적을 발견했을 때 같은 일이었다. 그런 곳에 도착하면 뭐랄까, 기분이 이상했다.  

말로 들을 때는 그래, 그런 일도 있었다지 정도의 느낌이라면, 눈 앞에 ‘이런 곳이었단다’하는 증거가 직접적으로 보이는 순간  

아, 그 사람들이 정말 살아있던 사람이었구나, 나처럼 먹고 자고 찌질대며 살았었겠구나, 

하는 실감이 나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존에 얘기로 듣거나 책으로 본 사람들의 지극히 인간적인 실수들, 예를 들면 통치자가 여자를 너무 좋아해 실정을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과거에는 통치자라는 자가 왜 그런 실수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실제로 흔적을 보고나서는 저들은 옛날 언젠가 여기서 살던 인간이었겠구나 싶으면서  

‘그럴 수도 있지,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데’하는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것이었다.  


뭐 그렇게 공감대 폭발해서 본 하렘은 화려하긴 했지만 생각했던 주지육림의 극단적으로 방탕한 모습까지는 상상해낼 수 없었다.  

아직은 상상력이 부족한 걸까.    

톱카프궁전을 모두 보고 나왔는데도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다. 비오는 날엔 비에 젖을 때마다 온몸의 에너지가 쭉쭉 뺏기는 기분이 든다. 역시 비오는 날 돌아다니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관광을 더 했으면 하는 듯한 K의 눈빛을 무시하고 나는 돌아가 잠을 자야겠다며 숙소로 다시 향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부엌에 올라가니 또 전날처럼 전전날처럼 사람들은 모여 수다를 떨고 와이파이를 하는 평범한 날을 보냈다.    

  

이제 이틀 뒤면 K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나는 아마도 이곳에 머무름과 다른 곳에 감 사이에서 고민하다 어딘가는 움직이겠지 싶었다. 

저녁을 먹으며 습관처럼 우리는 내일 맑으면 유람선을 타러 가자고 약속했다.  


과연, 둘은 유람선을 탈 수 있을지, 그리고 나는 이 곳에서 얼마나 더 머무르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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