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은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라캉은 세미나 11에서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무의식'이란 말을 언제 사용하는지 질문한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생각해보죠. 어떤 경우에 우리는 무의식이라는 말을 사용하는지 떠올려볼 수 있을까요?
대부분 어떤 이유도 맥락도 없이 등장한 어떤 행동을 합리화하기(핑계대기) 위해서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실수 행위가 ‘무의식적’이라고 말하는 정도라고 볼 수 있겠죠. 혹은 추측할 수 없는 어떤 현상에 대해서 '무의식적'이라는 말을 쓴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유를 말하기 싫을 때도 그럴 수 있겠네요.
예를 든다면 어떤 남자가 카페에서 주문하고 결재를 하기 위해서 폰을 내밀었는데 대뜸 아르바이트 생이
"저 남자 친구 있는데요"
이럴 때, '무의식'적으로 반응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자신의 착각이나 혹은 주변 사람에 대한 방어 행동이 나타날 때 그 속에 있는 진짜 의도를 감추기 위해서죠. 비슷한 착각의 경우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온라인에서도 '무의식'이라는 말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자기 계발서나 운을 끌어들이는 방법 같은 책에서는 걸핏하면 무의식을 거들먹거리기도 하죠. 무의식 때문에 그 모든 현상이 나타난다고요. 이럴 때 이야기하는 무의식이란 밑도 끝도 없습니다. 마치 '없다'를 오타 내서 'ㅇ벗다'로 쳐놓곤 무의식 때문이라고 밀어붙이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자기 행동을 멋들어지게 설명하는 거 같은데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무의식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억압’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억압의 이미지는 어떻습니까? 대부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울 겁니다. 떠나간 첫사랑을 떠올리면 가슴이 너무 아파서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비유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식의 비유는 절대로 잘못된 것으로 이야기하고 싶네요.
억압되었다고 할 때는 아예 의식에서 튕겨져 나간 것입니다. 조금 더 나은 표현으로는 퇴출 혹은 유폐라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프로이트는 억압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억압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억압 실패의 방식은 꿈, 실수, 신경증입니다. 이것들은 분석 과정에서 매우 소중한 분석 단서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이지요. 위의 세 가지 방식이 아니고서는 억압된 것을 의식화시킬 수 있는 단서가 없습니다. 그래도 편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떤 행동에 있는 무의식이 어떤 식으로 등장한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사실 이것은 꿈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무의식 상징'들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정신분석에서는 이것을 '무의식 방정식'이라고 부릅니다. 게다가 그것들도 가공된 것이라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복잡하게 들여다보아야 하는 경우가 있죠.
자아는 초자아에 의해서 늘 검열이 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완전히 잠드는 법도 없습니다. 그래서 의식 상태에서는 철저히 차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잘 때 초자아가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서 무의식의 단서를 흘려보내는 겁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위장을 합니다. 총 가공 단계가 5번인데 얼마나 교묘하겠습니까? 그걸 잡아내는 게 초자압니다. 들뢰즈 같은 학자들이 정신분석을 비판할 때 경찰 같다고 하는 것도 이런 의미가 숨어있는 것이고요.
무의식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분석 과정을 통해서 그것들을 역추적하면서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무의식의 검토 자체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단기간에 드러나지도 않고요. 만약 단기간에 무의식 단서들을 발견해서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전의식 자료를 무의식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네요. 그런 식의 오해는 쉽게 일어납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치료가 들어가는 구조가 무의식 구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사한 방식으로 비슷한 내용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죠.
억압과 비슷한 정신 기제가 하나 있습니다. ‘억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는 의식에서 전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억지로 ‘참는’ 것입니다. 예시를 든다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느낀 수치심을 억지로 참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때론 이것을 불편한 것을 회피하는 것으로 설명하곤 하는데 그것은 억제라고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과도한 정신적 흥분을 억지로 견디는 것은 정말 많이 힘이 듭니다. 어떤 장면을 ‘미처 보고 있기 힘들다’고 할 때 작용하는 것이 ‘억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여성분들이 뱀이나 거미를 보기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징그럽다고요. 그래서 여름철에 화장실에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괄태충(집 없는 달팽이)을 보고 손도 못 대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퀴벌레도 마찬가지죠. 다리가 달려있는 것에 거부감이 덜한 경우가 있고 다리 없는 것에 거부감이 강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물론 두 가지는 같은 것이 다른 방식으로 가공되었다고 보는 게 좋습니다.
정신 기제에 대한 구분점들은 명확히 해놓는 것이 좋습니다. 방어기제라고도 이야기하는 것이 괜찮을 것 같네요. 안나 프로이트가 조금 과하게 구분을 하긴 했지만요. 방어기제도 단편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흐름을 따라 들어가면 기존에 알려진 것과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도 생기긴 합니다. 예를 든다면 자신의 상황을 아주 지적인 단어를 써가면서 묘사를 하는 겁니다. 이럴 때는 책을 좀 많이 읽으신 분들이죠. "나의 신경증은 상징계의 문제로 상상계가 어쩌고...."이런 말을 계속 이어갑니다. 여러분들이 흔히 배웠던 정신기제로는 '주지화'로 해석될법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분석 현장에서 그런 반응이 등장했다면 이것은 신경증 전략으로도 기능합니다. 자기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상담사 혹은 분석가의 자리를 지워버리려는 강박증 전략으로 기능합니다. 지적인 말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정말 불필요한 내용들도 마구 지껄이기도 하죠.
우리가 알고 있는 방어기제들의 해석은 현장에서는 완전히 달라지곤 합니다. 사실 안나 프로이트가 자아와 방어기제를 집필하기 전까지는 프로이트가 방어기제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던 땝니다. 멜라니 클라인과 안나 프로이트가 대립각이 서서 프로이트가 슬쩍 안나를 밀어줬다고 보는 게 더 옳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렇다고 해서 안나 프로이트의 [자아와 방어기제]가 문제가 되는 작품은 아닙니다. 안나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시각으로 글을 썼고 정신 장치의 역동을 훌륭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래도 아동 분석의 대 논쟁에서 멜라니 클라인에게 밀린 것은 어쩔 수가 없었겠죠. 여담이지만 멜라니 클라인을 두고 정신분석의 이유기라고 부르는 시각이 있습니다. 이유기. 즉. 구강기 후기의 이빨이 나는 시기를 말합니다. 이때의 고착점 문제를 비유로 한 것입니다. 그럼 멜라니 클라인이 학문에 '중독' 된 것처럼 보여서 그렇게 부른 것일까요? 그 정도로 단편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닙니다.
무의식의 속성이 의식되지 않는 것인데,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타인의 무의식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너의 무의식이 어떤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전혀 모르니까 자신감을 가지고 확신을 지닌 채로 이야기를 하겠죠? 나도 모르는 나의 무의식을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언제 죽을지 안다는 소리와 똑같습니다. 즉, 점쟁이죠. 자기 무의식을 밝히려고 자기 분석을 했던 프로이트 조차 실패했는데요. 조금 웃기는 이야기이긴 한데 프로이트도 자기가 언제 죽을지 종종 예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싹 다 틀렸죠. 마지막에 정신분석이 바라보는 인간관으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의식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신병자들의 망상이 그렇습니다. 라캉은 정신병자들이 자신의 무의식을 드러내 놓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의식과 전의식은 같은 논리 체계를 동원하지만 무의식의 논리체계는 전혀 다릅니다. 그럼 그들의 무의식은 어떤 식으로 전개가 될까요? 그들의 언어체계와 일반 언어체계를 구분해보는 것이 관건입니다. 사용하는 언어는 똑같지만요. 예시를 들어볼까요?
많이 외로워요. 만약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좋아하시는 과자를 사드리고 싶어요. 내가 나쁜 놈이 되어야 그렇게 해드릴 수 있어요. 환청이 자꾸 시비를 걸어요. 여자 친구를 방에 못 데리고 오게 해요. 방에 누울 수 없게 해요. 눈치를 보고 싶진 않아요.. - [디지털 정신분석 연구] 중 규탄의 곡해에서
그의 무의식이 이렇게 드러났다고 해도 될 것 같네요. 물론 망상이 있지만 현실 지각은 여전히 기능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들어보면 망상뿐인 이야기일지도 모르죠. 급성으로 발병한 편집증에서는 이렇게 혼합되는 상황으로도 이어집니다.
저 말을 한 사람은 여자 친구가 없습니다. 상상으로 등장한 것인데, 저 사람에게는 실제로 지각되는 것입니다. 이 것은 '자기 지각'에 의한 '지각 체험'으로 이야기되는 것입니다.
이 언어의 체계는 우리가 그냥 들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무의식을 알아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이 되겠죠. 라캉은 무의식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융도 편집증자의 망상을 원래 표현으로 되돌리는 방식을 고안하곤 했죠. 그러나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연구를 해야 합니다. 이러한 편집증 연구는 힘겹습니다. 저도 편집증 문제를 몇 번 접했었고 글로도 쓰고 책으로도 만든 것이 있지만 접근하기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긴, 그래서 프로이트의 슈레버 분석과 같은 내용은 처음 들어가는 것이 무척 어렵습니다. 저도 10년 가까이 공부하고서야 접근이 좀 될락 말락 했던 것이니까요.
따라서 무의식을 저절로 알아본다던가 하는 말에는 현혹되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종종 그런 말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생기면 무의식이 어떤 상황에 쓰이는 말인지 그 용법을 떠올려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정신분석가가 되면 그걸 다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분석가가 아는 것은 증상에 대한 지식과 무의식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전부입니다. 증상의 전문가는 자기 자신이죠. 그래서 정신분석은 자기 증상을 스스로 돕게 합니다. 치료해준다는 것은 정신분석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죠. 스스로 극복하니까 엄밀히 따진다면 정신분석을 치료로 보지 않는 관점도 있습니다.
프로이트도 그런 이야기를 하죠.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적 치료처럼 상황만 진정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무의식 욕망을 찾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정신분석의 목적이 인간탐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정신분석가분의 강연에서 '심리치료는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 참석한 상담사들이 단체로 반발을 했다던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 말에 반발이 일어나는 이유는 아직 프로이트 식의 정신분석이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분석 과정에서 증상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에너지들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것이 동력으로 등장하죠. 그리고 승화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요, 또는 병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주체의 선택에 따르는 겁니다. 분석가가 억지로 치료를 이끌어내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도 비슷한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심리치료를 하는데 뭘 해야 좋냐고요. 상담사에게 그런 질문을 들으니까 저도 살짝 기분이 묘했는데... 뭘 시킨다. 뭘 한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이 내담잔데, 억지로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조금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처방을 해도 효과가 나올 때가 있고 안 나올 때가 있습니다. 주체의 욕망에 따르는 것이지 주변 환경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