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꼴리가 흔히 생각하는 우울증일까?
영어의 depression은 우울로 번역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depression이란 원래 지각 용어로 땅이 푹 꺼져있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이 기분을 나타내는 의미로 적용되면서 우울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좀 다운되면 우울하다고 표현을 합니다. 좀 과장해서 '우울증'을 이야기하죠. 그런데 정신분석에서도 depression을 그대로 받아들일까요?
프로이트의 저작 중, [슬픔과 우울증]으로 번역되어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것을 올바로 번역하면 [애도와 멜랑꼴리]라는 제목입니다. 정신분석 연구자들도 꽤 많이 지적하는 내용이죠. 여기서 멜랑꼴리를 우울증으로 번역해서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멜랑꼴리는 조울증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정신분석 진단으로는 정신신경증 B군에 속하는 것입니다. 현실 좌표가 바뀌어버리는 정신병입니다. 그것도 정신병 중에서 유일하게 현실 논리를 보여주는 정신병이라고 합니다. 주요 핵심으로 콤플렉스에 압도되었을 때 울증이 나오고 콤플렉스를 극복할 때 조증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정신의학에서 이야기하는 우울증과는 굉장히 차이가 큽니다. 이 의미를 잘못 파악하는 경우에는 우울증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해버리는 경우도 생깁니다. 예를 들어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꼴리아]라는 영화를 보신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제목 덕분에 우울증에 대한 영화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에서 등장하는 저스틴의 행동이 흔히 생각하는 우울증적인 행동이 아니죠. 조울증적입니다.
영화의 첫 장면을 기억하시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나오고 주인공인 저스틴은 검은 흑담즙에 발이 묶여있는 게 영화의 첫 장면입니다. 히포크라테스의 4 체액 설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체액의 성질이 인간의 성격에 영향을 준다는 고대 이론입니다. 히포크라테스는 흑담즙을 우울질과 연결합니다. 이 것을 melancholic temperament라고 씁니다. 단지 기분이 우울한 수준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우울한 기분은 누구나 느낍니다. 그것을 과대 포장해서 우리는 '증'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힘들게 살아간다고, 매일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고도 이야기하죠. 만사가 부정적이고 억울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충분히 그런 감정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을 누구나 경험할 수 있죠. 저도, 여러분도요.
정신분석은 기분 자체를 병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도 분석 현장에서 우울증 때문에 괴롭다고 찾아오신 분들과 분석하게 되는 경우에, 아이러니하게도 우울증이 아니라 다른 신경증 혹은 과로나 신체의 쇠약이 원인이 된 것을 여러 차례 발견하곤 합니다.
신체가 쇠약해지면서 발생하는 우울을 두고 '침울'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 경우에는 신체가 회복되면 금방 좋아집니다. 그래서 따로 상담을 하거나 이럴 필요가 없다고 프로이트는 이야기하죠. 다시 자연적으로 회복이 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쇠약해져서 등장하는 침울에 약을 복용하면 상태가 더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휴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면 부분적으로는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무엇인가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관심이 작동해야 하는데, 약은 그것을 일방적으로 철회해버리니까 강제 휴식이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보죠. 고3 학생들이 이런 침울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공부하기 위해서 과로를 한 것입니다. 즉, 쉬는 시간에는 쉬어야 하는데, 그 시간도 아깝다면서 공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뭔가를 한 겁니다. 초반에는 괜찮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피로가 축적이 되고 갑자기 우울하고 공부도 전혀 되지 않고 괴로워집니다. 공부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괴로워합니다.
실제 이런 문제로 저에게 고민을 호소하던 어느 학생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다가 갑자기 안되니까 너무 괴롭다고요. 대체 어떤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지 저에게 질문을 해왔습니다. 아니면 뇌에 문제가 있어서 자신이 이런 상태인지 질문을 해왔습니다.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우울증이라고 하면 뇌의 생화학적 불균형을 지목합니다. 그래서 항우울제를 투여하는 것이 효과적인 치료라고 주장을 하죠. 결핍된 세로토닌을 투여해서 행복감을 느끼게 해 준다는 겁니다. 물론 처음에 약을 복용하면 다소 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공부하는 건 무리가 될 수 있습니다. 머리도 좀 멍할 거고 학습능률도 떨어질 겁니다. 세로토닌 문제라고 그것을 보충해 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로토닌을 보충해주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로토닌을 감소시키는 우울증 약도 존재합니다.
저는 그 학생에게 공부에 쫓기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가 필요하다고 조언을 건넸습니다. 하루 날 잡아서 공부하지 말고 게임도 하고 운동도 좀 하고 애니메이션도 좀 보고 놀고 휴식하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며칠 후에 그 학생이 다시 질문을 해왔습니다. 하루 생각 안 하고 놀았는데 다시 공부가 된다는 겁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면서 설명을 부탁했습니다. 과로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요?
직장인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야근에 회식에 자기 개인 시간이 없이 지나치게 무리하다 보면 비슷한 상태에 처합니다. 일에 집중도 안되고 조금만 신경을 써도 짜증이 나는 겁니다. 이것은 휴식을 취하는 능력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닙니다.
신경증 적으로 우울을 느낄 때는 '병리적 초자아' 문제를 검토해볼 만합니다. 초자아가 힘이 너무 센 거죠. 그러다 보니까 자아가 저절로 찌그러집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이 경우에는 스스로의 권리를 살려야 하는데, 병리적 초자아에 의해 찌그러져 있다 보니까 자기 권리들도 모두 포기해 버립니다.
이런 이야기를 신경증에 시달리는 분들에게 하면 자신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 되묻습니다. 그럴 때 '말할 권리'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초자아에 의해서 찌그러지니까 말을 못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잦은 포기도 일어나죠.
에이 어차피 안돼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면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런 말을 하질 못하고 혼자서 속앓이를 하는 경우도 있죠. 이런 태도가 장기화되면 나름의 증상 시나리오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에 자기 행동을 맞추고 결과를 맞추려고 하죠. 실패라는 방식으로요.
그렇다고 해서 이런 우울한 기분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프로이트는 그런 말을 합니다. 인간은 어째서 병들었을 때 더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는지를 되묻죠.
프로이트는 신경증을 형성하는 힘을 '신화'를 만드는 힘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떤 이데올로기나 세계관에 물들면 그에 맞춘 신화를 형성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죠. 그게 점점 발달하면서 병이 되기도 합니다.
일종의 자기 계발서들에서는 다소간의 최면 효과가 일어납니다. 예를 든다면 부와 명예의 비밀이라는 시크릿을 실천하면서 간절히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자기 행동을 그 방식대로 조절을 해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신화'를 형성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에 맞춰져 버리는 것이죠.
그런 내용에 탐닉하고 현실을 그렇게 바라보고 해석하다 조현병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의 과거 내담자는 시크릿을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해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자기 계발서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면에 '신화'를 형성한다면 병리적인 문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비슷하게는 무의식을 너무 강조하는 책이나 강연은 그런 가능성들을 충분히 품고 있다고 봐도 괜찮습니다.
앞서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무의식'이라는 말의 용법은 '추측할 수 없음'에 해당합니다. 즉, '무의식'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자기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의식이 도와준다. 그것과 현실은 전혀 별개입니다. 인간의 정신 장치가 수호천사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실제로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이런 신화가 형성하는 것은 '특별함'입니다. 나는 남과 철저하게 다르고 특별하다는 생각은 병을 심화시킬 조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시달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가끔 '나는 절대 나을 수 없는 사람이 아닐까?'라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남들과 철저히 구분하려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좋아지는 것도 거부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러니하죠?
우울증을 이야기할 때 죽음 충동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 충동의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끌어들이게 된 내용입니다. '자기 파괴'라는 식으로 단독으로 등장한다고 생각하면 완전한 오해입니다. 강한 에로스 활동, 즉, 삶 충동이 밥상을 차리면 죽음 충동은 거기에 숟가락을 얻습니다. 죽음 충동 단독으로는 어떤 활동도 하지 않습니다. 살려고 애쓸 때 나타나는 것이죠. 최근 상담사 시험에 보면 공격 충동이라는 식으로도 시험에 나오는 것 같습니다. 타인을 공격하는 것과 죽음 충동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죽음 충동은 혁명을 바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조금씩 파괴해서 새로이 태어나고 싶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죠. 정신분석 학자들이 죽음충동을 사회적 현상과 연결을 지으면서 설명할 때 '혁명'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윱니다.
사비나 슈필라인이 아이디어를 낸 이 죽음 충동의 문제는 아직도 많이 연구가 되지 않았습니다. 연구는 임상을 통해서 진행해야 하는데, 이 내용이 등장하기 전에 대부분 분석을 그만두기 마련이니까요. 죽음 충동 문제를 탐구하는 것에서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저에게도 죽음 충동이 자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걸 찾는데 얼마나 걸렸을까요? 8년 걸렸습니다. 어마어마하죠? 쉽게 발견되지 않는 영역입니다. 다른 정신작용의 사전 검토 이후에야 나오는 것이니까 쉽게 발견이 되지 않는 것이죠.
정신분석은 우울증을 비롯한 모든 신경증을 '뇌'문제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만약 정신분석가가 '뇌'의 문제라고 단정을 짓는다면 정신과 의사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더 좋습니다. 실례로 제가 초청 강연을 한번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10년째 조현병에 시달리는 따님을 둔 어머니가 한분 계셨습니다. 그 어머니는 처음에 딸을 상담시켜보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담당 주치의가 조현병은 뇌 문제라서 정신분석이 소용없다고 하는 이야기에 상담을 포기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0년간 방에서 약물만 복용했다고 합니다. 차라리 상담을 좀 할 수 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좋아지는 것이 어느 정도 등장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꼴리]에서 정신적인 원인이 없이 순수 신체 문제로 발병하는 멜랑꼴리를 이야기합니다. 이 경우에는 조금 증상 발달이 복잡하게 들어간 겁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신경쇠약으로 출발하는데, 경험 자료들이 덧붙게 되면서 증상의 형태들이 변해버립니다. 그렇게 변한 증상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좌표를 바꾸어버리려 할 때, 정신병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가 복잡한 것이 때론 현실 신경증이 정신병처럼 위장이 되기도 하죠. 이런 식으로 등장한 현실 신경증은 꽤 지독하게 낫지 않습니다. 심리적인 문제들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의료계에서는 이런 증상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베르니케 코르사코프 증후군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이 증상은 말도 횡설수설하고 행동도 이상합니다. 사이코틱하다 그러죠. 그런데 티아민을 주사하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옵니다. 티아민은 비타민 B1입니다. 뇌에 작용하는 물질이라고 할 수는 없겠네요.
우울한 기분은 다양하게 등장할 수 있습니다. 각 신경증마다 우울해지는 방식들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조건을 따르기도 합니다. 끊임없는 무기력으로도 등장할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정신분석에서는 단순한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하지 않습니다. 기초되어 있는 정신구조를 통해서 우울한 기분이 왜 유지가 되는지를 검토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서 예년처럼 활기차기 보다는 조금 우울한 크리스마스 이브인것 같네요. 온라인으로 나마 마음을 전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