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이라는 말에 열광할 때가 있습니다. 자존감을 지키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멋지고 때론 그 누구보다 부러움을 느끼게 만들곤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럴까요? 의기소침하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나 지적하는 것이 자존감 혹은 자신감 문제입니다. 이 점을 정신분석적으로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대중이 자존감에 대해 몰두하자 관련 서적들이 많이 출간되었습니다. 높은 자존감에 대한 수요는 변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 책을 읽고 개념을 잡아가려고 합니다. 신경증에 시달리는 경우에도 예외는 없습니다. 자존감이라는 것을 통해서 자기 상태가 좀 더 좋아질 것으로 믿습니다. 그렇게 자존감이라는 말은 자기 계발서와 비슷한 효과를 지니기도 합니다.
이것을 병리적인 관점으로 한번 관찰해봅시다. 자존감이 너무 높다면 어떨까요? 동양 고전에서는 너무 과하면 아닌 것만 못하다고 합니다. 사주를 봐도 오행 체질 중 하나가 너무 높으면 아예 없는 것으로도 이야기하죠. 금이 명예와도 관계되어 있다고 하지만 살인자도 그 정도로 금이 많다고 하죠.
이 자존감의 문제는 정신병과 조금 관계 지을 수 있습니다. 자존감이란 자아에게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힘은 어디서부터 올까요? <나르시시즘>입니다. 나르시시즘이 자아에게 힘을 추가해주면 초자아의 검열을 무시하고 질서를 위반하려고 합니다. 정신병의 발병도 나르시시즘의 영향력 덕분에 발병합니다.
사람들은 자존감과 자존심을 분리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결국은 상황에 따라 구분을 합니다. 아니 상황에 따르는 명칭이 달라졌다고 보는 게 옳겠네요. 원래는 둘 다 같은 정신작용입니다. 자존감이 강하다는 말이나 자존심이 세다는 말이나 상황만 다를 뿐입니다. 보다 멋들어진 단어로 상태를 명명하면 주의는 금방 돌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존감은 결국 자기 체면의 문제와 직결이 됩니다. 체면을 지키고 싶다는 소망이 자존감이라는 말로 드러났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자존감이란 체면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이 흔히 사람들이 '자존감'문제를 고민할 때 대체적으로 등장하는 내용이 '체면'을 지키는 것과 관계된다는 말이 될 것 같네요. 만약 혼자서 '체면' 문제를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다면 그때는 주위를 의심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좀 고민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신경증 징후로도 그런 내용들이 관찰됩니다.
주변에서 자기주장이 옳다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사람들을 보셨을 겁니다. 눈앞에 사실을 보여줘도 믿지 않습니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기도 하죠. 단순하게 자존감을 자기 자신을 아는 태도로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이러한 사실이 전혀 익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태도의 기원조차 우리가 '자존감'으로 생각하던 바로 그 정신 작용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입니다.
사실 학문도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익숙하게 만들면 됩니다. 그런데 그 익숙하게 만들려던 작업이 프로이트의 왜곡을 이끌었습니다. 그런 점을 생각했을 때, 차라리 라캉처럼 아예 어렵게 가르친 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지 싶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렵게 해 놓으니 후대에 와서는 그걸 제대로 이해 못하고 엉뚱한 소리만 하는 형국이 되기도 한 것 같네요. 사설이 길었습니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낮은 자존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남들은 다 제멋대로 놀고 자유분방한데 자긴 왜 안되냐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놀기도 힘들고 그 자리에서 위축이 되어버립니다. 삶을 즐기지 못하고 불만만 쌓이죠.
영화를 예시로 들어보죠. [오 마이 그랜파]라는 영화에서 변호사인 주인공이 할아버지로 인해 어떤 망신을 당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언제나 체면을 지키고 살아야만 했죠. 그래서 그 체면에 어울리는 메레디스라는 예쁜 예비신부도 있습니다. 제이슨의 할아버지는 말씀하시죠.
너 쟤랑 결혼하면 좀비 된다?
체면치레에 온통 몰두하는 제이슨에게 그런 이야기가 들릴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면서 제이슨은 온갖 망신을 다 당합니다. 체면이 깎일 대로 깎여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비로소 느낍니다. 자신의 체면을 걷어내니 현실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정해진 신부가 아닌 정말 나를 빛나게 해주는 사랑을 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정말 자존감이 높아야만 할까요? 높은 자존감은 듣기에는 좋아 보이겠지만 이면에서는 신경증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체면을 차려야 하는 자리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과 놀고 어울리는 자리에서는 체면을 그렇게 따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높은 자존감(자존심)은 그것을 그냥 웃고 넘길 수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이것이 낮은 자존감 때문이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실은 높은 자존심으로 보는 것이 더 옳습니다. 차라리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존감을 획득하고자 하신다면 테이블 매너나 사교술을 익히시는 게 훨씬 나을 겁니다. 무조건적인 자존감 문제는 그럴듯한 말로 명명되어서 자기 문제에 대한 주의를 돌리고 전혀 엉뚱한 영역으로 나아가게도 합니다. 이 자존감을 고집하는 태도는 자신의 정확한 진단명을 알기 위해서 의사를 쇼핑하는 신경 증자의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ㅣ
정신분석가의 카우치 위를 두고 '체면 상실의 자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신경증이 가장 숨기 좋은 곳이 바로 '체면'이라는 위치입니다. 그래서 신경증에 시달리는 분들이 분석을 거부할 때 체면을 지킬 수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프고 말겠다고 합니다. 병들고 싶은 소망을 실천하고 있는 것을 방해할 수 없는 분석가는 아프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자존감의 실천이라면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어떤 정신질환자가 분석 치료를 찾아왔다고 해봅시다. 치료가 되고 싶은데 죽어도 자기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체면에 누가 되는 말을 모두 빼버립니다. 그 결과로 치료를 위한 단서들은 모두 삭제가 됩니다. 제가 실제로 분석 의뢰를 받을 때 미리 내용을 준비해서 저에게 보여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정말 말끔합니다. 대리석 같은 느낌이 듭니다.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내용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덧 12월 31일입니다. 올 한 해 코로나로 인해서 제약도 많이 받으면서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가오는 2021년에는 모두 코로나를 이겨내고 평범한 일상을 되찾고 열심히 살아가는 날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새해에는 자존감에 연연하지 말고 건강하게 생활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