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연재하던 것들을 끝내고 좀 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눈길을 끄는 논문이 하나 있어서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좋은 의미로 눈길을 끄는 논문은 아니었습니다. '관음충의 발생학'이라는 이 논문을 접하고 좀 짜증도 나기도 했네요. 다른 의미로 그냥 내 원고나 편집할걸...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네요.
특히나 학술연구 논문이라는 점에서 더 쇼킹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학술적 연구라고 이야기해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내용을 읽고 나서 문득 제가 알고 있는 임상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유사 학문에 영향을 받아서 강박관념이 형성되어 괴로워하던 어떤 의대생의 이야깁니다.
의사를 꿈꾸며 의대에 진학한 우수한 학생에게 강박증이 발병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엄마와 여동생을 강간하고 집에 불을 질렀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을 혹시나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무척 힘들어했던 케이스였습니다.
나중에 분석과정에서 살펴보니 그의 생활에서 유사 의학의 영향과 더불어서 형성된 관념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내용을 접한 겁니다. 자신도 그런 행동을 해본 적이 있었고요. 그 내용이 강박관념의 씨앗이 되었고 이동 과정을 거치면서 강박증으로 발달을 한 겁니다. 이동을 거쳤으니 원래 관념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달라졌던 것이고요.
선동의 경향이 있는 글들은 그럴 가능성들을 포함하는 것 같습니다. 제 임상에서도 비슷한 케이스가 있기도 했었고요. 특히나 프로이트도 문명적 발달에 따라 글에서 히스테리의 가능성을 이미 예견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정신분석가들도 대부분 자기개발서와 같은 책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다소간의 최면효과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죠. 저 역시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저의 지난 임상내용인 <좌절의 안다미로>에서도 그런 내용이 등장합니다. 시크릿이라는 자기 개발서를 접한 것이 강박증 발병과 관계가 된 것이지요. 궁금하신 분은 제 브런치를 뒤져보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논문이 발표되고 보겸이라는 유튜버가 희생 되었습니다. '보이루'라는 말을 여성 혐오 용어로 규정을 해버린 겁니다. 저도 오래 봐오던 유튜버였던 만큼 말도 안되는 주장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과격하게 우기기 전술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좀 웃기지만 성기+인사로 용어를 규정하고 성별 편향적인 용어를 직접적으로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자이루'라고요.
이렇게 부분을 전체로 확대하는 현상들은 정치병자들이나 종교를 맹신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나타납니다. 어떤 단서 하나를 가지고 전체를 규정해버리는 겁니다. 전체에 프레임을 씌워서 규정하면 자기들과 다른 존재로 만들 수 있게 되고 그에 따라서 '차별'이 정당화되는 효과를 낳습니다.
유시민 전 장관의 딸 유수진 씨가 이야기한 '기울어진 운동장'은 페미니즘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기울어진 운동장을 전제한 것이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유시민 전 장관이 알쓸신잡에 출연했을 당시, 독일 여행 가서 굉장한 불쾌감을 나타냈던 내용이 있습니다. 히틀러 시절 '우생학'에 대한 논문이었습니다. 아리아인이 유태인보다 우수하다는 내용입니다. 생물학적으로 훨씬 우수하니까 유태인에 대한 차별들이 그들 입장에서는 정당화되었을 겁니다. 그러한 내용들이 개인의 행동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해버리게 되면 행동이 달라져버리게 됩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신분석에서 가리워진 역사인 '사비나 슈필라인' 덕분에 좀 자료도 찾고 연구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마 다시 영화에 대해서 글을 쓰게 된다면 데인저러스 메소드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쓰게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사건과 조금 관계되는 내용이 있다면 오토 그로스 박사가 비슷한 내용이 될 수도 있겠네요. 프로이트는 그를 전형적인 강박증으로 진단했지만 후에 융은 그를 조발성 치매, 즉 편집증으로 진단했습니다. 물론 저도 과거 작품에서 그로스를 편집증으로 진단을 했고요. 만약 프로이트가 나르시시즘 서론을 집필한 후에 그로스가 발병했다면 프로이트도 편집증으로 진단했을 겁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나르시시즘에 대한 구상도 잡혀있지 않았던 때라서 그렇게 진단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사설이 기네요.
우선 이 논문에서 이야기한 프로이트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저자가 주장하는 관음충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인 고찰이라고 쓴 내용이 있습니다. 저자는 관음증이 남근기의 남아가 자신과 타자를 구분하기 위해서 보는 행위 통해 호기심과 앎을 충족시키려는 남근 기적 쾌락 추구로부터 발생했다고 주장을 합니다...만...
이 내용을 세명의 철학 교수가 심사를 했는데... 아무리 정신분석 임상을 몰라도 좀 지나치지 않았나 합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정신분석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접해보면 남근에 상당히 집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근기에 고착되면 관음증이 발생한다는 것은 저자가 연구가 아니라 소설을 쓴 느낌이라고 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아예 대놓고 프로이트가 '여성의 성욕'이라는 주제로 논문까지 써놨는데 그것도 안읽어본 것일까요? 특히 이것은 현대의 페미니즘 학자들에게서도 등장하는데요. 주디스 버틀러가 '레즈비언 팔루스'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여성에게도 팔루스와 같은 기관이 있다고 논문에서 썼습니다. 그것도 여러번. 그런데 자꾸 페미니즘에서 그런 내용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 내용은 쏙 빼놓고 읽었온 것 같습니다. 다른 경우에도 좀 그렇습니다. 여성 정신분석가 경우는 성인의 정신질환보다는 아동 쪽으로 많이 빠지는 이유가 누군가의 성적 욕망을 대면하기 곤란한 지점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긴 합니다. 뭐...이 문제는 다음에 다루어야 할 내용일 것 같네요.
정신분석적인 관점에서 관음증의 발달은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할까요? 정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신경증 중에서 눈이 성감대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로 강박증에서 그런 현상이 많이 등장합니다. 자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강박증의 고착점이 남근기일까요? 항문기에 고착점이 있다고 하죠? 프로이트도 그렇게 연구했고 상담사들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남근기가 고착점으로 될 때는 히스테리'일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이 내용을 상상력으로 썼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시선의 문제는 충동 작용과도 관계됩니다. 이는 관음 충동과 노출 충동으로 나뉘는데 이는 각각 능동 충동과 수동 충동으로 대립쌍이 만들어집니다. 활동성 문제도 여기에 포함이 된다는 거죠. 따라서 이 저자는 페미니즘에 대해서만 공부를 했지 정신분석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조사한 적도 없다는 말입니다. 한 줄 더 보탠다고 이 말을 갖다 붙인 것 같은데... 제가 그 바람에 짜증이 좀 나긴 했습니다. 이따위로 정신분석을 갖다 붙이면 판타지 소설을 쓰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전 글에서 애착 이론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신경증을 생애 초기의 문제로 규정을 짓는다면 절대 치료될 수 없는 신경증 환자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죠. 태어나면서 불안이 높은 상태로 태어났다. 그래서 지금 불안해도 그 상태가 정상이다. 즉, 당신의 불안증은 앞으로도 나을 수 없고 평생 그렇게 사는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어버립니다.
이 논문에서는 남자라는 존재 자체가 무조건 '관음충'이 된다고 규정하는 것 같습니다. 즉, 모든 남자는 예비 성범죄자가 될 거라는 말입니다. 당신의 아버지도, 오빠도, 남동생도, 유치원에 있는 아이들까지 모두 예비 성 범죄자라는 겁니다. 이런 식의 내용을 전개한다는 것은 인간의 발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자신의 상상력이 현실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도 같다고 여겨집니다. 인간의 정신작용에 대해서는 관심 1도 없다는 이야깁니다. 나아가서 배틀 그라운드나 오버워치를 즐겨서 살인마가 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거죠.
비슷한 사회현상을 벌써 등장하고 있네요. 카메라 들고 방송해도 몰카 촬영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니까요. 저는 그런 경우를 정신병으로 생각하고 싶진 않습니다. 정치적이거나 사상적 편향에 물들어서 그렇게 해석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렇게 보는 이유에 대해서 잠시 설명하도록 하죠. 제가 나르시시즘 문제에 대해서 강의 한 내용을 연재했었습니다. 아마도 기존에 받아들이던 나르시시즘의 내용과는 많이 달라서 애매하게 느껴지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나르시시즘이란 하나의 단독 작용이 아니라 정신작용에 관여하는 하나의 장치로서 기능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렇게 보아야 욕망 기계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신경증과 정신병을 일으키게 되는지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고요.
나치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해봅시다. 독일 나치 단원들은 히틀러의 사상에 물들었습니다. 히틀러가 실제로는 별 능력도 없었다고 하는데 연설 능력만큼은 탁월했다고 하죠. 히틀러의 말이 자아에 추가적인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자아에 추가적인 힘을 부여해서 초자아의 검열을 이겨내게 만들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생학과 같은 학문들이 독일인들의 나르시시즘을 자극했고 자아에 추가적인 힘이 더져허서 초자아의 검열을 벗어나게 만든 겁니다. 따라서 그 당시의 독일인 들은 유태인을 정말 벌레 보듯이 보고 차별하고 권리도 주지 않았죠.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이고요. 죽든가 말든가 그들은 사람이 아닌 겁니다.
히틀러가 끔찍한 이유는 독일인들을 선동해서 다른 인종과 구분되는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인간을 해치면 안 된다는 초자아의 검열이 있지만 나치에게 그게 통할 리가 없죠. 검열이 되지 않으니 사람을 죽이는데 동정심도 느끼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한때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성범죄에 연루되면서 '과학'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의 법칙과도 같다는 거죠. 편향된 사상에 빨려 들어가면 자기 말이 다 맞아야 합니다. 페미니즘에 찬성하는 페미니스트지만 그건 다른 사람에게 훈계할 때나 그렇습니다. 자기는 제외됩니다. 자기 행동이 검열이 되지 않으니까요. 즉,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 관대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다른 가능성으로는 규율을 벗어나는 것을 즐기는 변태들이라는 말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는 생각보다 큰 문제이기도 하죠. 그런데 이 논문에서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조금은 관대한 태도를 보입니다. 현실이 아니라 상상력이라서 그럴까요? 자기들 말을 들어주기 때문에, 혹은 남성이라고 해도 사상적 동지이기 때문일까요?
어떤 세계관의 주입이나 사상적 편향 역시 비슷한 현상을 불러옵니다. 예를 든다면 얼마 전 시끄러웠던 남자 아이돌의 알페스 문제가 그렇습니다. 저는 알페스 문제가 아이돌 산업에서 규정한 어떤 세계관의 문제와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 세계관에 빠져들면서 성적 판타지가 가미될 테니까요. 그런 내용에 빠져드는 경우는 쉽게 관찰될 수 있을 겁니다.
논문 이야기를 이어가 봅시다. 용어 문제를 제외하고 저자의 논문에서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면 집단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만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범죄 집단 A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범죄의 가능성들을 다 포함할 수 있습니다. 집단 충동이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집단 범죄에서도 이러한 집단 충동이 작동합니다. 집단 충동이 발생하게 된다면 개인은 그것에 저항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집단적으로 싸움이 일어나면 쉽게 멈추지 않게 되는 것이기도 하죠. 집단이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면 더 강한 처벌이 필요하다고도 여겨집니다. 사회적 규율을 벗어나는 행동도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논문에서는 집단과 개인의 구분이 없습니다. 남자라는 개체를 인정하지 않고 집단으로 이해를 해버렸습니다. 철학에서 집단 심리 문제를 연구한 논문이 없을까요? 집단 심리의 고전으로 읽히는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 정도는 철학 교수들도 접해봤을 텐데 말입니다. 설마, 그런 것도 전혀 구분하지 않았던 걸까요? 거기다가 검수한 교수가 남자라면, 그도 관음충에 속할겁니다. 관음충에게 자기 논문의 증명을 맡긴 걸까요?
제가 보기에 용어를 제외한 논문의 가장 큰 문제는 집단과 개인을 구분하지 않고 마구 적용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논문들이 개인 심리 혹은 나아가서 선동의 도구로 활용이 된다면 그 파장은 히틀러 시절의 우생학이랑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겁니다. 히틀러야 독일인에게 우위를 부여해주었지만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일방적 우위를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라는 세계관을 주입하고 그 안에서 남성은 모두 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선동이나 다를 바가 없죠.
히틀러 시절 선동 기법의 하나로 '크게 거짓말하기'라는 게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모두 동일한데 우생학을 통해서 차별성을 부여하면서 초자아의 검열을 벗어나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러한 정치적 프레임이 씌워져 있으면 세상도 그렇게 보입니다. 여기서 선민의식이 출발하지 않을까 합니다. 정치병자도 그렇게 만들어질겁니다. ISIS같은 테러 집단 역시도 이와 비슷한 기제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저도 잠시 벌레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이는 정신분석사에 있는 이야깁니다. 로제 카이와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라캉에게 많은 영향력을 준 사람이었는데요, 미노또르라는 초현실주의 잡지에 논문도 기고를 했습니다. 하나는 사마귀에 대해서 썼고 다른 하나는 의태(mimicry) 현상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1830년대 파리에서 발달한 정신분석학에 큰 영향을 끼친 논문이었다고 합니다. 라캉이 거울 단계를 작업할 때 신세를 졌다고 까지 표현을 했었습니다. 정신분석에서는 꽤 중요한 내용입니다.
흔히 의태(보호색)를 생존과 연관해서 생각합니다. 그런데 카이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곤충에게 이롭지 않은 것이라는 거죠. 보호색이 실제로는 생존을 촉진시켜주지 않는 것으로 말하는 겁니다. 나아가서 그 생물들을 대학살 하는 효과까지 일으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이유로 의태를 하는 경우 곤충이 환경과 뒤섞이는 것은 그 동물이 같은 종족에 의해서 실수로 먹힐 수가 있습니다. 또는 짝짓기와 같은 생식 목적에서 탈락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종종 그러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기능이 오로지 시각의 영역에서만 등장합니다. 그런데 천적의 사냥은 냄새와 동작에 의거합니다. 그래서 생존과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의태란 곤충의 시각적 경험의 한 기능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카이와는 의태를 곤충의 공간인식과 연결 지으면서 생존과 무관한 일종의 '곤충식 정신병'이란 가설을 설정합니다. 모든 유기체의 삶은 그 자체의 차별성이 유지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동일성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의태란 이 동일성의 상실을 이끌어냅니다. 즉, 공간의 거대한 외부성에 유혹되면서 자기 자신을 상실해버리는 경험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억지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봅시다.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 안에서만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면, 선동을 해야 그 세상을 만들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선동해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면 그 안에서 자기 동일성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좋은 조건일 겁니다. 여성이라는 단어안에 존재가 감춰지는 겁니다. 그러나 존재는 그 정도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관음충이라는 단어로 남자라는 존재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저자의 입장에서는 남자는 하나의 '다발'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에밀 뒤르켐이 자살론 연구할 때 인간 집단을 존재가 아니라 개체의 모임으로 받아들인 것 처럼요.
이 논문에서 보겸이라는 유튜버의 실명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유튜버를 왜 거론한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물론 유명하고 이슈거리가 되니까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성 혐오 사례를 찾으려면 다른 사례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왜 다른 인물을 박제한 걸까요?
정신분석에서 강박증을 설명하는 이미지 중의 하나는 이런 게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인범이 누군지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범인의 범위를 줄이고 있었는데 백정 세 사람과 그 마을에서 유일한 재단사가 범인으로 지목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백정을 범인으로 지목해서 처형해버립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범인은 재단사였습니다. 재단사가 범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마을 사람들은 백정이 범인이라는 단서를 만들어냅니다. 칼을 다룰 줄 알고 평소에 행실이 어떻고 하는 것을 따집니다. 그리고 재단사는 마을에서 유일한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고 믿어버린 겁니다. 백정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거죠.
저는 이 논문에서 유튜버를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대응도 좀 그렇습니다. 제기된 문제와 전혀 다른 엉뚱한 해명만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도 좀 드네요. 진실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저항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침묵입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그 상황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현재의 문제와 관계없는 이야기를 지껄여대는 겁니다. 따라서 엉뚱한 곳으로 문제의 방향이 빠지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부긍'이라는 내용을 이야기한적이 있습니다. 부정-긍정을 줄여서 부긍이라고 합니다. 쉽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뜻입니다. 보겸은 대화를 원해서 찾아갔지만 저자는 오히려 공격당하고 있다고 기사를 내기도 했습니다. 항의하는 내용이 좀 있었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공격으로까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보겸은 대화를 시도했던 것뿐입니다. 그런데 공격을 받고 있다? 너무 지나친 반응이 되지 않을까요? 이것은 어떤 전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이 내용은 저에게 다른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가만히 있다가 공격을 받았다고 호소한 사람 중에 유명한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안인득'
그는 검거당해서도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당해왔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대체 뭘 어떻게 당한 것인지 알 수가 없죠. 그리고 화재를 일으켜서 무고한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제 브런치에 관련된 분석이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최근 정주희 전 아나운서가 출산하고 아들을 키우는 유튜브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아주 화가 나는 악플이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언론에서도 보도된 것인 만큼 검색해보시면 찾아보실수 있는 내용입니다.
'남자아기는 예비성 범죄자인데...' '나중에 커서 여자상대로 범죄 저지르기 전에 안락사하세여 ㅠ' '저 아기는 예비 성범죄자이자 잠재적 가해자입니다.' '잠재적 범죄자로 자랄바엔 어릴때 머리 존나 때려서 장애인 만드는게 나을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