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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May 18. 2021

페미니즘 게이트

어린아이들에게 어떤영향력을 미칠까?

얼마 전 어린아이들에게 페미니즘을 조기 교육해서 세뇌시키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는 왕따를 조장해야 한다는 이슈가 있었습니다.(이하 페미 게이트) 페미니스트들은 여기에 동의를 할까요? 성을 미리 인지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분노를 할까요? 


여러 정치적 입장들도 있겠지만 저는 정신분석적인 시각으로 접근해보려고 합니다. 대체 왜 아이들에게 이러한 사상의 주입이 문제가 될까요? 단지 정치적 문제로만 치부한다면 설득력은 떨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저는 여기에 대해서 정치적이 아니라 교육적인 입장의 글은 검색을 해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고 브런치에서는 비판적인 논조를...찾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단순히 조작했다고 주장하는것은 맞든 틀리든 상관없다는 것이고요. 


그런데 어린 시절의 사상 교육은 상당히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여성들이 하는 행동들은 익히 잘 알려져 있으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남성을 적대시하는 행동들을 많이 하죠. 그리고 젊은 여성이 아니라면 페미니즘 이슈와 크게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정치적 전략이라고 하면 그 사람들은 모두 페미니즘에 따른 권력 도구에 불과한 것이니 인간적이지 않다고 봐야겠죠. 그런데 이것이 유아교육 차원에서 등장했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될까요? 저는 이 점을 정신분석의 임상을 통해서 고찰해보려고 합니다. 



프로이트가 유년 신경증을 연구하면서 쓴 글이 있습니다. 바로 '늑대인간'이라는 임상사례입니다. 이 늑대인간의 가정은 매우 부유했던 귀족 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보모도 따로 두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늑대인간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돌봐줄 보모도 두고 가정교사도 두었습니다. 


늑대인간은 자기 보모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독실한 신앙인이었고 어린 늑대인간을 무척 잘 보살펴 주었고요. 엄마가 해주지 못했던 것을 보모가 다 해주었죠. 대신 외적으로는 좀 투박했다고 합니다. 전형적으로 시골에서 일 많이 하는 할머니들 스타일을 떠올려보면 될 것 같네요.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날 늑대인간의 교육을 영국인 가정교사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요양을 하기 위해서 부모님은 여행을 잠시 가죠. 그래도 걱정은 없었습니다. 보모도 있고 가정교사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늑대인간의 부모님은 여행 갔다 와서 아들의 성격이 이상하게 변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교육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 거죠. 그리고 영국인 가정교사를 내쫓아버립니다. 평소에 얌전하고 온순했던 아이가 갑자기 폭력적으로 변했으니 부모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때 늑대인간의 나이가 '4살'이었죠. 


이 내용은 이후에 프로이트와 분석을 진행하면서 진상이 밝혀졌는데, 그 당시에 영국인 가정교사가 교육을 하면서 그 보모의 험담을 했었다는 게 밝혀집니다. 생긴 것도 그렇고 지적이지도 않고 해서 여러 가지 험담을 했는데, 늑대인간이 그것을 듣고서는 화가 난 겁니다. 어린아이의 지적능력을 무시했던 영국인 가정교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늑대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복수를 해야 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과격한 행동들을 일삼아야 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지적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화가 나면 나름대로 표현도 합니다. 노려보기도 하죠. 특히 아빠 엄마를 안 좋게 이야기하면 화를 내는 아이들이 꽤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경험에서 "나는 그런 적 없는데?"라고 하실 수는 있겠습니다만 개인의 특수성을 전체로 일반화하시는 것은 곤란합니다. 


늑대인간의 사례에서 교육에 의해서 갑자기 성격이 변했다는 것이 등장했습니다. 어린 아동은 남성과 여성의 구체적인 구분이 등장하기 전 시기이기도 합니다. 인간으로서 성장해나가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성발달도 일어나고요.


 그런데 이 페미 게이트 사건을 보면 이 점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지적능력이나 탐구할 능력이 없고 오로지 받아들이기만 한다고 믿는 겁니다. 아이들의 지적 능력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이죠. 물론 그래야 할 겁니다. 정치적인 도구에 불과한 거니까요. 


페미 게이트 전략이 들키지 않아서 계속적으로 실시되고 있다고 해봅시다. 그럼 유치원 갔다 온 아이들이 엄마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까요? 


아빠는 엄마를 괴롭히려고 결혼한 거야? 엄마 괴롭혀서 내가 태어난 거야? 선생님이 그랬어.


엄마는 왜 아빠처럼 나쁜 사람이랑 결혼한 거야? 선생님이 남자는 여자를 괴롭힌다고 했어. 

자기 자녀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부모님들의 행동은 어떻게 될까요? 선생님의 교육이 당연히 옳다고 생각할까요? 어린아이들이라고 할지라도 갈등을 합니다. 그리고 괴로워하기도 하고 그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갑니다. 최종적으로 '나 때문에 엄마가 힘들어'라는 내용이 되겠죠. 엄마가 아빠를 안 만났으면 태어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어른의 논리에서는 이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성인과 논리체계가 다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들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던 늑대인간 사례는 유년 신경증의 사례입니다. 정신과에서는 아동정신분열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네요. 즉, 교육이 현실의 갈등을 조장한다면 아이들에게도 신경증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상들이 교육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 정말 세상을 '기울어진' 상태로 인식을 할 겁니다. 


그리고 그 갈등이 점점 심해지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등장하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그것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병적 상태를 선택할 가능성도 생기는 겁니다. 


우리 주변에서 평소에 얌전하던 아이가 페미니즘에 심취하면서 갑자기 공격이 변하는 경우들을 어떤 식으로든 접해보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저도 실제로 접해보기도 했고요. 그런데 성인이 이렇게 변하는 것은 그 자신의 피 암시성 문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집단이 결접되어서 작동하는 충동의 문제는 나치 당시의 우생학처럼 번졌을 것이니까요. 이것은 정치적 세력의 문제고 개인의 책임이 어느 정도 억제를 해줍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 억제력이 발달하고 있는 과정입니다. 즉, 초자아를 병리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결국 어린아이에게는 갈등만 깊어지게 된다는 말이 되죠.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만큼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해결되지 않는 그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결국은 병리현상을 통해서 처리하려고 합니다. 물론 어릴 때는 크게 문제 되지 않는 수준에서 거쳐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습하고 또 그것을 통해서 자아가 발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선과 악을 나누어버리는 교육이 그렇게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진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의 이런 의견에 페미니스트 분들은 반대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만 그들의 전략은 이 부분에 대해서 발언할  수 없도록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으로 대환장파티를 하는 정도겠죠. 페미니스트들의 토론 자세에서 등장하는 강박적 전략이 그렇습니다. 이는 강박증 환자를 분석할 때도 등장하는 내용이긴 합니다. 분석가가 말을 할 수 없게 먼저 수많은 말을 지껄여대면서 말을 가로막아버리는 것이죠. 무엇인가 알고 있는 사람이 먼저 말을 할 수 없게 하는 겁니다. 여기서는 논리를 따지지도 않을 겁니다. 그래서 라캉은 그런 강박증 환자에 대한 탁월한 전략을 보여줬습니다. 분석 도중에 "분석 계속 하세요"라면서 커피 마시러 나가고 담배 피러나가고 혹은 전화 받는다고 자리를 비워버렸죠. 분석가의 자리를 지우려는 강박증적 전략에 찬물을 끼얹어버리는 겁니다. 


 



과거 국정교과서 논란이 있을 때, 유시민 작가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일정한 사상을 아이들에게 강제로 먹이지 말라고요. 어용 지식인이 된 그가 현재의 페미 게이트에 찬성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국정 교과서는 판단력을 형성해나가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이것은 주체에 의해서 선택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페미 게이트 사건은 사회의 질서를 확립해나가는 어린이들에게 강제로 주입한다는 겁니다. 애초에 편향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사육'하겠다는 소립니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자라면 '공동체'에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성격장애라는 말이 등장할 때, 어떤 개인이 공동체에 들어가서 계속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하게 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이러한 페미 교육은 이와 같은 성격장애를 양산하는 방식의 교육으로도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선생님이 a를 가르쳐주었는데 사회에 나오니까  a로 알던 것이 사실은 A라서 혼란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갈등이 발생하고 주체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을 처리하려면 신경증 상태에 빠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것이죠.


페미니즘이 남녀 모두에게 득이 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페미니스트의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으니 정신분석 역사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을 한 번 살펴봅시다.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를 보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프로이트와 융, 그리고 사비나 슈필라인 사이에 일어난 숨겨진 사실들에 대한 영화입니다. 안 보신 분은 꼭 한번 보시는 것을 강추합니다. 


이 영화에서 오토 그로스라는 학자가 나옵니다. 프로이트는 이 사람을 강박증으로 진단을 했습니다. 그 당시까지는 나르시시즘 이론을 발견하기 전이라서 프로이트 입장에서는 강박증으로 진단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 당시 쓰던 논문이 막스 베버의 편지로 박살 나서 학회지에 게재되지도 않으면서 증상이 나타났는데 그 논문의 제목이 '심리학 주의'였습니다. 


오토 그로스는 신윤리라는 이름으로 자유연애를 주장했고 당시의 문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헤르만 헤세 같은 문인들과 교류도 있었고요. 즉, 자기 나름대로의 윤리체계를 다시 세운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 시대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해방을 이야기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두 아이의 엄마를 임신시키기도 했었습니다(그 여자가 막스 베버의 첫 번째 여제자였습니다).


자기가 만든 주의에 빠져들면서 병리적 행동양식이 갖춰진 겁니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효율도 많이 떨어지기도 했을 것이고요. 게다가 자기가 세워놓은 체계가 논파되기도 했으니까 견디기 어려웠을 겁니다. 저도 처음에 영화를 볼 때, 오토 그로스가 보이는 행동 특성에 대해서 왜 강박증으로 진단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서 그럴 수 있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이후의 행동에서는 강박증으로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습니다. 과거에 제가 썼던 책에 저는 그로스를 편집증으로 진단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프로이트와 융의 편지 내용이 공개되면서 그 내용을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는데, 융은 그로스를 조발성 치매로 진단했습니다. 즉, 편집증이죠(융이 정신의학 쪽에 더 가깝기 때문에 크레펠린의 용어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편집증 연구가 진행이 많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도 편집증의 경우는 분석을 잘 받아주지도 않았고요. 1914년 이후에 그에 대한 분석을 진행하는 이론적 도구를 마련할 수도 있었고요. 그것이 '나르시시즘'입니다. 


그로스가 마련한 사상이 자아에 추가적인 힘을 더하게 해 주어서 초자아의 검열을 무력화시켜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정신병 발병이고요. 



저는 페미 게이트 사건 자체가 어린아이들의 지적 능력을 완전히 무시한 형태의 교육이고 정신 건강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정치편향적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받아야 하는 어린아이들을 하나의 정치적 도구로 쓰고 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교육에 참여하지 않으면 아이들 간의 정치질에 자연스럽게 개입해서 왕따를 시키라는 지령(?)도 있죠?


우리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있음을 호소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주체의 선택에 따라서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주입된 이데올로기는 트라우마보다 더욱 중대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다만 사회의 전반적인 환경이 그 교육과 같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 믿고 살아가고 그 속에서 나름의 행복을 찾을테니까요. 그러나 교육된 질서가 배워온것과 다르다면 갈등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결국 그러한 교육으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서 보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안에서 건강과 기쁨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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