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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May 06. 2017

연애 징크스!!!

무엇이 떠나보냄을 가능하게 하는가?

 흔히 연애영화라고 하면 남녀가 어떤 심리를 가지고 있는지가 가장 큰 관심사 일 것이다. 그래서 연애 심리를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들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사랑이야기를 즐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 환호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조금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연애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는 신경증적 반응의 문제를 충분히 고려해 볼 수도 있다. 정신구조에 따라 연애의 형태가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을 것이고 심지어 변태적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큰 쾌감만을 요구하는 상호 종속 관계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문제만을 던져주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의 커플을 연결해주기 위한 어느 여성의 고군분투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드러나는 현상이 상징적인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정신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예술과 등가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상담에서도 ART라는 말을 쓴다. 심지어 라캉은 정신분석을 두고 <너와 내가 만들어가는 예술>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연애 역시도 그러한 가치들을 충분히 포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랑에 빠진 신경증자가 놀라울 만큼 건강해지게 되는 것을 목격한다는 것은 그 과정이 무의식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말이다. 무의식을 다른 말로 <사랑에 관한 지식>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태웅이를 기다리며....

 우리는 일반적인 연애 타령이 아니라 조금 더 진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만약 실연을 당한 젊은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사람으로 치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의 문제를 찾기 이전에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 사람의 이미지를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 지다. 만약 제대로 애도되지 못한다면 남겨진 이미지로 인해 병리현상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은 어떻게 연애를 <잘>하느냐에 대한 제대로 된 공식을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어떻게 <잘> 헤어지느냐에 대해서는 탐구의 가능성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지호가 연인인 태웅을 사고로 잃어버리게 된다. 한국에서 견딜 수 없던 그녀는 그를 잊기 위해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시작은 이때부터다. 그녀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일본인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녀는 늘 혼자 지내는 카에데와 친구가 된다. 카에데는 유스케라는 남자를 좋아하는데 지호는 카에데의 연애를 코치해준다. 어떻게 보면 연애코치 영화의 고전인 미스터 히치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지호가 카에데의 연애코치를 나서서 해주는 것일까? 그녀의 순수한 도움의 목적이 과연 둘의 사랑을 성사시켜주는 것만이 목적이었을까? 물론 지호의 입장에서는 둘을 이어주려고 하는 것이 맞다. 다만 그녀는 자기 내면에 있는 것을 다시 한번 죽여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있다. 그것이 바로 ‘애도’라고 할 수 있다.      


 지호와 카에데는 단어 하나로 연결된다. ‘징크스’라는 단어다. 심지어 지호는 그녀의 욕망을 탐색하기 위해서 징크스라는 단어를 남발한다. 징크스는 오히려 재수 없는 일이나 불길한 징조의 사람이나 물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지호의 징크스는 단지 징조라는 수준에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언어의 위치 자체가 기존의 사전에서 벗어나 있는 셈이다. 이 것은 그녀가 그전에 경험했던 불길함들을 나타내는 말 아닌가?      

예쁘게 웃는 법?

 연인이 죽고 난 이후에 떠올린 사건들에는 의미가 부여될 수 있으며 그것은 불길한 징조로 재해석될 여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가와도 이상하지 않은 사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런 일이 있어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석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건을 합리화라도 해서 그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하는 당연한 시도가 될 것이라고 여겨진다.      


 여기서 지호가 가지고 있는 징크스라는 단어는 그녀의 시선을 규정하는 작용을 하게 되는데 모든 것은 사건의 전조라는 것이다. 마치 습관적으로 오늘의 운세를 탐독하거나 로또를 구매하게 되는 것과 같다. 비록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호의 징크스는 능동적인 움직임으로 어떤 사건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만약 그녀가 수동적인 상태였다면 징크스는 말 그대로의 의미만을 포함하게 되었을 것이다.      


 지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이 사건은 여성들에게 신경증 상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사랑을 잃어서 신경증 상태에 빠져있는 여성을 그리지 않는다. 독특함은 여기에 있다. 영화는 애도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즉, 상실이라는 과제를 어떤 식으로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만약 애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반복 강제의 형태로 그녀는 그의 유령에 시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과 비슷한 세부사항은 일종의 징조로 해석이 되고 죽은 연인은 다시 다른 사랑의 형태로 나에게 돌아와 줄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런 미신적인 태도를 종종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난 연인의 그림자를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그림자를 떠안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목격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평생을 혼자서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여성의 이미지를 생각해보자. 그녀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봉사라는 방식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사랑의 흔적이 너무 강렬하기에 다른 사람에게 그 자리를 내어줄 수 없다는 말이 되지 않을까?      


 연애코치를 하는 과정에서 지호는 과거 태웅과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 순간만큼은 기분이 조금 쳐진다. 다른 사람들이 걱정할 정도다. 지나간 자신의 더러운 과거를 다시 찾아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호는 그 기억에 과감하게 뛰어든다. 마찬가지로 정신분석 과정도 그 더러운 기억 속에서 보물을 찾아내는 과정 아닌가? 또 이것이 지호가 말하는 <징크스>의 궁극적인 의미에 닿아 있지 않는가?    

카에데는 지호가 유스케와 잘 되는줄 알고 삐진다.

 우리는 흥미로운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지호의 회상에서 태웅이 지호와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장면이 카에데와 첫 만남의 방식이 같다는 것이다. 심지어 태웅이 지호에게 해준 이벤트를 유스케에게 알려주어서 카에데에게 해줄 수 있게 한다. 이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대해서 지호는 상당한 거부감을 느낀다.      


 사랑했던 기억 흔적들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호는 그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랑했던 추억들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재현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들은 다른 의미에서 죽은 태웅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작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지호는 그에 대한 생각이 멈추지 않아서 괴로워한다.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서 생각이 멈추지 않았을까?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생각들이 왜 다시 터져 나오는 것일까?     


 우리는 분석과정을 이 장면을 대입할 수 있는데, 분석과정에서는 자아만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병도 힘을 얻는다. 병이 힘을 얻을 때, 현실에서 완전히 이탈하게 되는 경우도 발견할 수 있다. 이 것이 일종의 ‘악화’ 현상이다. 병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지속되는 것이다. 지호의 연애코치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재현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녀는 그 기억을 재경험해야 하고 그 속에서 더 강렬한 추억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더 큰 고통과 직결되어 있다.     


 생각이 나지 않음이 잊었다는 것과 등가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별이라는 사건은 가끔 억압이라는 방식을 동원할 수 있는데, 이때는 과거의 연애를 다시 현실에서 재현하게 만들 수도 있다. 무의식이 교묘하게 추억을 등장시킨다. 프로이트가 히스테리자들을 두고 과거의 추억에 시달리는 사람이라고 괜히 표현한 것이 아니다.    


 유스케의 고백 과정이 지호의 인상적인 경험들로 꾸며져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작업이다. 이 지점에서 그녀의 기억들은 환기된다. 재현과정에서 다시 되살려진 기억들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녀에게 고통이 될 수도 있으며 다른 면에서는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마지막에 카에데와 유스케는 태웅이 생전에 한 고백 이벤트를 지호에게 재현해주는데, 이 것이 영화의 끝이고 지호는 기뻐한다.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지호는 과거의 연애 방식을 정확히 현재에 되살리는 것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벤트를 해주는 것은 유스케와 카에데이다. 이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작용할까?      


 우리는 화장이라는 방식으로 장례식을 치르는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 프로이트식의 애도에서는 항상 상대를 두 번 죽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말은 현실에서 죽은 대상이 마음에서 한번 더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화장은 효과적인 애도 방식이다. 불 속에서 변한 망자의 모습이 생전의 이미지를 바꿔주기 때문이다. 사랑했던 사람의 이미지가 그렇게 바뀌는 것은 슬프지만 현실에서 떠나갔다는 것은 그렇게 받아들여진다.      


 마지막 이벤트는 지호에게 ‘화장’과 등가 가치를 가지는 애도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과거 연인의 사랑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이함으로써 그녀가 얻게 되는 것은 ‘애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것은 무척 건강한 방식으로 애도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진주조개가 진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살갗에 상처를 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치유해 나가는 과정에서 보물이 만들어진다. 지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두 사람의 사랑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자신의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스스로 상처를 곱씹고 그것을 재현해 나가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녀가 새로운 사랑을 준비하기 위한 예비단계인 것이다.

이제 그를 떠나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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