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3.24
25.03.24(월)
<그렇게 하수가 되었다.>
오늘 남편과 점심 식사를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더 이상 음악에 의미를 못 느끼게 되었을까?’
몇 년을 실용음악 전공생으로 음악이 아닌 ‘음학’을 하다 보니,
모든 영역에서 순수함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는 누군가 ‘진정성’을 담아 노래하는 모습에 더 이상 감동받지 않는다.
“진심을 담아 노래하는 사람 많아.
아니, 정말 모두가 진심을 담아 노래해.
그런다고 모든 사람이 성공하지는 않아.
어두운 터널 끝에 빛으로 나아가듯
‘성공’으로 결과를 보인 사람은 1프로도 안돼.
대부분은 어두운 터널 끝에 길을 돌아 다른 출구를 찾지.”
그런 말을 하는데, 내심 나 자신이 참 초라해 보였다.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니,
저녁을 할애해야 하는 레슨과
주말을 할애해야 하는 공연 행사 일정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이름 하나 알려진 거 없는 무명 가수였지만,
나름 높은 경쟁률의 실용음악과가 있는 대학을 졸업해
어찌어찌 벌어먹고 살 수는 있었다.
그런데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그 길 마저 녹록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현실적인’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지나친 이상주의자라고 여기던 나로서는
나의 행보가 무척 놀라웠다.)
나름대로 180도 달라진 내 삶에 잘 적응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내가 뱉은 말은 내가 봐도 너무 멋이 없어 보였다.
그 말은 그동안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한 무참한 부정 같았다.
나는 정말 나를 실패자로 여기고 있는 건가,
그렇게 반문하자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출구는 중요하지 않다.
밝은 빛으로 나아가든, 예상치 못했던 출구로 돌아 나가든
내가 그 과정을 대하는 태도가 이런 식이라면
어떤 결과도 비참할 뿐이다.
‘의미’를 쫓는 것은
어느 시점에선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의미는 내가 찾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해가는 것 그 자체로 찾아지는 것이다.
국문학도가 되고 싶던
어느 어부가 읊는 시가 생각난다.
그 마지막에 스스로 덧붙인 이런 문장이 있었다.
‘한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보다
내가 날 어떤 사람으로 여기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의미로 나는 오늘 완전 하수였다.
삶의 하수.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실패자.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면서
진짜 삶의 실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내가 걸어온 길, 그리고 걸어갈 길에 대한
더한 믿음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정성은 그 순간 내 마음가짐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요하는 삶의 태도라고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그런 태도를 갖추게 된다면,
어떤 절망 앞에서도 그 어부와 같은 시를 읊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못난 하수가 아닌,
삶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고수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