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인간> “머리를 빠뜨린 광인” 비하인드
‘저 인간 또 저렇게 술 마시다 정신머리를 술잔에 빠뜨리겠지.’
술 취한 남편을 보고 있자면 머리통이 술잔에 동동 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흐느적 풀린 눈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자기가 술잔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는 듯 보입니다. 물론 저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닙니다. 저도 술 마시는 걸 좋아하고 술에 취하면 머리를 술잔에 빠뜨려 헤벌레 하고 있으니까요.
어쨌든 나는 멀쩡하고 남이 취한 걸 보고 있으면 그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어휴, 정말, 저렇게 살아서 쓰겠어.’ 짜증이 나는 거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앞을 보고 목표한 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데, 다음날 하루를 날릴 걸 각오하고 술에 취해버리는 인간을 보고 있자면 답답하기만 합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긍정적이고 진취적으로, 꿈을 이루며 사는 거, 그게 가짜고 허상이란 걸 자꾸만 잊게 됩니다. 그런 건 없죠. 인간이 살아간다는 건 흐느적거리는 것이고, 죽어간다는 건 온 영혼이 다 풀어져 녹아버리는 걸 테니까요.
취한 사람들 보며, 취한 나를 보며,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취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술에든 시에든 바람에든 사상에든 우울에든 결국 취하여 살다 깨지 못하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고 죽는 것이다. 그러니 취해 있는 인간을 비난할 것 없다. 그 누구도 취하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
그 무엇에든 취한 사람을 보면 ‘그래, 그냥 이렇게 사는 거지’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쓴 이야기가 ‘머리를 빠뜨린 광인‘입니다.
그 인간은 또 술상 앞에서 꾸벅꾸벅 졸다 그만 제 술잔에 머리를 빠뜨렸다. 술상 위로 술이 넘쳐흐르고 술잔엔 동그란 머리가 동동 떴다. 마주 앉은 이들 중 하나가 미간을 구기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한심하다, 한심해. 완전히 미쳐버렸군.”
머리를 빠뜨린 광인은 무슨 일이 생긴지도 모른 채 멀뚱멀뚱 눈알만 굴렸다. 자신이 빠진 건지 저들이 잠긴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눈앞이 어른거려 고개를 흔들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순간 술상에 둘러앉은 목소리들이 파도처럼 입안으로 들이쳤다.
허억, 컥컥. 내뱉을 새 없이 밀려들어왔다. 미친 게 분명하다는 판정들이 다문 입술을 벌리고 가윗날 같은 비난들이 광인의 목젖을 쳐댔다. 제발, 그만. 그러는 사이 광인의 머리는 서서히 녹았다. 동동 동동. 허물어져가는 기분에 광인은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좋았다.
정신이 조금 드는 건가 싶을 때 지나가던 한 사람이 술상 앞에 섰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술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함께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럼요, 그럼요. 여기에 앉으시지요.”
온순하고 부드러운 모습에 어떤 문제도 일으킬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굳이 그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온화한 미소의 인간은 온화한 미소를 유지하며 의자를 빼 광인의 자리에 앉았다. 광인은 속수무책으로 자신의 자리에 앉는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적당하고 가끔 미묘하게 선을 넘나드는 대화가 오갔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모두가 자리를 즐겼다. 광인의 눈에는 뻐끔거리는 얼굴들이 흩어졌다 모이고 다시 흩어졌다 모이는 걸로 보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온화한 미소의 인간은 그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 입, 두 입 홀짝였다. 술잔 속 광인의 머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녹아버렸다.
술잔을 홀짝거리던 온화한 미소의 인간의 몸이 조금씩 젤처럼 풀어지더니 이내 툭, 텅 소리와 함께 술잔에 머리가 떨어졌다.
- <주머니 인간>, 이현지, 달아실출판사 -
내 앞에 무엇엔가 취한 이가 있다면
녹아 풀어지길 기다렸다가 그를 한잔 마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