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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going Jan 05. 2023

장기적출

부러워하고 있는 부도덕한 내가 부끄럽다

친구가 자궁을 적출했다.

디스크 수술을 하는 과정에서 근종을 발견했는데 꼭 즉시 가보라고 해서 엉금엉금 기어서 대학병원에 갔다.


간단한 친구소개:
비혼. 비혼 선언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짝짓기에 관심이 없고
엄마 아빠의 보호자가 되어 가장으로 살고 있는 지금의 삶이 나름 만족스럽다고 한다. 
서로 잘 아니까 같이 사는 게 편하고, 일단 우리 엄마 아빠가 나를 아주 소중하게 키웠잖아. 한다. 

가끔, 아직도 부모님한테 얹혀사냐? 얼른 시집가야지! 하는 한심좌들이 등장하면 장도리로 뿌셔버리는 대신 '저, 다녀왔어요.'로 슬쩍 밀어내는 기술도 갖추고 있다.  

입시업계에 종사하고 있으며 껍질은 미친개, 속살은 재벌집 막내딸이다. 


내 친구도 난년이지만 내 친구 엄마는 더 난.. 여성.. 이시다.

나는 귀한 내 새끼 장기를 적출한다는 말을 들으면 미안하고 속상해서 울고불고 난리를 칠 텐데

"야, 필요도 없는데 적출해."쿨~하게 말씀하셨다.


대학병원에서는 신이 나서 천만 원대의 로봇 수술을 권유했고 2학기 기말고사가 마무리되는 6개월 후로 날짜를 잡았다.


사례 조사와 상담을 통해 전문병원에서 복강경 수술을 했다.

비용은 1/3로 줄었지만 의사가 다짜고짜 반말을 해서 기분이 나빴다. 너도 반말해. 했더니 엄마가 옆에 계셔서 안돼. 했다. 마취 깨자마자 우리 집 고양이 중성화 수술 때처럼 녹는 실로 2 바늘 꿰매었는데 하나도 안 아프다며 연락이 왔다. 친구 뱃속에서 꺼낸 근종과 자궁의 총무게는 2kg이었다. 의사가 보여준 거대한 병변보다, 저걸 꺼내고 바늘땀 2개로 마무리했다는 것이 더 흥미로워 재잘거렸다.


(디스크 수술에 비해) 안 아프다고 신나서 1박 2일 만에 훌룰루 퇴원한 친구는 무알콜 맥주를 냠냠 잡숫고 출근을 했다.



2L 생수병이 떠오르는 2kg의 살점이 아랫배에서 사라졌다.

친구는 마른 체형이라 나이 들어 똥배 나온 거라고 생각해서 알아채지 못했었다고 한다.


자, 그 살점들.

비어버린 공간.  


장기 전체가 내려앉는 거야? 장만 내려가는 거야? 물었더니 장만 내려간다고 했단다. 

그건 다행이네, 위경련 지옥불(친구와 나는 식도염, 위염, 과민성 대장염 등의 소화기계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장이 경련을 일으켜서... 이하 생략)은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근데 새로 자리 잡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맥주는 데워먹어 ㅋㅋㅋ로 대화 종료. 나중에 보니 장기가 내려간다고 한 것을 내가 착각했다(단톡방이 싫어요!).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리모델링이 시작되었다.

소화기 전체가 영업을 중지했고 물만 삼켜도 배 전체가 진상을 떨었다.

일주일 만에 5kg이 빠져 뼈만 남은 친구는 뼈가 없어져도 남을, 책임감을 원자로 삼아 출퇴근을 한다.

꿀물 먹고 있어. 디스크 수술하고 받은 진통제도 있고 애드빌도 넉넉하다. 괜찮다고 했다.


의사는 아주 간단하게 빈 공간은 장기가 알아서 채우니까 문제없다. 설명했고 우리는 그저 '두 땀' 신기하다고, 기술이 참 좋아. 의사 놈들도 참 잘해. 훌륭하다며 칭찬을 했다.

그런데 디스크 수술때와 같이 이 의사도 수술 이후의 상황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이번에도 수술 참 잘했어 언제나처럼. 아프면 약 먹어. 이러고 아아 사 먹는 건가? 


친구는 중년의 만성통증 대처법인 출근과 마트에서 카트 밀기를 열심히 반복하고 있다. 



'불가능' 말고, 일상이 '불편한' 단계의 통증은 생각과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진통제를 달고 사는 것과 매일 먹는 것은 다르다. 자존심이 있지!


과거의 나는 술로 해결했다. 일단 알코올이 돌면 기분이 확! 좋아지면서 통증이고 가려움이고 설사고 다 사라졌다.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친구와 나는 학교나 리조트 같은 열린 공간에서 술을 마시면 괴성을 지르면서 나선형으로 뛰어다녔다. 멀리 뛰어도 숨이 안 찼다. 행복했다. 20~30대 내내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술 때문에 생긴 문제들이 꽤 있었지만 점심시간에 수액을 맞거나 몰래 해장술을 마시거나 하면서 대충 때울 수 있었다. 의외로 초강력 간을 가지고 있었거나 호르몬의 힘이거나 둘 중 하나였겠지. 그 시절에는 가능했다. 


집 밖에 나가는 것을 지양하는 현재의 나는, 거실에 있는 좌식 자전거에 앉아 심박수 120에 맞춰 페달을 밟으며 책 한 권을 읽는 것으로 통증을 해결(?)하고 있다. (전면부 조작 패널에 있는 스마트폰 거치대에 독서대를 얹을 수 있다.)   

일단 책을 읽기 시작하면 페달을 밟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동시에 통증을 잊어버린다. 보통 1시간 반에서 2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다 읽고 나면 땀으로 완전히 젖은 윗도리를 철썩- 하고 벗어던지는 쾌감을 누릴 수 있다. 뽀송한 옷으로 갈아입고 찌릿거리는 느낌이 사라질 때까지 대퇴사두에 얼음팩을 올려 아이싱을 한다. 대퇴사두에 집중하는 동안에도 통증을 잊을 수 있다. 아이싱이 마무리되면 온몸의 힘을 빼고 널브러져 심박수가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방금 읽은 책과 다음 읽을 책을 생각한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화장실 청소나 가벼운 부부싸움도...


중요한 것은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거다.  

아플 틈을 주지 않는다-는 표현은 좀 과격하고, 살짝 힘들 정도로 몸을 움직이면 힘듦에 통증이 희석된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근데 이거 누가 이렇게 해 놓은 거야! 이건 또 왜 이래? 

이 느낌으로


시간, 공간, 자본이 허락된다면 소음 없는 쾌적한 장소에서 우아하게 초 켜고 향 피우고, 차 마시면서 호흡과 명상과 요가를 할 텐데 그런 호사는 미래의 나에게 양보하기로 한다. 



그런데 사실 나는
친구가 무척 부럽다.

생리가 끝나서.
생리에 주렁주렁 붙어있는 각종 질환과 통증이 끝나서.

나도 적출하고 싶다.

에잇, 등 찜질이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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