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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정답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요

자기 계발을 하면서 깨달은 진실

by 재민

나는 자기 계발 덕후다. 덕후라는 말을 쓰는 것도 드문 일인데 그 분야가 자기 계발이라니. 갓성비를 따지는 한국 사람이 분명하다. 어쨌든 나는 하루에도 많은 자기 계발 콘텐츠를 보고 듣고 읽는다. 그리고 그 콘텐츠들은 나에 일상에 많은 영향은 끼친다.


나는 듣기 싫은 알람이 울리면 곧바로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바로 침구를 정리한다. 이건 성공한 사람들이 꼭 하는 작은 성취를 위한 습관이라고 한다.


침구를 정리하고 찬물 세수로 잠에서 깨면 제일 먼저 일기를 쓴다. 잠을 잘 잤는지, 몸상태는 어떠한지, 하루를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글을 쓴다. 자기 계발 업계(?)에서는 이걸 모닝 페이지라고 하기도 한다.


요즘 퇴사 후의 아침은 여유롭고 널널하다. 나를 챙길 수 있고, 내 마음도 챙길 수 있다. 명상을 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한다. 옆에 따듯한 차를 내려놓고 천천히 하루를 시작하면서 불안한 마음은 누르고 활기찬 하루의 시작을 준비한다. 업계에서는 이걸 슬로우 모닝이라고 한다(미라클모닝을 기대했다면 당신은 벌써 자기 계발 트렌드에서 뒤처진 것이다).


나는 회사를 다닐 때도, 퇴사를 하고 난 후에도 자기 계발 콘텐츠를 좋아했다. 다양한 인사이트를 얻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는지 탐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레퍼런스를 많이 보다 보면 인생의 진리나 성공하는 방법, 잘 살아나갈 수 있는 비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각적, 음성적, 활자적 콘텐츠에는 (특히 경제적으로) 성공했고 어떤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나오니까. 그러나 퇴사를 하고 3개월 동안 이 루틴을 지키며 살다 보니 자기 계발에 점점 지쳐가는 내 모습이 보였다.


이번 주까지 자기 계발 콘텐츠를 열심히 소비하면서 남은 건 공허함과 피로감과 허무한 생각뿐이었다. 물론 자기 계발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 있어 다양한 이점이 있지만(동기부여나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정도) 몇 년을 그렇게 소비하다 깨달은 건 결국 각자의 인생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것을 깨달은 건 자기 계발 콘텐츠가 아니라 의사 선생님과의 상담에서였다.


지난번 의사 선생님과의 진료에서는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 : 요즘 제가 너무 늦게 일어나요.


선생님 : 몇 시간 주무시는데요?


나 : 한 8시간에서 9시간이요.


선생님 : 늦게 일어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나 : 카페 알바가 자정에 끝나는 날이 있어서, 그런 날은 늦게 자서 그런 것 같아요.


선생님 : 약 때문에 잠을 오래 자거나, 잘못된 패턴 같지는 않아요. 그냥 일정한 시간에 주무시고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도록 조금 노력하면 문제 될 건 없을 거예요.


나 :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도 문제없다는 건가요?


선생님 : 하시는 일이 문제가 없으면 충분히요.


나 : 오 마이갓.



몇 년 전 미라클모닝 트렌드의 여파였는지, 아침에 일어나 달리기를 해보라는 어떤 자기 계발 콘텐츠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무의식 속에 늦게 일어나는 것을 실패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퇴사 후 생활 패턴이 바뀌었던 것을 “게으르고 의지가 없다”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나는 자기 계발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남들에게 정답인 것들을 내게 적용시키려고 했었다. 그렇게 하면 그들처럼 될 수 있을 거라는 심지굳은 믿음도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그냥 내 상황과 성격에 맞춰했으면 되었을 것을. 이제 와서 늦은 후회를 해본다.


인생에 어떤 정답을 찾고 싶어 헤맸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확실한 도전, 확실한 성공, 확실한 미래. 어쩌면 주기적으로 챗지피티에게 사주를 보는 나에게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삶에 정답 따위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자기 계발 덕후로서 한 순간 자기 계발을 끊을 수 없지만 당분간은 자기 계발 디톡스를 해보려고 한다. 대신 소설책을 읽고, 나를 박장대소 터뜨리는 예능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더 갖으려고 한다. 마음이 원하는 음식을 먹고 산책을 할 것이다.


현재의 내 마음에 집중하면서 당분간은 스스로를 위로해야겠다. 재건축을 하려면 이미 지어진 건물을 카피하는 건 표절이니까(실제로 건축도 표절이 있다). 나만의, 나를 위한 건축물을 짓는다는 마음으로 이번 주도 살아가봐야겠다.


PS. 지출도 줄일 겸 구독하던 유튜브 프리미엄도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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