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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장 Dec 13. 2023

양재와 신촌 사이

스물다섯, 스물 하나가 어려질 때


안국에서 약속을 마치고, 홀로 사는 집으로 돌아가려 3호선을 쭉 타고 양재로 내려온 날이었다. 송도를 비롯해 서울 남쪽에 있다 싶은 지역에 사는 경기도민들은 양재를 거쳐 집에 갈 때가 많다. 붉은색 혹은 하늘색의 거대한 버스들이 강남 근방에서 출발하면, 내리 달리다 양재에서 핸들을 꺾어 정차한다.


몇 년 전부턴 초록색과 노란색도 섞인 2층 버스도 지나간다. 관광과는 아주 거리가 먼- 계산과 생존 측면에서 탄생한 버스지만 괜히 2층이라고 설레곤 했다. 이제 지쳐 잠든 이들의 노곤만 가득한 차내를 몇 번 보고서 그런 설렘은 싹 잊혀버렸지만.


‘양재 시민의 숲’ 


역명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민들은 숲을 이뤄 버스를 기다리고, 버스가 들어오면 버남 숲이 던시네인을 향해가듯 우르르 몰려간다. 인천 방면, 수원 방면, 성남 방면, 동탄 방면, 줄지어진 표지판엔 서울을 제외한 온갖 주요 경기도 도시들로 버스가 향한다고 적혀있다.


이쯤 되면 ‘양재 시민의 숲’에서 ‘시민’은 도대체 어떤 지역의 일원을 일컫는 것일까. 낮에 한가로이 밟을 수 있는 사람보다 늦은 밤 먼발치 정류장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많은, 그 숲의 이름은 시민의 숲이지만 도로를 마주한 보도엔 도민들의 숲을 이루고 있다.


아무래도 이곳엔 직장인들이 많았다. 네모진 메탈 안경 속 눈이 풀린 채 걷는 남색 패딩코트 아저씨, 길에서 보면 괜히 피하고 싶어지는 취객 걸음걸이지만 덩치가 왜소해 행인들에게 그다지 무서운 존재까진 못 되어 보여서 다행인.


이 날씨에는 조금 추워 보이는 치마를 입은 여자, 머리에 한껏 넣은 컬을 보니 어디 소개팅이라도 하고 왔나 보다. 그다지 높지 않은 검정 구두를 신은 걸 보면 결혼식에 갔다 지인들끼리 뒤풀이라도 하고 왔을지도 모르겠다. 벤치에 앉은 남자는 노트북을 펴고 시린 손으로 무얼 자꾸 두드렸다. 청바지에 검정 롱패딩을 입었는데, 아마 안에는 얇은 긴팔티 하나만 걸쳤을 것이다.



합정에서 M6724를 탈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란 생각을 했다. 신촌, 연세대 앞에서 출발하는 M6724는 홍대와 합정을 거쳐 송도, 연세대 국제캠퍼스로 직행하는 버스다. 연세대 신입생들은 이미 신촌 정류장에서부터 길게 버스 줄을 서있고, 그래서 저녁 10시가 지나 합정에서 M6724를 탄다는 것은 한 시간 정도를 자리 없이 두 발로 버텨 송도로 가겠다는 말과 동일하다.


어느 날도 내 차례엔 입석만 남아있었고, 뒤에 ‘연세’를 자수로 새긴 바시티 재킷(속칭 과잠)을 입은 학생들이 절반에 달하는 버스 복도에 끼여 섰다.


똑같이 술을 마신 성인들의 집합일지라도 양재의 광역버스와 신촌의 광역버스는 그 분위기가 다르다. 양재가 직장에서 타의 반으로 끌려간 고깃집 회식을 마치고 뻗어서 자는 직장인들의 모음이면, 신촌은 이대생들과 미팅을 한 솜털 난 남정네들이거나 동아리 사람들과 치킨집에서 맥주를 마시다 막차 시간 때문에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 스무 살의 집합이다.


양재의 버스는 사뭇 적막하고, 신촌의 광역버스는 신기할 정도로 왁자지껄하다. 서서도 눈을 감고 어떻게든 에너지를 보존하려 애쓰는 직장인들과 달리, 신촌의 거나한 대학생들은 유별나게 대화를 사랑한다. 기사님도 이를 아시는지 과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듯 별다른 제재를 안 하신다. 구토용 검정 비닐봉지를 곳곳에 걸어두어, 주량을 모르고 부어라 마신 새내기들의 참사를 대비할 뿐이다.


노곤함 대신 은색봉으로 균형을 잡고 선 내 옆으로, 큰 소리로 진실 고백을 하는 두 남학생이 있었다.


“야… 솔직히 말할게. 네가 안 사귀었으면!

… 내가 너 여친 만났어.”

“아, 형 괜찮아요. 나 솔직한 거 좋아.”


버스 사람들 다 들으라고 사랑과 전쟁 멘트를 뱉는 그 둘은 뭐가 아직도 할 말이 남았는지, 신촌에서 술자리 4시간 - 버스에서 스탠딩 코미디 1시간의 대화로도 모자라 ‘내려서 한잔 더 하자’ 외치며 내렸다. 주봉지기 천배소*라 했던가. 모자람도 모남도 특별함으로 보는 저들에겐 편견이 없고, 이제 막 알게 된 모두가 좋은 사람이다.


나도 저 땐 그랬을 것이다. 더 목소리도 컸을 것이고 더 염치도 없었을 것이다. 술이 다다른 혀가 날 것의 감정 표현을 하고, 내려서 눈 붙일 생각 대신 누구랑 한 잔 더할지 생각했을 것이다. 막차를 타느니 첫차를 타던 나는 서서라도 홀로 눈감을 생각만 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어쩌다 첫차를 타면 내 몸은 숙취로 이틀은 죽어있다.


그래도 내 마음만은 정말 변한 것이 없는데-라고 생각하다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을 떠올린다. 젊음의 강물을 시간처럼 흘려보내고 있는 나는, 이미 같은 강이 아니게 되버린걸까.




변화는 으로 이어지지만 그 인식은 으로 이뤄진다. 어느 순간 4천 원이 되어있는 김밥 한 줄, 다시 생일이 돌아온 일 년, 문득 꺼내 입었는데 맞지 않는 여름 바지 같은, 일련의 감각 속에 이정표가 될 만한 점들 말이다.


얼마 전에 졸업생을 불러 모으는 운동부 동아리 행사에 가서 일이다. 뒤풀이에서 자정까지, 많이 나면 10살 차이 나는 후배들과 섞여서 술 마시고 시끄럽게 얘기하며 놀았다. 나름 스스럼없이 지내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도착하고보니 몇 통의 안부(!) 문자가 온 것이다.


‘오늘 오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2차 못 가서 정말 죄송합니다 선배님... 다음번엔 꼭 2차까지 가겠습니다.’


‘선배님’은 그간 변화를 인식하는 점이었다. 택시 태워 보내진 부장님, 혼자 흐른 시간에 피식하며 그만 좀 감사하고 그만 좀 죄송하라고 답장해줬다. 그것마저 손윗사람의 핀잔으로 들렸을까 걱정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지만 나는 여전히 친한 이들과 만나 반대로 행동하길 좋아한다. 그러다 가끔은 저들의 말이 어리게 들리고 내 말이 권위적으로 발산된다고 느낄 때, 모든 걸 닫아버리고 돌아서고 싶어진다.


연어처럼 마냥 강물을 거스르지도, 해파리처럼 바닷물에 휩쓸리고만 싶지도 않은 내게, 갑작스럽게 다가왔지만 사실 갑작스럽지도 않았던 변화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건 참 어렵다.


나도 그로운-업이 되고 싶다. 그러면서도 영원히 소년이고 싶은 건 욕심일까. 바라는 게 많아 불확실성만 넘치는 내게 확실한 건 언젠가 지금 이 발 없는 새같은 시기마저 그리워할 것이란 거다.


양재와 신촌 사이,

그즈음을 서성이는 추운 겨울의 지금을.





*좋은 사람과의 술자리는 천 잔의 술도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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