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 없는 요리칼럼 (1)
밥을 어지간하면 해 먹는 게 일상이긴 하지만, 거기에 “아, 요리 잘하세요?”라는 질문을 들으면 대답하기가 참 애매하다. 내 손에 익은 재주래야 기껏해야 닭안심에 소금 후추 쳐서 구워 먹거나, 가끔 시간이 좀 난다 싶으면 바지락에 시래기를 넣어 된장국을 해 먹는 정도인 까닭이다.
지인들 여럿이 집에 놀러 올 일 있으면 재료만 남을까 봐 선뜻 못해봤던 요리(조개술찜이나 라구파스타 같은)를 선보이기도 한다. 그거 외엔 혼자선 대파와 마늘을 뭉텅 같이 삶아 수육을 자주 해 먹는 것 같다. 이 정도가 내가 주방에서 낸 결과물 중 요리라고 부를 수 있는 메뉴인 것이다. 자, 이제 나는 요리를 잘하냐는 질문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가만 보면 요즘 사람들은 대-체-로 요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요리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상위권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의 요리 실력은 양극화되어있다. 라면만 가지고도 똠양꿍을 만들어내는 자취 요리 달인이 있는가 하면, 형형색색한 플레이팅 사진을 자랑하는 마스터셰프인스타도 있다.
그러나 열에 아홉은 요리를 하냐는 질문에 “냉장고에 물 하고 맥주 밖에 없어요.”라는 응답이 대다수이고,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봐야 냉동실에서 닭가슴살과 팩볶음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 ‘조리’ 수준이다. 딱 그 사이에서 ‘먹고살 만큼’의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는 나는 그래, 요리조리사 정도라고 해야겠다.
내 세대의 아버지들이야 말로 딱 그 ‘요리조리사’라는 별칭이 걸맞지 않을까. 예전에 인터넷 게시판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제목으로 ‘아빠들 요리 특징.’이라고 적혀 있고 클릭해서 들어가 보니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이다.
‘할 줄 아는 건 많지 않지만 자기만의 특별 메뉴가 있음. 이것저것 다 때려 넣는 것 같은데 일단 밥에 비벼먹으면 맛있다.’
맞지-맞네, 어머니가 가사를 전담하는 가정이 많던 나 어릴 적엔 확실히 그랬다. 요즘엔 상황이 좀 다른 것 같다. 자취하는 친구들이나 결혼한 부부들에게 물어보면 여자 쪽보다 남자 쪽이 요리에 취미를 두는 경우가 많다. 삼십 년 뒤 게시글 제목으론 ‘엄마들 요리 특징’이 적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내 아버지도 딱 요리조리사이셨다. 자주 먹었던 것 중에 기억나는 건 김밥전, 저녁거리로 특대 포장해 와 먹다 남은 살코기를 다음날 고추장과 마늘에 적당히 볶아낸 매운 족발, 국물이 필요한 아버지의 니즈와 밥을 먹고도 여전히 배고프다는 동생의 아우성이 맞아떨어져 끓여낸 후식 라면.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중학생쯤이었나, 딱 그 정도 난이도로 일관해오신 아버지의 요리 필모그래피에 특이한 경력이 하나 추가되었다.
‘유산슬’
유산슬은 사실 내 또래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름은 아니다. 팔보채, 양장피와 함께 대표적인 ‘동네 중국집’ 고급요리지만 별로 먹어볼 일이 없었다. 8,90년대 가든과 중국집 정도가 전부이던 한국의 외식 산업은 이제 눈부시게 고급-다양화되었고, 더 이상 짜장면은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이 아닌 탓이다 (오히려 기념일에 중식은 먹으러 가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이다).
내 나이 친구들이 중국집을 갈 때는 운동부 훈련이 끝나고 단체로 밥을 먹을 때, 혹은 전날 술을 진탕 마시고 짬뽕으로 해장을 할 때뿐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사치 부려봐야 기껏해야 탕수육을 추가하지, 유산슬이라니.
그러니 당시 중학생이었던 내가, 낮부터 특별한 요리를 해주시겠다며 방긋이 올라간 입꼬리로 기대하게 만드는 아버지의 표정과 듬직한 뒷모습에도 그저 의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빠, 우리 뭐 먹는 거예요?”
“이거 유산슬이라고, 고급 요리다 아들.”
자세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장소는 두 번째로 이사했던 집이었고, 아버지는 전복을 정말 아낌없이 썰어 넣었다. 송이버섯은 그리 얇지 못해 큼직큼직 담겨있었고, 전체적인 양이 아주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 요리답게 이것저것 때려 박은 거대한 성찬 하나와 그에 비해 별로 신경 쓰지 않은 곁가지 반찬 조금으로 상이 채워졌다. 치킨이 맛있는 나이였던 내게는 ‘특이하지만 탕수육보다 특별한 건 모르겠는 중국 음식‘ 정도가 첫인상이었고, 하여간 밥에 양껏 올려 우걱우걱, 좋다고 먹었을 것이다.
굴소스와 간장, 녹말을 적절히 넣어야 하는 레시피는 과연 그대로 따르셨을까. 대학생이 되어 방학 때 집에 내려와, 밥을 직접 해 먹겠다며 송이버섯볶음을 시도한 적이 있다. 진간장과 양조간장도 잘 구분 못하던 애송이가 초밥용 간장을 부어 졸이는 대실수를 벌여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그때 그 소소한 사건의 일면에는, 기억 한 구석 저편에 버섯과 간장을 넣어 볶아낸 아버지의 유산슬이 있었던 것이다.
감성은 0 두 개를 점으로 치환한 것부터 시작하는지 가격표엔 ‘18000원’ 대신 ‘18.0’으로, 메뉴판은 꼭 한글 한 자 없는 얇은 갈색 종이장에 알파벳 손글씨체로 프린팅 해놓는 한국의 캐주얼 비-스트로. 미소만 친절하고 사용이 불친절한 그런 멋진 가게 대신, 배는 나오고 팔다리는 마른 사장님이 반팔티를 입고 있는 중국집에 갈 때가 있다. 그곳의 메뉴판은 여전히 구시대적으로 두껍게 코팅되어, 요리 이름쯤은 몰라도 주문에는 전혀 문제없게 큼직한 음식 사진들이 대범하게 페이지를 꽉 담고 있다.
사장님이 툭툭거리는 대신 메뉴판이 친절한 그런 곳에서 장을 둔탁하게 넘기다 보면 반드시 유산슬이 있고, 나는 그럴 때마다 이렇게 아빠 생각이 난다. 어릴 적 단 한번 해주셨고 평생에 열 번도 안 먹어봤을 유산슬은, 그러한 향수가 있다.
나는 이번 연휴에는 집에 한번 맞춰 내려오라는 아버지 전화를 받고도 대만 여행 티켓을 발권해 버렸다. 불효자는 예약한 중국 식당의 메뉴를 훑어보다, 다시 또 아버지 생각이 떠올라 이렇게 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