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는 길에 같이 차를 탄 동료와 주말에 뭐했는지 얘기를 나눴다. 설 연휴와 밀린 휴가 붙여 써서 길게 집에 다녀왔다는 그네 가족은 짧게 여행을 다녀온 모양이다. 재밌게 시간 보냈냐는 질문에 그가 이렇게 덧붙였다.
"너 근데 그거 알지,
가족들이랑 오래 있으면 피곤한 거"
- 아, 그거 알죠. 잘 알지.
가족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공동체이며,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사회적 계약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무리나 사회를 짓지 않는 동물들조차도 제 새끼만큼은 극진히 챙긴다. 자기 유전자 번영을 위한 종족 번식 욕구는 '가족을 향한 사랑'의 형태로 아름답게 구현되고 있는 모양새다.
인간 사회에서는 자기 방어가 어려운 유아, 청소년 시기에만 보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의 지원(사업, 교육, 상속 등)을 통해 더욱더 많이 갖춘 상태로 독립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가끔은 그 사랑의 방식이 적법하지 않은 방식으로 흘러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가족의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숭고한 것으로 묘사되며, 흔히들 그런 내리사랑을 '아가페'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평범한 가족의 조건 없어 보이는 평범한 호의들도 분명히 대가를 바란다. 눈에 보이고 계량 가능한 물질 형태의 대가가 아니다. 그 대가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되돌려 받을 또 다른 '조건 없는' 호의이다. 가는 정은 반드시 오는 정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과학의 발달로 직접 만나지 않고도 충분히 공동체의 이점을 누릴 수 있게 되면서 개인주의는 더욱 힘을 얻고 있다. 더 나아가 산술 가능한 이익을 쉽사리 자료로서 보여주지 못하는 공동체의 가치는 개인의 가치에 비해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 오히려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묵인되어 온 많은 전통과 문화의 어두운 면이 부각되며 '공동체주의'라는 단어는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 부정적인 어감에 더 가까워졌다. 그 대척점에 있는 개인주의는 이기보다는 합리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수천 년간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힘을 발하던 공동체주의가 겨우 몇십 년 만에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무너지면서, 공동체의 역할에 대한 각 세대별 생각은 첨예하게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가족조차 그 예외가 될 순 없다.
아직 한국에선 결혼할 때까지 자식을 뒷바라지해주는 일이 적지 않다. 결혼식 비용은 물론이고, 집, 혼수, 예물, 모두 결혼을 개인과 개인의 약속이 아닌 가족(혹은 집안)끼리의 사회적 계약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이러한 호의는 용돈 좀 보내라, 집안일 좀 도와라 등 다양한 형태의 호의(보상)로 돌려받아지다가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명절에 극에 달하게 된다. '내가 왜 남의 집 제사를 모셔야 돼?'는 물음부터 '네가 우리 집 가족이지 뭐냐'는 맞받음.
가족이라는 공동체 구성원끼리의 조건 없는 호의(혹은 암묵적 의무)는 어디까지로 합의가 되어있나? 이는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하나는 확실히 기억해두어야 한다. 각 구성원은 자신의 호의만큼 상대도 베풀기를 내심 바랄 수밖에 없다. 적어도 그와 비슷한 정도의 호의를 원한다. 이는 비단 한국, 동양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이민자의 나라, 개인주의의 끝판왕이라 부르는 미국에서조차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이후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의학과 진료 비율이 급격하게 상승한다.
명절이 아니고서도, 결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각 가족 구성원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바라며 넛지(nudge)하는가? 청소해주길 원하고, 요리해주길 원하고, 용돈을 주길 원하고, 집에 내려왔으면 옆에서 근황 토크해주길 원하고, 상의해주길 원하고,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이런 관계를 지속해주길 원한다. 이런 호의가 생각만큼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않을 때는 또 섭섭함을 토로한다. 사회의 합리적 개인들은 가족 울타리 안에서 자꾸 선을 넘는다.
개인은 각자의 원이 있고, 관계를 맺으면 교집합이 발생한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며 그 교집합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무언가를 공유하기보단 거래하려 하며, 관심은 귀찮고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길에서 마주치는 불특정 다수를 대하듯 사회에서 맺게 되는 많은 관계에도 무관심의 잣대를 적용한다. 그것이 안전하고, 적어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함부로 원에 들어서려다간 상대가 기분 나빠하며 밀어낼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누군가는 연인 사이에서도 더치페이를 한다. 누군가는 차 옆자리에 사람을 태우지 않는다. 남의 집 냉장고 문을 함부로 열어보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술을 먹지 않는 친구에겐 술값을 빼준다.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친구에게 사진을 보여달라 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적절한 교집합과 상대가 생각하는 적절한 범위는 분명 차이가 있으니까.
식당에서 음식을 나누어먹는 것, 남의 집에서 잠을 자는 것, 침대에 허락 없이 올라가는 것,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는 것, 말을 쉽게 놓는 것, 용돈을 기대하는 것, 결혼과 진로에 간섭하는 것, 들어줄 법한 부탁이라 판단하여 편하게 요구하는 것 - 이런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딱 하나, 과거에 머무르는 피가 섞인 가장 가까운 공동체, 가족만 빼고. 그래서 우리는 혼란을 겪는다. 우리는 개인주의에 기반한 기시적인 관계에 익숙해졌고 이를 합리적이라 믿어왔는데, 신경을 알게 모르게 긁으며 교집합 그 이상을 자꾸 넘는 그 사람들이 정말 사랑하는-사랑해야만 하는 가족이기 때문에.
명절 증후군, 고부갈등, 대화 단절. 무너져가는 가족의 정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어쩌면 정을 기대하지 않고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대하지 않을 사랑까지만 베풀 수 있는, 혈연의 의무와 권리를 이야기하지 않고 아끼지 않을 수 있는 정도만 주는 호의. 관계에서 호의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호의를 베풀다 보니 관계가 돈독해지는 것. 가끔은 서로를 멀리서 온 귀중한 손님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말이 어렵다면 단 하나만 기억하자. 당연한 것은, 사회에서 겪어봤 듯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