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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레프 Nov 21. 2022

계란 프라이

22. 외할아버지를 추억하며


    계란 프라이를 먹으려다 사뭇 빈번히 추억하는 기억들 중 하나가 떠오른다. 초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어쩌다 천 원 정도의 거액이라도 쥐어진 날엔 학교 앞 여러 문방구를 기웃거리며 뽑기와 게임으로 얼마를 쓰고 잔돈을 거슬러 받는다. 거스름돈 중 200원은 주머니에 남겨두고 어찌어찌 실컷 놀고 나면 책가방을 매고 버스 정류장을 향한다.


   손을 앞으로 뻗자 서서히 내 앞에 브레이크를 밟는 23번 버스.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아니었지만 함께 타는 승객들과 버스기사 중 아무도 나에게 버스를 제대로 탔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세상이 아직 나에게 어떤 소년으로 자랄 것인지 궁금해하지 않는 만큼 어른들 역시 나의 행동에 대해 별 다른 의문을 갖지 않았다. 단돈 200원의 요금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되는 면죄부를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반 시간 가량 버스 좌석 위에 앉아 있으면 익숙한 건물들이 보인다. 그러면 벨을 누르고 다음 정류장에서 내린다. 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백사 슈퍼와 치킨집이었다. 건물들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면 외할아버지 댁이었다. 달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허름하고 낡은 옛날 기와집으로 한때 나와 가족 역시 이곳에 짧게 살았었다.


    잘하면 넘어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청록색 철문. 툭 튀어나온 사자머리. 그 입에 물린 동그란 문고리를 밀고 들어가면 작은 앞마당에서 삽살개가 짖는다. 온통 털로 덮여있어 삽살개라는 이름과 퍽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외할아버지가 키우시던 개는 내가 대문을 열 때만 몇 차례 짖고는 늘 혀를 내밀고 자신의 우리 앞에 앉아만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외할아버지는 보통 쪽마루에 앉아계시거나 자그마한 안 방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종종 내가 말없이 놀러 오는 날이면 그는 만화를 보라며 리모컨을 넘겨주시고 부엌으로 들어가 외손주에게 먹일만한 것이 없나 확인하곤 하셨다. 따라간 부엌에 펴진 밥상엔 그가 별로 손대지 않은 점심 식사가 천 가리개로 덮어져 있었고 프라이팬엔 미리 들기름으로 구워둔 계란 프라이 서너 개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배가 고프니 복에 겨운 줄도 모르고 그냥 주시는 대로 넙죽 받아먹으며 제집에 있는 것 마냥 해가 저물 때까지 머물렀다.


    몇 편의 만화 시리즈를 보고,

    다시 데운 계란 프라이와 반찬으로 저녁을 먹고,

    외할아버지와 기억나지 않는 대화를 나누고,

  

    충분히 만족했다 싶으면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한다. 그러면 그는 사진관 이름이 적힌 불투명한 봉투를 주섬주섬 꺼낸다. 봉투 안에는 사진이 아닌 돈이 들어있다. 천 원짜리 몇 장이 들어 있을 때도 있고 동전만 있을 때가 있다. 사진사였던 그가 가질 수 있던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의 지갑이었다. 돌아갈 차비를 하라며 얼마 꺼내 주시면 나는 그제야 짖지 않는 개를 뒤로하고 가볍게 대문 밖을 나온다.


    정류장에서 손을 뻗으면 아까와는 다른 버스가 역시나 의문 없이 나를 태우고 제 노선을 따른다. 나는 옷에 밴 들기름 냄새를 킁킁대며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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