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집에 도착한다. 씻고 밥 먹으러 거실로 나온다. 중3 아들도 함께 나온다. 나오라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기다렸다는 듯 스스로 나온다. 서른 살도 넘는 나이차이. 아빠와 대화가 즐거워졌기 때문이다. "어 아들... 이리 와." 아들이 자리에 앉으며 "아빠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 하고 먼저 토픽을 꺼낸다. 영어시간에 있었던 칭찬사건을 이야기한다. 어떤 일로 어떻게 칭찬받았는지. A4용지 증거물까지 대동한다. 듣는 나도 양념을 친다. 아들이 더 맛있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족히 한 시간 넘게. Z세대와 X세대의 도킹이 벌어진다. 합이 맞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둘이 즐겁지 않으면 도킹은 3분도 안돼 해체된다. 우주정거장엔 이미 이야기 은하가 펼쳐진다. 사춘기 아들을 둔 거실 풍경이다. 아내는 설거지를 하며 흐뭇하게 부자를 관전한다. 불가사의한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올초만 해도 엄동설한 고드름처럼 뻣뻣하고 뾰족한 아들이었는데.
중3 시즌, 착했던 아들이 거친 표범으로 변신했다
착해 빠져 순둥이라 생각했던 아들이다. 눈동자를 아래에서 위로 힘주어 올린다. 눈을 치켜뜨더니 내리질 않는다. 기존의 반항과는 달랐다. 자신의 기분을 침범당한 한 마리 거친 표범이었다. 강력한 가시광선을 내 눈에 꽂은 채 자세를 고정한다. 아빠보다 커진 덩치로 밀리지 않는다. 아버지의 산을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아들의 사춘기가 왔다. 그들 용어로 인생 2회 차가 찾아온 것이다. 나름 아들과 통한다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아들은 자신의 마음 문에 빗장을 단단히 걸었다. 작은 훈계도 장작불처럼 타올랐다. 식혀주고 싶었지만 더 타들어 갈 뿐이었다. 심지어 부엌에 있는 도구로 나쁜 생각까지 하기도 했다. 착했던 내 아들이 맞는가 너무 놀랬다. 태연한 척했지만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러다 큰 일 나겠다...
주위의 조언을 듣기 시작했다. 어느 여자 교감선생님의 회고가 맘에 닿았다. 아들의 사춘기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 그냥 놔둘걸 그랬어요" 한다. 일 년 넘게 반항하는 아들과 싸웠단다. 자신의 에너지가 모두 고갈됐다고 한다. 너무 많이 울어 남편이 더 고생했다고 한다. 아들은 아들대로 그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냈단다. 지나고 깨달았단다. 아들입장에서 다 들어줄 걸 후회됐다고. 어차피 오는 사춘기 짧게 끝내주는 게 최선이라고. 많은 조언 중 가장공감됐다.
아들 하고 싶은 대로들어줬다. 학원부터 끊었다. 학교도 가기 싫다는 날엔 보내지 않았다. 굳이 가서 공부가 되겠는가. 대신 코딩은 계속 배우겠다 하여 그러라고 했다. 이렇게 해주니 숨구멍이 조금 틔였는지 아들의 반항심은 점차 사라졌다. 부딪힐 문제가 없으니 반작용도 없어진 거다. 다음이 문제였다. 아직 마음 문을 열지 않은 아들이다.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첫 노크는 무작정 아들 관심사에 똑똑똑
다짜고짜였다. 계획을 짠 것도 아니다. 아들 관심사에 흥미를 가져보기로 했다. 대화를 몇 마디라도 나눠야 진도가 나가지. 아들은 게임프로그래머가 꿈이었다. 초등생 때부터 중3인 지금까지 코딩학원은 거의 빼먹지 않았다. 오타쿠까진 아닌 게임 마니아다. 우리가 아는 리니지나 슈퍼마리오 등등의 흔한 게임이 아니다. 듣도 보도 못한 종류의 게임을 섭렵하고 있었다. 특히 다크나이트한 장르 게임을 좋아했다. 많고 많은 게임 중에 하필 우중층한. 배경부터 어둡고 음침한 지하세계 같다. 비극적인 주인공이 등장하곤 했다. 게임은 내가 영웅이 되어 쏘고 죽이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장면 장면 기분까지 톤다운시키는 게임 세상이 있다니. 아들이 보여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지금은 게임 장르도 많이 밝아졌다. 그래도 관심을 가지기로 했다. 아들과 나 사이에 작은 실이라도 연결하려면.
TV 리모컨을 건넨 건 신의 한 수였다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크게 재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작 했던 게임이 고돌이 게임이나 포커 게임 정도다. 그래도 아들의 관심사에 접근하기로 했으니 실천하는 수밖에. 아들의 관심사를 알기 위해 아들에게 TV리모컨을 건넨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건 신의 한 수였다. 리모컨을 건네며 "요즘 무슨 게임 좋아해? 무슨 게임 봐?" 물었다. 그 질문이 핵심포인트였다. 밑줄 쫙~ 아들은 아빠 앞에 무장해제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이야기에 반색한다. 느려터진 아빠보다2배속으로 유튜브를 연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 속으로 초대한다. 게임을 모르는 나는 아들에게 묻는다. "이 게임이 뭐야? 이 게임이 왜 좋아?" 아들과 대화법은 전문성이 없어도 된다. 하면서 느낀 건데 묻기만 지속해도 대화가 된다. "그래서?" "그런 후엔?" "결국 어떻게 돼?" 그렇게 반복해 아들의 관심사에 말 걸기를 했다. 아들의 대답이 돌아왔다. 1단계는 성공이었다.
아빠 취향 따위는 개나 줘 버려
사춘기 아들에겐신뢰가 포인트다. 한 번의 좋은 기억은 추억일 뿐이다. 적어도 이 과정이 꽤 지속되어야 한다. 나는 아들과 함께 있는 자리가 생기면 리모컨을 건넨다. 보고 싶은 넷플릭스 드라마나 스포츠 중계가 있더라도 양보한다. "아들 요즘은 무슨 게임해?" 게임에 흥미가 없어도 물어야 한다. 자신의 관심사에 진짜 관심이 있다는 모양새를 취해야 한다. 신뢰가 생기면 자신의 또 다른 세계관을열어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유튜브 콘텐츠를 보여준다. 이때 정말 중요하다. 가부장적인 유혹에 빠져 비평하는 순간 관계는 도루묵이 된다. 아빠도 꼰대라는 이유다. 리모컨을 끄고 자신의 방으로들어간다. 절대 나쁜 평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은 관계가 형성되고 해도 좋다. 지금의 우리처럼. 무조건좋은 점을 발견하여 칭찬해야 한다. 유치해도 재밌어해야 한다. 아빠의 취향 같은 건 개나 줘 버려야 한다. 재미없다 치더라도 한 마디 더한다. "아들 다음 편은 뭐야? 하나 더 볼까?" 이중인격은 이럴 때 쓰는 거다. 게임으로 쌓은 유대감을 동질감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그때 아들이 두 번째 마음 문을 연다.
유튜브는 아들의 사춘기 학교
아이와 친밀감이 생기면 알게 된다. 그들만이 소통하는 유튜브 콘텐츠들이 하늘에 별만큼 많다는 걸. 아이들은 유튜브로 세상을 배우고 공부하고 있다는 걸. 당연 학교 공부보다 유튜브에서 배우고 학습하는 걸 더 재밌어한다는 걸. 우리 부모들만 모를 뿐이다. 내가 무슨 얘기를 꺼내면 아들은 유튜브로 대답하곤 했다. 2차 세계대전을 이야기하면 어느새 역사 유튜브 콘텐츠로 화답한다. 요즘 뇌과학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뇌는 계속 성장한다는 '뇌가소성'에 대해 아들에게 말하는데 벌써 그 개념을 알고 있었다. 이런 개념까지... 사실 놀랬다. 유튜브를 통해 먼저 접한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것들을 단편적으로 학습하고 있었다. 학교 공부 뒤처지는 것 아냐. 당연 고민도 되겠지만 경험해서 알지 않은가. 중고등학교 공부 잘했다고 인생 성공하는 것 아니란 걸. 그저 아들 세상을 지지해 주기로 했다.
아들은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이 학습자료로 유튜브를 이용한다고 한다.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단다. 어느 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유튜브를 틀어줬단다. 썸네일은 EBS의 지식채널이고 속내용은 선생님 생각과 달랐던 것이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콘텐츠에선 아이들이 듣지 말아야 할 비속어들이 섞여 나왔다. 거기에 달린 댓글들을 보여주며 아들은 배꼽 잡고 웃는다. 나도 맞장구쳐 준다. 한 편의 코미디였다. 세태가 압축된 듯했다.
아내를 옆에 두고 아들과 바람을 피자
연애도 아들관계도 그렇다. 처음 남자가 좋아했다고 그 관계가 지속되지 않는다. 여자도 어느 순간 남자를 좋아해 줘야 관계가 지속된다. 아들이 두 번째 마음 문을 열면 할 일이 있다. 아들을 나의 세계로 초대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나는 브런치가 큰 도움이 되었다. 캠핑의 불멍도 좋고, 아빠와 스포츠 관람도 좋을 것이다. 브런치에 올리는 짤막한 글들을 스리슬쩍 아들에게 보여줬다.아들과 게임 유튜브를 보고 난 후였다. 스마트폰을 열어 브런치에 올린 내 글이 어떤지 물었다. 아들이무관심하거나 짜증내면 어쩌나 내심 불안했는데. 웬걸 아빠의 세계에 관심을 표하는 것 아닌가. 아들의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면 아들도 아빠의 세계에 귀 기울인다. 마냥 받기만 하는 사춘기가 아니다. 아들은 괜찮다고 여겼을 땐 "음, 흥미롭네요"라며 한 줄 평을 하곤 했다. 아쉽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감지덕지다.
이런 경우가 있었다. 어느 날 브런치의 [작가의 서랍]에 보관해 둔 어떤 글을 보여줬다. 그랬더니 다음 날 아들이 내 책상 위에 시집 한 권을 갖다 놓았다. 대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그리고 중학생 심지어 요즘은 초등학생까지 사서 본다는 '눈사람 자살사건'이란 우화시집이었다. 아들 덕분에 알게 된 작가의 유튜브 강연까지 듣게 됐다. 작가는 이 시집이 최근 '어린 왕자'보다 많이 팔린 시집이란다. 자살하려던 이들이 이 시집을 보고 자살할 맘을 접었다고 출판사에 전화했다 한다. 절판되었던 시집이 청소년들에 의해 역주행한 케이스였다. 아들도 이 시집을 갖고 있는 걸 봤을 때 올해 질풍노도의 시기가 어떠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시의 전문은 이렇다.
눈사람 자살사건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듯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사춘기와 초급대화에서 중급대화로 높이기
본론으로 돌아오면 이 시집에 '사람을 끌고 가는 물고기'라는 시가 담겨 있었다. 내가 쓴 시와 느낌적으로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한 번 보라고 툭 놓고 간 것이다. 아들과 대화는 생각지 못한 소득을 주었다. 글로도 소통하게 된 것이다. 글로도되니 아들과 대화는 좀 더고급스러워졌다.
나는 좀 더 새로운 대화를 해보기로 했다. 난이도가 있긴 했지만. 안 해보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아들이 새로운 게임을 소개할 때였다. 게임을 요약해 두세 줄로 이야기해 달라고 주문했다. 부담을 주면 안 된다. 아들이 자연스럽게 대화의 한 장면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아들이 유튜브 화면을 보고 그림과 곁들여 설명한다. 추상적인 말들이 섞여든다. 나는 아들에게 이 게임개발자라면 어떻게 설명할 것 같냐고 물었다. 이 게임을 누군가에게 판다면 어떤 포인트를 강조할 것 같냐고. 어떤 것에 끌려 이 게임을 좋아하게 됐냐고. 묻는 의도에 따라 대답이 달라진다. 좀 더 구체화된다. 여기에 회사 신입들에게 가끔 이야기하는 프레젠테이션 스킬을 더한다. 아바타를 만들기 전 카메론 감독의 엘리베이터 스피치 이야기다. 아바타를 제작하고 싶은 감독은 영화제작자에게 설명해야 했다. 엘리베이터 안이었고 목적층에 도달하기 전까지 짧게 설명해야 했다. 카메론 감독은 아바타스토리를 이렇게 한 줄로 요약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주에서 벌어지는 쥐라기공원이죠"
설레지 않은가. 단 몇 마디에 진액만 뽑아 영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스피치. 아들은 이내 아빠의 의도를 안다. 한 줄로 요약하려는데 추상적 언어를 버리지 못한다. 나는 오 분 동안 다시 한번 생각하고 말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덧붙여 언어라는 붓을 사용해 추상화로 그리지 말고 단 한 장면을 그리는 풍경화처럼 그려보라고 조언한다. 그래야 듣는 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고. 오 분 후 상당히 구체적으로 답한 아들을 적극 칭찬했다. 우리의 대화에는 아들의 언어능력 발달까지 끼어들고 있었다.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내일까지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다시 만나자고 했다. 다음날 아들은 준비되었다며 말한다. 좀 더 멋진 한 문장으로 게임을 설명했다.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는 갈수록 심도를 더해 갔다. 한 시간 넘는 시간이 의미를 채우며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