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학 9장. 감정도 심폐소생술 할 수 있을까?
사랑이 지나가면
어느 날 감정의 심장이 멈춘다.
그 심장을 살릴 수 있는 건
강렬한 충격.
지금껏 경험치 못한
뼈가 으스러지는 사랑.
그러나 장담할 수 없다.
멈춰진 심장이 다시 뛸지는.
THE LOVE PLANET 사랑학 9장 _ 감정도 심폐소생술 할 수 있을까?
♥♥♥
긴급 명령을 받은 유진의 수사 2팀은 좌표가 찍힌 행성 뉴하이웨이로 출동했다.
그곳엔 한 대의 자이로 드론카가 새로 지은 하이웨이 방벽에 부딪혀 심하게 박살 나 있었다. 차 안에서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피투성이 남자가 즉사했다. 시신이 아직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 감식반 조사가 끝나면 이동형 냉동시체보관함에 옮겨질 것이었다. 뉴하이웨이에서는 일 년에 한 차례 사고가 날까 말까였다. 자율항법으로 하이웨이 통로를 순간이동하기에 시스템 이상이 아닌 이상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과학과 기술의 혁신을 거듭한 하이웨이 시스템에서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은 거의 보고된 전례가 없었다.
그때, 첫 현장에 투입된 신입 제니가 심하게 박살 난 차 안에서 나오며 말했다.
“이거 자율운행이 아니었는데요.”
“아니, 팀장이 자리 지키고 있으란 말도 어기고 신입이?"
죠가 재밌다는 반응을 보였다. 팀장 유진은 새로 들어온 신입 형사 제니에게 혹시 모를 사건 접수나 민원을 위해 강력반을 지키고 있을라고 명했다. 하지만 듣지 않고 꾸역꾸역 따라 나왔다. 그것도 모자라 선배들이 사건 현장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제니는 직접 조사하고 있었다.
"뭐? 분명 차량 기록엔 자율운행인데? 뭘 안다고?”
선배 형사 죠가 반문했다.
“아니에요. 선배. 이 차는 자율인 것처럼 프로그래밍해 놓고 운행은 운전자가 했어요. 차량에 남겨서는 안 되는, 비밀리에 갈 곳이 있었던 거죠.”
신입의 추리에 놀란 스티브가 물었다.
“차량 운행 프로그램을 바꿀 수 있다고?”
“선수들은 그 정도는 껌이죠. 아, 식은 죽 먹기죠.”
지구별 아가씨가 아주 오래된 지구 비유어를 사용했다.
“문제는 이 행성에 그럴 정도의 능력자가 있냐는 거지?”
팀장 유진도 처음부터 수상한 낌새를 느꼈다. 당돌한 신입의 추리가 논리적이라 생각했다. 그는 팀원들에게 지시를 하달했다.
“스티브와 죠는 이 남자의 직장과 행성 프로그래머들을 조사해 보고 연관성이 있는지 보고해 줘. 난, 남자의 집과 주변을 탐문하지.”
“저는 요?”
임무에서 홀로 빠진 신입이 팀장에게 물었다.
“자넨, 이 별에서 사랑 먼저 찾고 난 그다음에...”
유진이 말했다.
“싫습니다. 저도 함께 탐문하겠습니다.”
당찬 제니였다.
“와, 센데! 첫 사건부터 명을 거부한다?”
죠가 말했다.
“그건 명이 아니죠? 사람이 죽었는데 사랑이라니요? 전, 이 별에 사랑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럼, 뭐 하러 왔지? 지구별 아가씨?"
제니의 말에 팀장 유진이 물었다.
"일하러 왔습니다. 일."
"여기선 사랑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걸 모르나? 사랑을 못하면 일이고 뭐고 퇴출될 수도 있는데?"
팀장 유진이 조언했다.
"그게 걱정이시라면!"
제니가 작심한 듯 말했다.
"팀장님부터 걱정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일중독자인 것 같은데."
"오! 보는 눈이 놀라워 후배. 어떻게 알았어?"
죠가 신기한 듯 물었다.
"그리고 사람만 사랑하란 법, 없지 않습니까? 팀장님처럼 일을 사랑하면 안 되는 겁니까?"
"헐!"
제니의 막힘없는 말에 선배 죠가 놀라 탄성을 질렀다.
"신입이 요즘 세대답지 않게 은근히 보수적인 데가 있네?"
선임 형사 스티브의 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시는 선배들이 더 보수적인 것 아닙니까? 저는 진보도 보수도 중간도 아닌, 그저 저 다운 겁니다."
제니는 더 당차게 나갔다.
“와, 지구라면 이런 배려도 없을 텐데? 끝까지 버티네.”
“배려가 아니라 차별입니다. 텃새일 수도 있고, 안 그렇습니까? 죠선배!”
여전히 신입이 단호하게 팀장의 명령을 거부할 때, 현장에 급파된 첨단과학수사대 요원이 긴급 보고를 했다.
“사망자의 혈류에서 이상한 게 발견되었습니다. EndorX520이."
"엔돌엑스520?"
죠가 뭐지 하는 반응에 제니가 나섰다.
"모르핀의 200배가 넘는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엔도르핀과 유사한 성분으로... 첫 발견 지는 LA 차이나타운. 520은 차이나 발음으로 우아미로 발음되어 사랑해를 뜻하죠. 사랑에 불만족인 이들이 사랑할 때 분비되는 엔도르핀 효과를 맛보기 위해 유사 사랑호르몬제인 엔돌핀X를 통해 환각 사랑을 하는 약물로 쓰이죠.”
"맞습니다."
제니의 말에 과학수사대 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일에는 AI네!"
제니의 똑 부러진 해설에 '저 놈 물건일세'라는 반응을 하며 선배 형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생행성에서 마약유통이라? 그것도 사랑행성에서?"
유진은 뒤에 보이지 않는 음모가 있음을 직감했다. 무언가 깨림찍했다.
"이상하긴 하네요. 인구 삼십만 밖에 안 되는 시장 규모도 작은 이곳에서 무슨 벌이가 된다고 마약유통을?"
선임 형사 스티브가 대꾸했다.
"그러게요, 은하의 가장 작은 단위인 왜소 은하를 건너 이곳까지 온다 해도 유지비가 더 나오겠네요? 수 천 개의 은하를 건너 여기까지 와야 하는데... 어떤 놈들이지?"
선배 형사 죠의 분석이었다.
하늘이 어슴푸레해 어둑어둑 해지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려나 봅니다."
스티브의 말에 유진이 명령을 내렸다.
"오늘은 늦었으니 철수들 하지."
♥
'며칠만이지?'
추적추적 비가 쏟아지는 주택 입구로 형사 팀장 유진이 들어서며 생각했다. 그의 숙소는 러브시티 중심가가 아닌 외곽에 있었다. 행성규칙 상 그럴 이유가 있었다. 그건 추후 설명하기로 하고. 유진은 이혼 후 줄곧 행성 폴리스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오래간만에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섰다. 전처 글로리아가 거실 탁자에 앉아 있었다. 러브플래닛에선 매칭의 해가 되면 이혼하지만, 커플 매칭이 되기 전까진 같은 집에서 산다. 하지만 방은 각방을 쓴다. 처음 이 행성의 주택을 설계할 때부터 에리히 박사는 집 구조까지 이를 염두에 두고 지었다. 남녀 방은 크기가 같으며 서로 마주 보는 구조였다. 남녀 방 사이 거실 소파와 식탁이 있었다. 유진의 전처는 지구에서 방영 중인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유진의 인기척에도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 손에 낀 링이 눈에 들어왔다. 왜, 다른 것보다 그 링이 자신의 눈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저 링에 새겨질 이름은 이제 그가 아니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 행성에 사는 모든 이의 손가락에 끼워진 링은 한 번 인연을 두 번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별이 아름다워야 했다. 하지만, 그와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유진은 말없이 식탁 위에 립스틱을 내려놓았다.
“웬, 립스틱? 멋없게 포장이라도 해서 주지. 이혼 선물인가? 흥 이혼하니까 7년 만에 처음 선물을 받아 보네.”
유진은 글로리아와 결혼해서 단 한 번도 선물한 적이 없었다.
"허, 이거 너무 감동해서 눈물이 나려 하네."
글로리아가 빈정댔다.
"왜 지금에서야 주는데?"
식탁에 앉은 채로 글로리아가 유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유진은 예뻐야 사랑받지요.’라고 하려던 말을 주워 담고.
“그냥요.”라고 말했다.
"그냥? 그냥? 그렇지 그냥이지. 뭔 감정이 있겠어?"
그리고 유진에게 물었다.
“저녁은 드셨어요?”
그녀의 말이 다시 다소곳해졌다.
“생각 없어요.” 유진이 짧게 답했다.
“정말 밥맛 없어. 저 가식적인 존대하는 듯한 말. 하나도 날 존중하지 않으면서.”
유진의 말에 감정의 기복이 생겼는지 글로리아의 말투가 다시 싸늘했다.
“그래도 한술 뜨고 들어가요.”
방에 들어가려는 유진을 다시 한번 잡았다.
“제가 매일매일 차려놨다고요.”
마음속 화와 약간의 눈물이 함께 맺힌 말이었다.
“이제, 그만 차려요. 남남인데.”
유진은 마음이 아팠지만 진심이었다.
“매정한 사람, 끝까지 매정하게.”
그 말에 유진이 대꾸할 수 없었다. 그녀 말대로 그는 결혼 내내 그런 인간이었다.
그녀가 다시 말을 꺼냈다.
“밥 한번 먹고 가라는데 제 가치가 그보다 못해요?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요?”
“당신 잘못 없어요”
유진이 그녀에게 답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그녀가 물었다.
“다 내 잘못이에요.”
유진은 같은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당신 살린 거?”
그 말에 유진이 답하지 못했다.
“그럼, 그냥 죽게 놔둬요?”
그녀가 눈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그때 죽게 놔둘 걸 그랬어요. 이 행성에서 사라져 버리게.”
그녀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이제 헤어지니 그렇게 좋아요? 딴 여자 만날 생각 하니까 가슴 설레고 죽겠죠?”
유진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아메바 짚신벌레 유글레나! 이런 미련 단세포 동물! 당신은 정말 단세포처럼 미련한 살인자예요. 두 여자를 죽인 살인자."
하나 밖에 모르는 단세포 동물. 유진은 수 천 번 들은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영원한 살인자예요. 그에 대한 천벌을 분명히 받을 거예요. 안 그러면 내가 당신 총 맞아 죽으라고 매일매일 빌 거예요. 거짓말 아니에요. 정말로.”
혼자서 주저리주저리 말하던 그녀가 탁자에 고개를 파묻고 잠이 들었다. 그녀 옆과 식탁 아래 어질러진 빈 술병들이 보였다. 잠결에 그녀가 잠꼬대를 했다. 그 소리까지 유진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여기가 러브플래닛 맞나요? 정말 사랑행성 맞냐고요? 사랑행성이 뭐 이래? 박사, 당신은 틀렸어. 혼자 잘난 척 하지만 아니라고 꽝이라고... 꽝.”
그녀의 외로워 보이는 어깨에 유진은 가벼운 담요를 덮어주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다 옷가지 몇 개를 가방에 챙겨 다시 출근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빗방울이 더 굵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