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학 8장. 인간이 배워야 할 첫 번째 학문
학교에서 배운
문학을 평생 써먹는가?
수학을 평생 써먹는가?
과학을 평생 써먹는가?
그저 때때로 쓸 뿐.
그러나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사랑은 평생 써먹어야 한다.
사람과 우주와 관계하는 모든 순간에.
인간이 배워야 할 첫 번째 학문,
그것은 사랑학이다.
THE LOVE PLANET 사랑학 8장 _ 인간이 배워야 할 첫 번째 학문
♥♥♥
러브플래닛에는 그 어떤 행성에도 없는 학문이 있었다.
[러브플래닛 사랑학]
행성인이라면, 99장의 사랑학을 모두 이수해야 한다. 신입 입주민은 행성에 오기 전 이수하고, 행성인들은 매칭의 해 다시 이수한다. 직장 내 성폭력 예방교육이나 안전교육처럼 사랑학 99장 이수는 필수의무 사항이었다. 러브플래닛 사랑학이 99장으로 끝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 100장은 결혼하기 직전, 프러포즈할 때 당사자가 직접 손글씨로 작성한다. 사랑은 타인의 의지에서가 아닌, 본인이 주인이 되어 완결해야 하기에 그러했다. 그렇게 사랑학 100장이 통과되었을 때, 정식으로 부부로 행성시스템에 등록되었다. 사랑학 100장은 어떤 의미에서 사랑의 결혼 서약과 같았다.
제니와 루비가 러브플래닛에 오기 전, 지구에서의 사랑학 시간이었다.
"굳이 사랑학을 배울 필요가 있을까? 애들 소꿉장난처럼."
제니가 루비에게 말했다. 강의에 임하는 모든 이는 엄숙했지만 제니만은 달랐다.
"직접 체험하면 되지. 번거롭게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나이 먹고 또 공부해야 하냐? 차라리 먹고사는 직업교육이라면 열심히라도 하겠다."
제니의 말을 듣다 못한 루비가 말했다.
"국어는 할 줄 몰라서 배울까? 더 잘 쓰기 위해서 배우지! 사랑은 할 줄 몰라서 배워야 할까?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언어는 국어로, 인간의 역사는 국사와 세계사로, 인간의 세상은 도덕과 사회, 문화, 지리 등등으로 필수 과목이 되었듯... 인간 삶에 빠질 수 없는 사랑도 학문으로 배워두면 인생에 유용하지 않을까?"
"루비 넌! 사랑의 수재니까 사랑학이 쏙쏙 들어오고 재밌겠지?"
"제니 넌! 수사하고, 총 쏘고, 범인 잡고... 다른 건 일도 관심 없지?"
"난, 세상에서 나쁜 인간들 잡는 걸 그 누구보다 사랑해. 이것도 사랑학 아닐까? 직업 사랑학?"
"직업사랑학? 워커홀릭이지! 평생 일하고만 사랑하고 살아라!"
"그래, 고마워."
"근데, 진짜 지구에선 사랑학이 초등이든 중등이든 고등교육에 없는 걸까? 기초 학문 배우듯, 어릴 적부터 사랑학을 배우면, 사랑으로 더 행복해지는 법을 좀 더 빨리 익히지 않을까? 사랑을 올바로 배우면... 상대에 대한 시기, 질투, 모함, 비방, 투기, 탐욕, 살인, 전쟁 등...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안 좋은 일들이 줄어들거나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
루비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혹시 모르지. 사람들이 사랑으로 행복해지면 손해 보는 세력이 있을지도. 자기 사업이 성장하지 못한다던지. 나만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데 모두 함께 어울려 잘 먹고 잘 사는 게 싫을지도. 예수라는 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도 결국 그가 사랑을 전파하려다 일어난 사건, 이잖아?"
제니가 루비 의견에 사랑 음모론을 꺼냈다.
"일류 역사상 가장 발전한 현재의 문명사회에서 아직도 인간은 스스로 사랑을 체득하며 살아야 한다니? 동물과 다른 영혼을 가진 고등 생명체의 삶으로 보면, 사랑학은 배워둘 만한 것 같기도 해. 제니 네 생각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래도 러브플래닛에는 가야 하니까, 이수는 해야지!"
그리고 얼마 후, 사랑학 학점이 나왔다. 신입생 10만 명의 점수가. 루비는 자신의 학점을 보며 흡족해했다. 상위 5%인 A학점이었다.
"역시, 루비답다. 축하해."
제니가 루비를 칭찬했다. 루비도 제니의 학점을 물었다.
"아야, 묻지 마!"
"너 혹시, F? 재시험?"
제니는 답하지 않았다.
"너 맞구나. 제니, 속상하겠다. 그래도 괜찮아. 두 번까지는 탈락이 아니잖아.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고마워. 루비. 그래도 탈락은 아니야."
"정말? 아휴, 잘 됐다. 진짜 다행이다. 그래서 뭔데?"
"몰라, 신경 꺼."
"그니까 더 궁금해지잖아."
"그렇게 남의 점수가 궁금해."
"야, 어떻게 너와 내가 남이냐? 앞으로 러브플래닛에선 너와 나는 가족보다 더한 관계일 텐데."
"알았어. 보고 입 닫기야? 창피하니까."
"으응!"
루비가 큰 눈망울에 애교를 가득 실어 요구했다.
"알았어. 정말 보고 말하기 없기. 약속?"
"어!"
제니가 루비에게 자신의 학점을 보여주었다.
"야, 제니니니니....?"
루비가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이 요망한 것! 상위 1%인 A+이잖아? 와 놀랍다. 사랑에 일도 관심 없는 네가?"
"야,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너무 놀라서 그렇지. 네가 탈락할 것처럼 분위기를 연출했잖아?"
"내가 언제?"
"와아... 제니 어떻게 이런 반전이?"
"루비? 난 머리로 사랑학을 하잖아. 넌 가슴으로 하고."
"제니, 못 말리겠다. 머리 하나는 끝내주게 좋아가지고."
그때 루비는 제니가 머리가 좋아서만 A+을 맞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돌 같이 차가운 사람 안에 남다른 사랑이 있는 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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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인들이 모두 사랑학 99장을 이수하자, 각자의 러브워치에 알림이 떴다.
[띵동! 러브플래닛 행성인들에게 피플북이 발송되었습니다.]
피플북은 1기 10만, 2기 10만, 이번에 도착한 3기 10만. 도합 30만 명으로 남녀 각각 15만 명의 방대한 자료가 수록된 인물도감이었다. 피플북을 전송받는 것만으로도 행성인들의 러브워치에 찍힌 감정맥박수가 평소보다 5-7 높게 치솟았다.
"감정의 맥박수 124-126".
순간 최고치는 11.3이나 뛰었다. 만약, 이번 신입 입주민이 3기가 같은 기수와도 결혼을 할 수 있다면 더 나은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불이익을 감수하는 3기에서도 감정맥박수는 평소보다 높았다. 그들 또한 기대감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들은 선발 테스트에서 이미 나이차에 대한 거부감이 없음을 스스로 밝혔다. 결과에서 보듯 인간이란 존재는 설렘만으로도 잠들었던 연애세포가 살아난다. 은하계에 이런 신비한 생명체가 또 있겠는가?
에리히 박사는 러브플래닛 인간행복위원회 시큐리티 센터에서 이 모두를 파악하고 있었다. 행성인의 정보를 내주고 행성인의 감정변화를 받은 것이다. 이런 감정맥박수의 변화는 양자슈퍼컴인 '이별과 사랑'이 각각의 러브워치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보고했기 때문에 바로바로 알 수 있었다.
1차 피플북에는 30만 명에 대한 단순한 스타일 정보만 공개 전송되었다. 이렇게 보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첫눈에 자신이 매력에 빠지는 이상형의 유형을 알고, 첫인상 선택에 도움을 주고자 함이었다. 만약 세세한 자료를 토스하면 첫인상은 그 정보로 인해 오염될 수 있었다. 되도록이면 백지상태에서 첫인상을 선택해 데이터베이스화하기 위해서다. 1 기수부터 3 기수까지 지속적으로 자료를 구축해 좀 더 행복한 인간들의 행성건설에 적용하고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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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 행성인의 피풀북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첫인상 선택 때문이었다.
첫인상을 선택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쓰였다.
[직접방식과 간접 방식.]
직접 방식은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본 인물이 자신의 러브워치 피플북에 기록된다.
가령, 남자 A가 백화점 쇼핑 중이라고 치자.
에스컬레이터에 맘에 드는 이상형 여성 B가 출현했다.
그러면 러브워치의 '감정의 맥박수'가 급속도로 뛰게 된다.
러브워치에 공간 카메라가 작동해
자신의 피플북에 있는 인물과 대조하게 되고,
그 인물, 여성 B를 첫인상 섹션으로 옮겨 저장한다.
이때, 조건은 남자 A의 '감정의 맥박수'가 150을 넘어야 한다.
첫인상 선택이 있는 날까진 ‘감정의 맥박수’가
150을 넘는 인물은 지속적으로 자동수집된다.
두 번째 방식은 러브워치에 자신의 이상형을 추천받는 방식이다.
여자 A가 원하는 이상형을 러브워치에 말한다.
그러면 러브워치의 AI 알고리즘이 이상형 검색을 통해
피플북에서 이상형을 찾아준다.
이때, 이상형 숫자를 세팅하면
그 숫자에 맞춰 이상형을 서치 해 준다.
찾아진 이상형은 러브워치 홀로그램을 통해
현실에 투영되어 실제 인물처럼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이때도 러브워치의 '감정의 맥박수'를 활용하긴 하는데
실제로 봤을 때 보다 보통 감정 맥박수가 10 정도 낮은
140 정도이면 첫인상 섹션으로 옮겨진다.
첫인상 섹션에 수집된 인물카드에는 인물마다
최고 감정맥박수와 최저 감정맥박수가 함께 기록되어
참고자료로 쓰일 수 있게 했다.
행성에서는 두 번째 방식보다는 첫 번째 직접 방식을 추천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기도 하지만 매칭의 해는 노동시간이 변경되기 때문이다. 행성인들의 좀 더 완벽하고 행복한 매칭을 위해 주 4일제에서 주 2일제로 대폭 노동시간을 줄였다. 줄어든 노동일 수만큼 사랑의 현장으로 적극 나서길 권장했다. 그리고 첫인상 선택일이 되어 마음에 드는 한 사람을 선택하면 그때 선택된 상대의 좀 더 세세한 정보가 공개된다.
[띵동! 지금부터 러브플래닛에서 당신의 첫인상을 선택하세요.]
이제, 본격적인 매칭이 시작되었다. 첫인상 선택부터.
에리히 박사는 '이별과 사랑'이 분석한 결과에 크게 만족하진 않았지만 나름 흡족했다. 이전의 인간의 결혼이란 한 번의 설렘으로 끝났다. 한 번 더 그 설렘을 가지려면 책임과 고통이 따랐다. 불륜 또는 이혼이라는 이름으로. 그 결과는 배우자를 속이거나 배우자와 전쟁 같은 이별을 하거나. 하지만 자신이 창조한 시스템에서 인간은 여러 번의 설렘을 가져도 합법적이었다. 공동체가 약속한 시간이 되면 다시 누구나 설렐 수 있었다.
한 번의 설렘과 주기적인 설렘.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박사는 한발 더 나아가 생각했다. 고대 인간들이 만들고 중세를 통해 고착화된 제도를 계속 고수하는 게 진정 행복이란 말인가? 그 당시는 그 당시 상황이 있었다. 당시 족장 또는 왕 같이 권력과 무력을 가진 이들이 다수의 여성을 차지했다. 결혼할 여성 수가 부족한 남성 입장에서도, 힘 있는 자의 전리품으로 취급받는 여성 입장에서도 불합리했다.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일부일처제는 누군가가 인간이란 재화를 독차지 못하도록 만드는 과정에서 생겨난 제도이다. 일부일처제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박사는 현재 상황을 고려해, 더 미래적으로 고쳐쓰자는 것이었다. 박사는 지금 이를 실험하고 실행하는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이전보다 나은 인간행복을 찾아 창조의 날개를 펼치는 박사의 귀로 전자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 케이스 발견.”
'이별과 사랑'이 데이터 분석 후 박사에게 특이한 상황을 보고했다.
“피플북 발송 후, 감정맥박수의 변화가 전혀 없었습니다. 행성의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데이터를 보기 위해 눈동자를 모으느라 박사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는 이미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입니다. 이번에 등급을 올리지 않으면 자연 퇴출입니다. 누군지 아시죠?”
그는 지속해서 주의 관찰하는 대상이었다. 이번 7년의 등급평가에서 부적격 등급까지 떨어져 있었다.
이번 매치의 해까지 더 이상 변화가 없다면, 이 행성에서 자격상실 되어 영구제명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