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학 6장. 결혼의 유통기한
결혼도 부패한다.
사랑이 다하면.
사랑이 소멸되기 직전,
그때가 결혼의 마지막 유통기한이다.
그 시기를 넘기면,
인간의 결혼은
남남보다 못한 관계로 변질될 수 있다.
그때를 넘기지 마라.
지울 수 없는
깊은 상흔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THE LOVE PLANET 사랑학 6장 _ 결혼의 유통기한
♥♥♥
러브플래닛력 17년 1월 8일.
루비와 제니는 러브플래닛에 도착하고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일주일 간 신입 행성 입주민 설명회에 이곳저곳 참석해야 했다. 10만 명의 신입들은 100명씩 조를 이뤄 다녔기에 루비와 제니는 다른 조로 행성 여행을 마쳤다. 러브플래닛에 도착해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빠듯한 여정을 소화하느라 신입들은 피곤이 누적되었다. 다행히 주말은 자유시간으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루비는 첫 출근 날 늦잠을 잤다. 낯선 행성의 첫날이라 잠이 오지 않아 새벽까지 뜬 눈으로 보내다 깜빡 잠이 든 것이다. 부랴부랴 챙겨 입고 허겁지겁 뛰어 통근 드론 버스를 탔다. 전날 미리 체크해 둔 광물탐사본부로 향하는 통근 버스였다. 정신없이 자리에 앉아 지급받은 러브워치를 손목에 찼다.
Love On.
전원이 들어오고 두 개의 심장 아이콘이 나타났다. 붉은색 심장 모양과 푸른색 심장 모양. 붉은색은 육체의 심장을 상징하고, 푸른색은 감정의 심장을 상징한다는 것을 지구에서 배워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맥박수가 숫자로 표시되었다.
'109'와 '75'.
숫자를 보니 신기했다.
'헐레벌떡 뛰어서 그런가. 육체의 심장은 수치가 높고, 감정의 심장은 차분하네. 네가 내 마음까지 읽는다는 거지? 요놈 참 이상한 놈일세'.
루비는 처음 러브워치를 켰을 때 떴던 Love On이라는 글씨가 떠올렸다.
'사랑을 켠다.' 과연, 이 행성에서 원하는 사랑을 켤 수 있을까? 호기롭게 러브플래닛에서 가슴 떨리는 신비한 우주 광물을 캐고 싶다고 했지만, 낯선 행성이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휴 늦지는 않았네.'
어느덧 버스는 광물탐사본부 앞에 정차했다. 행성인들이 분주하게 출근을 서두르고 있었다. 루비는 내려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본부는 다이아몬드 원석 위에 잘 커팅된 다이아몬드가 올라간 형태였다.
아, 이곳이 혹시 숨겨져 있을지 모를 이 행성의 괴물 같은 신비한 우주 광물을 캐는 바로 그곳? 디자인이 나쁘지 않네,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다가 한 키 큰 사내와 부딪혔다.
"아!" 루비가 신음소리를 냈다.
중절모를 쓴 사내는 모자를 누르며 목례를 했다.
"... 죄송합니다. 제가 잘 봤어야 하는데."
모자로 얼굴을 가려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뭐야, 코빼기라도 보이며 죄송하다고 해야 할 것 아냐?'
루비는 인사치레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려던 찰나 키 큰 사내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참, 바쁘기도 한가 보네.' 하며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지 이 이상한 느낌은?' 다시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는 본부 안으로 들어갔다.
♡♡♡
러브플래닛 행성폴리스.
건물 안은 화이트 배경에 반듯하게 각이 잡힌 구조가 꼭 정자세로 걸어야 할 것 같았다.
좌측으로는 정육면체의 AI로봇들이 교차로를 지나듯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 여자가 현관에 들어섰을 때 로봇 하나가 그녀를 마중 나와 있었다. 로봇의 키는 어림잡아 190cm 정도였다. 지구에서의 로봇은 완전한 인간체형이었지만 이곳에서의 로봇은 완벽한 인간체형이 아니었다. 얼굴 또한 또렷한 눈코입을 주지 않고 둥근 계란형일 뿐이었다. 이는 로봇을 인간처럼 제조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정서적 교감을 넘어선 그 이상의 감정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더불어 행성 행복규칙을 통해 이 행성에서 AI 섹스돌은 수입 금지품목이었다. 온전한 사랑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제니 셜리? 미국 뉴저지 출신, 지구연합 경찰대 차석 졸업, 러브플래닛 행성수사과에 배정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수사 2팀 보조형사 로봇, 톰이라고 합니다.”
제니는 경찰대 차석이라는 말이 퍼지는 것이 멋쩍어 제동을 걸고 싶었으나 때를 놓쳤다.
“톰?” 제니가 불렀다.
“네, 제니.” 톰이 대답했다.
“톰? 아니, 톰소여? 톰소여가 좋겠다.” 제니가 재밌다는 듯 말했다.
“저는 톰입니다. 제니의 보조 파트너 톰.”
“반가워. 톰소여. 이제 너와 이 행성에서 모험을 떠날 거니까. 앞으로 톰소여라고 부를 게.”
제니는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소여의 모험'을 빗대 톰에게 장난을 친 것이었다.
“아니, 그건 호칭에 오류를 가져올...”
“톰소여! 맹수들이 우글대는 이 정글 같은 곳을 함께 모험 떠나볼까?”
“정 그러시면, 제니 셜리! 저는 앤 이라 불러도 될까요?”
“너, 아는구나? 빨간 머리 앤 이름이 앤 셜리인 걸.”
제니는 아주 재밌다는 반응을 했다. 톰이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 '빨간 머리 앤'으로 응수한 것이었다.
“저는 고도화된 최상급 레벨 보조형사, 톰소여입니다. 앤.”
톰은 일반 로봇과 다르게 설계되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복무하는 로봇 중에서도 특히 인간의 감정까지 파악하게 프로그램화되었다. 인간의 감정 중 가장 흉내 낼 수 없는 '유머'까지 반응하게 세팅되었다. 톰이 톰소여로 자신을 바꿔 말할 수 있는 것도 이런 프로그램 세팅에 의한 결괏값이었다.
“그래 좋다. 넌, 톰소여고. 난, 앤 이고. 오케이?”
제니는 그녀의 이름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이 누구의 손에 의해 지어졌는지도 모른다. 유년기 또래들은 자신의 이름은 어디에서 왔다는 둥, 집 안의 대단한 사람이 지어줬다는 둥 자랑하곤 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대화에서 탈락해야 했다. 그 시절 그녀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환영식은 대대적이었다. 행성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가는 곳마다 ‘러브플래닛의 입국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어느 대회 우승자처럼 반겨 주었다. 러브플래닛에 갓 입국한 이방인 같은 지구인들에게 행성은 말했다. 이제 우리는 한가족입니다. 새 행성에서 새 행복을 함께 찾아갑시다. 그리고 매칭의 해, 사랑이란 무엇인지 배워 갑시다. 행성은 그들을 끌어안는 일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지구에서의 기억이 썩 유쾌하다고 할 수 없는 제니는 이 모든 것이 생경했다. 사랑과 결혼에 시니컬한 그녀가 사랑행성에 정착하겠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이고, 아이러니했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밀어내기만 한 지구의 소녀를 어떤 중력이 아주 먼 이곳으로 잡아당겨 놓은 느낌이었다.
행성수사 2팀에선 뚜렷하게 각 잡힌 머리를 한 죠가 앞자리의 스티브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드디어 우리 팀에도 신입이 들어온다면서요?”
“행성인구가 늘어나니까 당연하겠지!” 스티브가 말했다.
“들은 소식 없으세요?” 죠가 궁금해 물었다.
“지구별 아가씨라지...”
“본토에서 오네요. 아 그립다.”
“응시 경쟁률이 최고였다지 아마.” 스티브가 말했다.
“지구가 아닌 연합행성에서도 지원하니까요.”
“그렇지, 새 제도 때문에 인기가 높으니까. 근데 경찰대 수석 졸업 이래지 아마.”
“정말요? 그럼, 우리 보스랑 맞을까 몰라?”
“팀장과 맞을까 모르긴? 맞춰야지.”
“기초,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로마로 발령받은 지구별 아가씨, 제니 셜리라고 합니다.”
제니가 이름을 말한 후, 재치 있게 말을 이어갔다.
“다행히 경찰대 수석이 아닌 차석이라 쫌 더 팀장님과 수사 스타일이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톰?” 죠가 톰이 먼저 인기척 하지 않은 것을 탓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부터 '톰'이 아니라 '톰소여'여야 할 듯합니다.”
“벌써 톰의 군기를 잡은 건가? 하하하”
죠가 유쾌해하며 말했다.
그때까지 조용했던 팀장, 유진이 통성명도 없이 물었다.
“이 별에 지구별 아가씨는 왜 지원한 건가? 아무래도 손해일 텐데?”
그랬다.
지금 신입들은 오자마자 결혼 상대를 찾아야 했고, 그들이 찾을 수 있는 상대는 한 번씩 결혼한 돌싱남들이었다. 처음 온 행성의 신입들은 신입들과는 결혼할 수 없었다. 그것은 결혼 경험이 없는 행성 신입들이 유경험자를 통해 좀 더 빠르게 행성에서의 결혼생활에 적응시키기 위한 일종의 배려 아닌 배려였다. 행성 설계자 에리히 박사는 좋은 선험자의 노하우를 통해 한시라도 빨리 제도를 행성에 안착시키고 싶은 의도였다.
“그렇지. 손해는 나와 자네 같은 후임이. 단물은 우리 선임들이 쪽쪽 빠셨지!”
불만이라는 듯 죠가 말했다. 그리고 한 숟갈 더 떠 이야기를 했다.
“나도 행성에 도착하자마자 큰 누님들의 타깃이 되었지. 내가 좀 얼굴값을 해야지. 여기저기서 탕탕 누님 총잡이들 총알 세례를 받았지. 자네도 총알 세례 꽤 받겠는데. 몸 관리 잘하라고.”
죠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하며 쏘는 시늉을 했다. 잘난 척하는 것 같지만 익살이 숨어 있었다. 제니는 왠지 모르게 선한 인상을 받았다.
“이 행성은 모든 게 환상적이지. 날 희생해야 하는 첫 칠 년 결혼 임무만 빼면!”
그는 계속해서 선배의 조언을 후임에게 했다. 죠는 7년 전 나이 차이가 한창 나는 연상녀와 결혼했고, 이제 행성 9조의 덕을 볼 차례였다.
“세상에 처음부터 완벽한 시스템이 어딨겠어!”
스티브는 그것들을 시스템 탓으로 돌렸다. 죠는 약간 어이없어했다.
팀장 유진이 다시 신입에게 물었다.
“아직 답하지 않았지, 지구별 아가씨?”
“깔끔해서 지원했습니다!” 제니가 단답식으로 말했다.
“깔끔해서?” 죠가 되물었다.
“결혼에 유통기한을 두는 게요.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죠. 사랑이나 결혼이라고 다를까요? 제겐 똑같아 보여서요." 첫 대면부터 저돌적이었다. 군기 잡히지 않겠다는.
“지구별 친구, 너무 비관적 논조 아닌가?” 스티브가 물었다.
“아니죠. 맞죠. 고인 사랑은 썩죠. 썩은 물은 버리고 새물을 담아줘야죠. 안 그러면 새물도 함께 썩겠죠. 요즘 세대답고 당차기만 하고만. 어쩌면 신입 말이 그게 더 인간적 대답 아닐까요?”
죠가 그녀의 편이 되어 답해줬다.
스티브와 죠, 둘이 말 펀치를 한 차례씩 치고받았다. 유진은 두 사람이 날린 말 펀치를 팀장석에서 관전하며 무승부로 판정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사회 초년병에게 잽을 날려보았다.
“깔끔한 결혼을 위해, 첫 7년은 희생할 수 있다? 정말로?”
사회 첫걸음마를 시작하는 출근자에게 이 정도면 쨈이 아니라 훅이었다. 하늘 같은 직장 팀장의 말이 아닌가?
“누가 희생한다고 합니까? 지금부터 7년을 함께할 최상의 파트너를 만나면 됩니다. 결혼은 좋은 파트너를 만나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경험 없는 이에게 최고의 파트너는 경험 있는 선배, 아니겠습니까?”
첫 링에 오른 사회 초년병은 훅을 맞은 게 아니라 피해서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앞의 무승부 판정은 잘못된 판정이었다. 정정해서 죠의 당찬 요즘 세대론에 손을 들어줘야 했다. 막히는 게 없는 신입 앞에서 기존 멤버들은 쉽지 않은 지구별 아가씨가 배치되었음을 직감했다.
“배짱 한번 두둑한데! 자네 자리는 여기야. 앉지?”
“네, 감사합니다. 죠 선배님.” 제니가 의자에 앉으려 할 때였다.
수사 2팀의 중앙에 있는 홀로그램 스크린에 붉은 반점이 뜨며 소리가 울려 퍼졌다.
“행성 좌표. 276에 463 도로. 교통사고 사망자 발생. 교통사고 사망자 발생.”
'사망사고라고?' 팀장 유진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인구 30만 밖에 안 되는 한적한 행성 교통체계와 최고의 기술이 도입된 도로 시스템상 쉽게 발생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