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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가장 거리 두어야 할 격언

하나를 보면 열 모릅니다. 하나도 모르는 걸요.

by j kim

내가 교사가 된 이후, 가장 경계하는 격언이 있는데 바로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다. 안타깝게 나는 10년차가 넘은 지금도 한 아이를 잘 알게 되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학생이자 한 사람에 대한 모든 종류의 선입견이나 편견에서 벗어나 그 사람을 순수하게 제로베이스에서 파악해나가고 알아나가는게 교사로서의 당연한 자세이자 미덕이라 생각하는 나는 사실 그러한 선입견의 피해자의 입장이었던 적이 많았다.


살면서 어릴적부터 편견과 선입견의 대상이었던 적이 많은데, 필시 외모에서 풍기는 '날티'가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날티나는 외모는 어찌됐건 내가 선택해서 갖게 된 것도 아니고 그저 타고난 것이라 나는 항상 그런 편견을 깨면서 살아와야 했다. 어릴때 학생이던 때 자주 듣던 말이 '너 왜 공부 열심히 하냐? 생긴건 그렇게 안생겼는데' 혹은 '역시 너는 날라리구나 처음 봤을때부터 그럴 줄 알았다' 'OO이는 첫인상이 안좋아서 날라린줄 알았어' 등등 뭔가 외모로부터 오는 편견으로 가득찬 기분 나쁜 평가들 투성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너무 억울했다. '아니 내가 뭔가 잘못한게 아닌데? 내가 의도한 일이 아닌데 왜 어째서 그런 평가를 선제적으로 받고 사회생활이나 조직생활을 시작해야하나?'하는 것.


상대방은 칭찬이라고 하는 '~~야 다시 봤어, ~~씨 다시 봤어요'라는 그 말도 참 많이 들었었는데, 들을때마다 기분이 참 언짢았다. 아니 나를 어떻게 봤길래? 그래도 날티나는 외모 탓에 가끔은 득을 보기도 했다. 조금만 성실하거나 뭔가 잘하기만 해도, 반전이라면서 내가 한 일의 성과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반전의 평가를 이끌어내는 일은 온전히 나의 투쟁의 과정이 되곤 했다. 물론 생긴게 불만이 많아 보인다며 선배들이나 군대 선임들한테 부당하게 혼난 적이 더 많았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항상 선입견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 억울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서, 아이들의 외모나 행동 하나하나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한다. 그냥 그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 행동을 한거야~ 라고 생각하는 건 학생이 받을 평가로서는 너무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학기초에 어떤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부정적인 모습으로 가득찬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지각을 한두번 했다고 해서 불성실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조금 위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이들마다, 흥미가 다르고 열심히 하려고 하는 분야가 달라서 어떤 것에는 불성실할 수 있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는 누구보다 성실한 모습을 보이곤 하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를 한마디로 정의내려 불성실한 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의 인격, 성품, 성격 등 그 사람을 구성하는 것은 정말 너무나도 다양하고 복잡해서 어느 한가지 면만 보고 그 사람 전체를 평가내리고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도 섣부른, 너무나도 그릇된 행위다. 특히나 아이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함께 살아야 하는 교사로서는 매우 거리 두어야 하는 자세이다.


선입견, 편견이란 것이 무서운 것은 한가지 작은 면을 가지고 그 사람의 전체를 미리 판단한다는 점이다. 교육이라는 것은 너무나 복잡해서 인간의 온갖 성격과 역량이 뒤섞여 일어나는 행위임에도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을 바라볼때 너무나 쉽게 그 아이에 대해 선단하는 오류를 범하곤 하는 것 같다. 가령 운동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달리기를 못한다고 해서 아예 운동신경이 없는 사람으로 보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평가다. 운동신경, 운동능력은 되게 다양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어 달리기를 못한다고 해도 다른 장르의 스포츠에는 우월한 실력을 보여줄 수도 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골프와 같은 스포츠는 달리기와 어떤 상관도 없다. 달리기를 못한다고 해서 골프도 못하리라는 법은 전혀 없다.


교육현장에서 교사들이 쉽게 범하는 잘못도 이런 편견에서 시작되는 것이 많다. 마치 3월 학기초에 이 아이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이 아이에 대해 모든 평가를 끝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실제로 아이들은 한해가 끝날때까지도 계속해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새로운 모습을 볼때마다 '이 아이에게 이런 면이?'하고 놀랄때가 있는데, 놀랄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 아이는 그런 특성을 원래 지니고 있었으나, 미처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일수도 있고, 그 아이도 성장해 나가며 조금씩 달라진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특히나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는, 변화하는 아이들은 언제나 '그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봐도 하나도 모르는 것이다. 그때는 그랬었는데, 이때는 이럴 수도 있는 것이다. 교사라면 모름지기 겸손한 마음으로 사람을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 아이를 만나기 전 그 아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간 어떻게 성장했는지 알수가 없으니까. 과거의 평판에 얽매이지도 말고, 나의 따뜻한 시선으로 아이의 다양한 모습들을 그 자체로 순수하게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교사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


일년이 지나도 나는 그 아이에 대해 완벽하게 안다고 혹은 그 아이를 완전히 판단하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으려 한다. 함께 있는 시간 동안 누구보다 그 아이를 곁에서 관찰하고 소통했기에 그 시기에 그 아이를 많이 알아갈 수 있었고 판단할 수 있었기에 잘 알겠지만 완벽하게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경계하려 한다. 일년을 그저 같이 지켜보며 살아가되 마음속으로도 아이에 대해 단순하게 판단내리려 하지 않는다. 그게 내가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지켜야 할 예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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