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화. 비밀의 방
[연재소설] 벚꽃 맨션의 비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옆의 우둘투둘한 시멘트 벽에는 흰 눈썹을 가진 검은 고양이, 메리의 사진이 잔뜩 걸려 있었다. 나무로 만든 단순한 액자에 꽂힌 사진도 있고, 과도한 장식의 비싸 보이는 액자에 꽂힌 사진도 있었다. 많은 액자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자칫하면 징그러워 보일 정도였다. 이 놀라운 광경을 마주하며 미지와 오서는 전시회를 구경하듯 찬찬히 내려갔다.
계단의 끝에 걸린 마지막 가장 큰 액자는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었다. 주황빛 큰 조명 아래에 아크릴 물감으로 남색, 노란색, 검은색, 파란색 등으로 잔뜩 휘갈겨 밤하늘이 질감 있게 표현되었다. 가운데는 커다란 달이 있고, 요염한 몸짓의 고양이 한 마리가 점프하듯 달 위로 몸을 펴고 날아오르고 있었다. 오른쪽 아래에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쓸쓸한 여인의 뒷모습이 담겨 있어, 아름다운 동시에 왠지 모르게 슬퍼지는 그림이었다. 하늘 그림의 대가답게 치요코는 이 작품 역시 한번 바라보면 눈을 뗄 수 없게 완성했다.
미지는 그림 옆에 난 마지막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으려는 오서를 만류하고 문에 귀를 갖다 대었다. 나지막한 소리로 웅얼거리는 여자와 남자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안에 누가 있나 봐.”
“미지야, 돌아가자. 경찰에 신고하자. 이거 너무 위험하잖아.”
오서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미지를 다그쳤다. 가까이에서 들리는 오서의 부드러운 목소리 때문인지 그의 두려움이 느껴져서 인지, 그녀의 심장이 더 쿵쾅댔다.
둘은 뒤돌아서 조심스레 다시 계단을 밟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뛰어 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하 문이 벌컥 열렸다.
“학생! 치요코 교수님과 친하게 지내던 학생 맞죠?”
깔끔하게 올림머리를 한 자현이 돌아가던 미지와 오서를 불러 세웠다. 순간 둘은 어찌나 놀랬는지,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발이 바닥에 강력하게 달라붙은 것 마냥 도망칠 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교수님이 많이 걱정하셨는데. 마침 잘 되었네요. 아, 놀라지 마요. 여기 지하에 cctv가 있어서 둘이 들어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자현의 친절한 말투에 미지와 뒤를 돌아서 자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얼어 있는 표정으로. 잔뜩 긴장하고 두려워하는 아이들을 보고 자현이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교수님을 걱정해서 온 거 다 알고 있어요. 여기로 들어와서 잠깐 얘기할까요?”
지하에 있는 방은 치요코의 집처럼 포근하게 꾸며져 있었다. 언덕에 자리 잡은 ‘가’ 동이라 그런지 지하라고 해도 커다란 창이 나 있고, 구도심의 반짝이는 불빛과 바다까지 한눈에 보였다. 할머니 집에서는 정원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이 방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고 미지는 생각했다. 벽에는 복도에서부터 보아 왔던 고양이 사진 액자가 여전히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여기로 앉아요. 차라도 한 잔 줄까요?”
자현이 둘을 소파로 인도했다. 소파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었는데, 미지와 오서의 맞은편에는 쌍둥이 형제들이 이미 앉아 있었다. 미지는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바로 눈을 피해버렸다. 친절한 자현과 달리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교수님과 애틋한 관계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말해 주어야겠어요.”
캐모마일 티가 담긴 예쁜 찻잔을 내밀며 자현이 말했다.
“교수님께서 몇 주 전에 지병으로 쓰러지셨다가 지난 수요일에 돌아가셨어요. 가족이 따로 없으셔서 이 집과 작품을 한사랑 사회 재단에 기부하셨는데, 마침 제가 그 재단 이사장이랍니다. 아, 저는 한 때 교수님 조교이기도 했고, 각별한 사이랍니다.”
“정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요?”
미지는 충격에 휩싸여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가위로 잘린 듯 뚝하고 끊기는 것인가. 어디에 살아 계실 것만 같은데, 이젠 안계시단 사실이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갑자기 주변이 변하는 듯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런데, 슈퍼 아저씨들은 아까 왜 저한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하지 않으셨어요?”
“아직 어린 네가 충격을 받을까 봐,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쌍둥이 중 한 명이 양손을 깍지에 낀 채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검은 앞머리가 눈을 다 덮어 버렸고, 미지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난감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얼른 손에 잡히는 대로 할머니께 받은 사진을 네게 건네었지.”
옆에 앉은 또 다른 쌍둥이가 말했다.
"아저씨들이 학생을 생각해 주었나 보네요. 너무 놀라지말고 여기 따뜻한 차라도 좀 마셔봐요. 교수님은 편안하게 눈 감으셨어요. 아, 그리고 벽에 걸린 교수님이 아끼던 고양이의 사진을 좀 보세요. 하늘을 날 수 있게 해 주는 ‘아메 네코’라는 고양이라고 하셨죠. 아끼던 고양이인데 한국으로 오기 전날 밤 사라졌다고 해요. 안타깝게도 이렇게 오래된 사진을 보며 그리움을 달래곤 하셨답니다. 저희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이 방에 있는 사진과 작품들로 달래 보려고 해요."
자현의 말에도 미지의 얼굴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 고개를 떨구며 훌쩍거렸다.
옆에서 어쩔줄 몰라하던 오서가 고양이 사진을 보다가 자현에게 황급히 물었다.
“할머니께서는 메리를 못만나고 돌아가신 건가요? 저는 메리라는 할머니 고양이를 만났었는데요. 저희 집 앞에서 만났고, 오늘은 여기 벚꽃 멘션 안에서도 봤어요. "
"못 보셨지. 십여년전에 일본에서 사라진 고양이인걸. 그 고양이는 메리가 아닐거야."
자현이 답했다.
"Merry 라고 적힌 목줄도 차고 있었고, 확실히 그 고양이가 맞아요. 검은 몸에 흰 눈썹까지 똑같았다구요. 그 고양이, 지금 벚꽃 맨션안에서 할머니를 찾아다니는 걸지도 몰라요."
오서가 흥분하며 말했다. 그런 오서를 보며 쌍둥이 중 한명이 무겁게 입을 뗐다.
"할머니께서도 슈퍼에 와서 몇 번이나 그 고양이에 대해 물어보셨는데, 우리는 보질 못했어. 심하게 집착하시고 이상한 이야기도 하셔서 걱정되긴 했었지. 나이가 드셔서 그런가 했는데, 너도 봤다니 그 고양이가 정말 나타나긴 했었나 보구나."
대답하던 쌍둥이 형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