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빛을 따라서
[연재소설] 벚꽃 맨션의 비밀
“꺄아악!”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미지는 아파트 복도에서 들리는 아이의 소리에 흠칫 놀랐다. 옆집 아이가 하원하는 시간이니 벌써 저녁이 되었을 것이다. 미지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핸드폰을 급히 집어 들고 오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뚜루루루-, 여보세요.”
여전히 젠틀한 목소리.
“오서야. 잘 들어갔나?”
“어. 안그래도 전화하려 했는데. 아까 네게 하지 못한 말이 있어. 그 슈퍼의 쌍둥이 아저씨들이 좀 이상했어.”
“뭐가 이상한데?”
“슈퍼를 나올 때 뒤에서 아저씨들의 수상한 말을 들은 것 같거든.”
“어? 무슨 말인데? 아까 왜 내한테 말 안했노.”
“또렷이 들은 게 아니라서 섣불리 말하기가 좀 그랬어.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뭔데? 아저씨들이 뭐라던데?"
“내가 들은 게 정확하다면 그것도 문제긴 하지.”
오서가 혼자서 중얼대기 시작했다.
“야! 뭐라는 거고? 제대로 또박또박 다시 말해봐.”
답답해하는 미지가 쏘아붙이자, 오서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한 명이 ‘믿는 것 같지?’라고 하니까 다른 한 명이 ‘치요코의 비밀 창고만 안 들키면 돼. 할머니가 죽은 걸 알면…' 이라고.”
“뭐!? 할머니가 어째?”
미지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예전에 치요코가 자신의 소중한 작품과 각종 골동품을 모아 둔 서향 방을 ‘비밀 창고’라고 불렀던 기억이 났다. 쌍둥이 아저씨들이 할머니의 작품을 노리고 나쁜 짓을 저질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느낌이 싸하지?”
“오서야. 지금부터 내 말 잘들으레이. 할머니의 비밀 창고가 나는 어딘지 알 것 같은데, 지금 내하고 한번 가볼래? 만약에 거기에 작품이나 물건이 없어졌으면 그 쌍둥이 형제들 빨리 경찰에 신고해야 될 것 같다.”
빠르게 튀어나오는 말처럼 그녀의 가슴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손과 발 끝의 말초 신경까지 저려오는 느낌이 들면서, 호흡도 떨렸다.
“그러다 혹시 거기서 쌍둥이 아저씨들하고 만나면 어쩌려고. 우리의 생각이 맞다면 그들은 아주 위험한 사람들 같은데 말이야.”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미지의 목구멍에 차 오르는 울컥함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자 혼자 가긴 위험하니까, 내가 같이 가 주긴 할게. 위험한 행동은 절 대 안 돼. 밖에서 살짝 보기만 하고 오는 거야.”
“그래, 지금 당장 언덕배기 마을에 있는 파란 대문 집 앞에서 만나자. 어딘지 알제? 아까 좁은 길 시작 되는 곳 말이야.”
“당연하지. 이제 해도 지고 혹시 모르니까 플래시 라이트도 가지고 갈게.”
“그래, 곧 보자.”
그들이 전화를 끊은 시각, 하늘을 주황빛으로 물들이던 해가 깊은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미지와 오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언덕베기 마을에 있는 ‘파란 대문 집’ 앞에서 만났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인 둘은 헉헉대며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미지야, 너도 아까 눈치챘겠지만, 내가 찾던 ‘메리’가 할머니의 고양이였던 것 같아.”
오서가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여기로 이사 온 첫날, 그 고양이가 집 밖에 비쩍 말라 쓰러져 있었거든. ‘Merry’라고 적힌 목줄을 하고 있기도 했고.”
“뭐야, 네 고양이가 아니었네.”
미지의 질문에 뜨끔한 오서는 흥분하며 황급히 대답했다.
“내가 계속 데리고 있으려던 건 아니고, 언젠가 주인을 찾아 주려고 했어. 당시에는 곧 죽을 것 같았으니까 일단 살리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지.. “
“알았다.”
더 이상의 변명은 필요 없다는 듯 미지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메리는 괜찮아진 걸까? 아까 봤을 때는 괜찮아 보이기도 했는데.”
“글쎄. 그보다 할머니가 괜찮으셔야 할 텐데 말이야.”
할머니의 온화한 말투와 그녀와 함께 보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미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따스하게 그녀에게 말을 걸어주던 주던 친절한 어른이었다.
“그런데, 할머니 집은 어떻게 들어가려고?”
언덕배기 골목 끝의 마지막 3개 계단을 오르며 오서가 물었다.
“휴- “
미지는 먼저 올라서 숨을 고르고는 비장하게 답했다.
“나 할머니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어. ‘비공식 적으로’.”
미지는 할머니가 비밀 번호를 누를 때 뒤에서 보았다. 비밀번호는 간단했다. ‘3333.’ 치요코가 비밀번호를 누를 때 뒤에 서 있었다면 누구든 알아챌 수 있었으리라. 미지는 치요코가 3은 쭉 많이 이어 붙일수록 더 귀여워진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벚꽃 맨션 정문을 지키던 경비원은 미지와 오서에 대해 여전히 관대했다. 밤이 되자 유럽풍의 고풍스러운 가로등이 켜져 운치를 더했다. 두 사람은 벚꽃 맨션 ‘가’동 의 할머니 집 현관 앞에 도착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엄청난 긴장감이 감돌았다.
“삐삐삐삐-띠리리리.”
미지의 생각대로 문은 수월하게 열렸다. 거실의 격자 창문에서는 달빛과 가로등의 주황색 불빛이 섞여 들어왔다. 미지의 내뱉는 숨이 가늘게 떨렸다.
“내 걸로 켤게.”
오서가 들고 온 손전등으로 집 안을 비추었다. 할머니와 담소를 나누던 거실이나 주방에는 별다른 게 없었다.
“할머니의 비밀 창고부터 살펴보자.”
그녀는 언젠가 딱 한번 들어가 본 적이 있는 복도 끝 방으로 오서를 데려갔다. 흐드러진 벚꽃 나무가 반겨주던 그날을 기억하면서.
“끼이익-“
오래된 나무 문이 생각보다 큰 소리를 내서 둘은 순간 당황했다. 방에 누구라도 있었다면, 침입자가 들어온 것을 눈치 채고도 남을 소리였다. 문고리를 잡고 밀면서 미지는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였다. 한편으론 뒤에 있는 오서에게 의지하면서.
다행히도 치요코의 작품이 가득한 작업실은 아직까지는 누구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워낙 잡동사니가 많아서 뭐가 없어진지도 모를 정도긴 했지만.
“누가 훔쳐 간 흔적은 없는 것 같으니까, 할머니가 혹시나 남겨놓은 메시지나 단서 같은 걸 좀 찾아보자.”
막상 방에 들어와서 당황해하는 미지의 모습을 본 오서가 먼저 제안했다. 둘은 손전등을 비춰 이것저것 찾아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문 맞은편에 있는 책꽂이를 뒤지던 오서의 손전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하더니 꺼졌다. 하는 수 없이 그는 핸드폰을 꺼내려고 바지 호주머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무언가를 찾아냈다.
“미지야! 야, 오미지!”
오서가 갑자기 소리를 죽이며 미지를 불러댔다. 미지가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자 오서는 말을 하지 말라는 듯 검지 손가락을 입 앞에 갖다 대었다. 이쪽으로 어서 오라고 손짓하면서.
“무슨 일이야?”
덩달아 미지도 소곤거리며 답했다. 둘의 심장은 여전히 크게 뛰고 있었다.
“여기 나무 바닥 사이에서 아주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아.”
자세히 보니 불빛이 나는 곳에 작은 홈이 파여 있었다.
“지하 벙커다. 전쟁 때 쓰이는 지하 벙커 말이다.”
미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곳에 분명 누군가 있다. 미지와 오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열어 보자.”
오서가 책꽂이에 있는 두꺼운 책 한권을 꺼내 들며 말했다.
“그 책은 뭐 하려고?”
“머리라도 내려칠라고 그러지.”
“아이고.”
미지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위험한 상황에서 오서와 함께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진짜 열어 볼까.”
오서가 파인 홈에 손을 넣고 나무 바닥을 들어 올렸다. 주황색 옅은 불빛이 점점 더 밖으로 새어 나왔다. 미지의 말대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가보자.”
둘은 숨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조심스레 밟아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