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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메리 Sep 11. 2023

11화. 아름다운 재회

[연재소설] 벚꽃 맨션의 비밀, 마지막 이야기.

        어두운 하늘에서 여전히 비가 쏟아져 내렸다. 벚꽃 맨션 전체가 흔들릴 듯한 무서운 번개가 내리 칠 무렵, 고양이를 안은 오서와 미지는 201호 현관 앞에 섰다. 미지의 떨리는 손가락이 201호 비밀 번호를 눌렀다. 손가락의 물기 때문인지 잘 눌러지지 않아, 축축하게 젖은 옷자락에 손가락을 몇 번 털어내고서야 가까스로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 수 있었다. 그들은 서둘러 따스한 자취라고는 온데간데 사라져 버린 휑한 거실과 복도를 지나 지하 비밀의 방으로 향했다. 미지는 불안정한 숨소리를 내뿜으며 비밀의 방 계단을 내려갔다. 양말이 흥건히 젖어 계단에 물자국이 남겨졌다.


        둘은 비밀의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야 품속에 포옥 안긴 고양이를 자세히 쳐다볼 수 있었. 고양이는 축 쳐져 눈만 겨우 끔뻑거리는 게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위태로 보였. 오서는 오크 원목 탁자 위에 놓인 고양이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사진 속 은색 목줄과 지금 고양이 목에 걸린 것이 같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고양이가 메리가 맞았어. 이 상태로 빗속에서 버텼다면 큰일 날 뻔했어."


    오서는 급한 대로 화장실에서 수건을 찾아와 꼬리의 피를 지혈하고는 메리의 검은 털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레 말려 주었다.


    미지는 조금 전 잔디밭에서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울분으로 토해냈음에도, 고양이를 쳐다보자 또다시 시큰거리는 무언가가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조금씩 쌓이다가, 이제는 슬픔과 억울함 같은 복잡한 심정까지 더해져 지난 학기 과학 시간에 배운 포화상태 같은 응어리가 되었. 문제는 이 응어리는 건드려질 때마다 가슴을 후벼 파듯 아프게 한다는 것이었다.


     “미지야, 수건으로 메리 털 좀 말리고 따뜻하게 해 줄래? 꼬리쪽은 다행히 피가 거의 멈췄고, 큰 상처는 아닌듯 해. 난 물이랑 메리 먹을 것 좀 준비해 볼게.”  


    오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잔뜩 찌푸린 미지를 일깨웠다. 그녀는 흠칫 놀라다가, 삐걱대며 어색하게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오서가 고양이를 놓고 간 검은색 바탕의 화려한 꽃무늬 암 체어 위로 고개를 숙였다.

   미지는 고양이를 한 번도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지만, 용기를 내어 다가가 뼈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메리의 굽은 등을 향해 조심 스레 손을 내밀어 쓰다듬어 보았. 생각보다 털이 많이 빠져 있었고 손끝으로 뻣뻣한 감촉이 느껴졌다. 고양이는 낯선 손이 닿았음에도 아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수건으로 어느 정도 솜털이 말리고는, 팔걸이에 걸쳐있던 베이지 색 뜨개 담요로 메리를 조심스레 감싸 올려 앉았다. 고양이의 자그마한 숨결과 따스함이 무릎에 전해져 왔다.

 

    “치요코…….”

 

    그때, 치요코를 부르는 듯한 가냘픈 목소리가 울렸다. 정확히 귀로 들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마음에 울려 퍼지는 생생한 목소리였다. 설마 하며 미지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고양이를 쳐다보는 순간, 자현과 쌍둥이 형제가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와 이내 문을 열었다.


     “얘들아, 괜찮니? 비가 너무 세차게 내리더라. 비도 비지만, 번개 맞을 까봐 얼마나 무섭던지.”


     자현이 팔의 물기를 쓸어내리며 오서를 바라보았다.


     “네, 옷이 다 젖긴 했지만 괜찮아요.”


    “다행이다. 그 고양이는 지금 어디에 있어?”

 

    오서는 작은 탁자 위에서 캔을 섞다 말고, 고개를 돌려 미지를 쳐다보았다. 쌍둥이와 자현은 서둘러 고양이를 찾아 미지에게로 다가왔다. 우두커니 서서 고양이를 쳐다보는 그들의 옷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져 붉은 페르시안 카펫을 적셨. 통창으로 내리치는 굵은 빗소리가  다다닥 거렸다. 창 밖 도심이 수증기로 인해 뿌옇게 보였다. 폭우가  심해지고 있었다.



 

    “정말 할머니 사진 속의 고양이와 똑같네!”

 

    자현이 놀라며 말했다.

    

   “검은 몸에 흰 눈썹을 가진 것도 같지만, 여기 이 목줄도 사진과 같잖아. 치요코 할머니의 말이 사실이었어. 메리는 벚꽃 맨션 안에 있었던 거야.”


     쌍둥이 형제는 우두커니 멈춰 서서 어떤 생각에 잠겼는지 슬픈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 할머니를 본 날 대뜸 우리에게 '메리'를 아냐고 물어봤었어. 너희에게 보여줬던 그 사진을 내밀면서 말이지. 벚꽃 맨션 안에 돌아다니는 길고양이는 가끔 보았지만, 검은 몸에 흰 눈썹을 한 고양이는 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고 해도 할머니는 우리말을 믿지 않았어. 이후로는 매번 슈퍼를 찾아올 때마다 사진을 들고 와 물으셨지. 우리는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어.

   그래도 처음에 몇 년 동안은 할머니가 신경 쓰여서, 음식물 쓰레기통 쪽에서 보이는 고양이를 유심히 살펴보긴 했는데, 안타깝게도 단 한 번도  고양이를 보지 못했어."


    쌍둥이 형의 말을 듣고 있던 동생이, 똑같은 자세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느 날은 할머니가 고양이가 말을 할 줄 안다고 하셨는데,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던 이후에 치매끼가 있으신가 보다 그랬지. 그러다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너희가 봤던 그 사진을 주고 가셨어. 고양이가 찾아와 자신을 찾으면, 이 사진을 건네주라고. 그러면 다 알 거라고."


    "그러니까 할머니께서 고양이에게 주라고 하신 사진을 저희에게 보여 주셨던 거군요."


   오서가 제대로 추리를 한 명탐정처럼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미지가 인상을 쓴 채 눈을 얕게 뜨자, 쌍둥이 형제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할머니의 고양이에 대해 물어보기에 너무 당황했지 뭐야."



    정적이 흘렀다. 쌍둥이 형제는 잠시 허공을 쳐다보다가, 많이 젖은 옷의 물기를 닦고 오겠다며 화장실로 향했다. 오서는 계속해서 참치를 담은 그릇을 고양이의 입에 갖다 대었다. 하지만 고양이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예 입을 대질 않네.”

 

    오서가 조금이라도 먹이려고  애써봤자, 고양이 가 수염에 참치가 더 묻을 뿐이었다. 도무지 먹을 낌새가 보이지 않자, 오서는 결국 탁자 위에 놓은 부드러운 티슈를 빼내어 고양이 입 주변 털을 닦아내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이라도 섞어 줘 봐야겠어요. 여기 생수 있나요? 차가운 것 말고 미지근한 것으로요.”

 

    “응, 내가 찾아 줄게.”

 

    자현과 오서가 생수를 찾으러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제 소파 주변엔 다시 지와 고양이 만이 남았다.


 

    “치요코…….”

    

     또 그 목소리였다. 미지가 의아한 듯 고양이를 내려다 보고서야, 아까부터 고양이는 턱을 앞발 위에 괸 채, 한 곳만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챘다. 치요코의 액자가 가득 달린 벽이었다. 고양이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작고 통통한 천사가 날개를 쳐다보는 장식이 붙어 있는 금장 앤틱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쌍둥이가 보여줬던 치요코가 검은 고양이 메리를 안고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녀는 고양이를 잠시 소파에 내려두고 액자를 가져와 물었다.

 

    “이걸 보고 있었던 거가?”

 

    “응…….”


    대답이 들리자, 미지는 이것이 고양이의 목소리라는 것에 확신을 하게 되었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쌍둥이 아저씨에게 했던 말이 사실일 지도 모른다. 이 고양이는 말을 할 수 있다! 머릿속에는 할머니가 알려주었던 아메네코에 대해 수없이 많은 궁금한 것들이 떠올랐지만, 말하기 조차 힘겨워 보이는 고양이에게 정작 물을 수는 없었다.


     “그렇구나.”


    “치요코, 보고 싶어.”


    고양이의 혼탁한 눈동자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이더니, 눈을 감을 때 작은 눈물 한 방울이 속눈썹에 맺혔다.


      "치요코 할머니는 돌아......."


      미지는 할머니는 돌아가셨다고 알려주려다, 목구멍에서 울컥 하는 것이 차올라 말문이 막혔다. 마음이 다시 쓰라리게 아파오고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울컥 한 것을 터뜨리고 다시 말을 이으려고 하는데, 고양이가 옅은 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메리,메리! 메리?”


      미지는 처절하게 고양이의 이름을 불렀다. 오서, 자현, 그리고 쌍둥이 형제가 모두 모여들었다. 고양이는 암체어에 축 처진   편안한 표정으로 죽어있었다.

미지는 황급하게 하고 싶었던 말을 마음속으로 크게 소리쳤다.


    "메리, 하늘로 가서 할머니를 꼭 만나! 그래서 할머니를 행복하게 해줘야돼!"



    미지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입가엔 미소가 퍼졌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 드세던 빗발이 잠잠해지면서 밝은 보름달이 구름 사이로 드러났다. 노랗고 환한 달빛이  창으로 들어와 비밀의 방을 비추기 시작했다. 벽에 잔뜩 걸린 치요코 할머니의 액자를 비추고, 고양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도 노르스름하게 비추었다. 미지는 창가로 다가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따스한 달빛을 따라 아메네코 메리와 치요코의 영혼이 달무리를 향해 함께 날아오르는 것을 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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