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정신이 아득해지다
사이렌을 크게 울리고 달려가는 구급차 안에서 남편은 누워있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내 상태를 확인하려는 것인지 계속 말을 걸어주었다. 어떤 말을 들었는지 구체적으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흔들리는 구급차 안에서 내 몸이 이리저리 쏠릴 때마다 들렸던 남편의 걱정스러운 톤의 목소리를 지금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오래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멈춰 서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차가운 공기가 훅 들어왔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M병원의 응급실 침대로 옮겨졌다. 소리로만 듣기에는 M병원의 응급실은 더 좁고 바쁘고 정신없는 분위기였다. 환자들이 많았는지 간호사들은 다들 잰걸음으로 걸어 다니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 간호사가 다른 파트 담당임에도 응급실 일을 도와주며 초과 근무를 하고 있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는 것도 눈을 감은 채로 주워 들었다.
나는 이내 여기저기 휠체어를 타거나 침상 그대로 실려 다니며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M병원에서도 낮에 갔던 S병원과 같이 CT, MRI를 찍었고, 특별히 다른 검사는 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검사를 하고도 한참을 누워있은 뒤, 나이 지긋한 남자 의사가 와서는 결국 뚜렷한 다른 이상 징후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럼 난 왜 이렇게 아픈 걸까…’
손발 저림은 계속되고 여전히 눈 뜨기도 어려울 정도로 어딘가가 아팠다. 왜 이렇게 아픈 것인지 원인을 알고 싶었지만,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기 어렵다고 하니 의미 없는 질문인 것 같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응급실 의사는 우리에게 선택지 2개를 주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쉬든지 또는 M병원에 하루 입원하면서 경과를 지켜보든지.
살면서 한 번도 입원해보지 않았다는 남편과는 달리, 난 산부인과에 두 차례 입원해 본 적이 있다. 한 번은 아이를 제왕절개로 출산해서 3박 4일간 산과에 입원했었고, 또 다른 한 번은 그로부터 약 1년 전 난임과를 다니며 임신을 시도했을 때였다.
나는 ‘다낭성 난소증후군’이 몹시 심해서 학창 시절에도 월경 주기가 매우 불규칙했다. 심할 때는 1년 간 생리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적도 있었고, 또 그다음 1년은 연중 내내 조금씩 계속 생리를 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나와 남편은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바로 내가 다니던 난임과에 가서 검사와 주치의 진단을 받았다. 난임과 의사는 나에게 일단 배란유도제를 주사하여 임신을 시도해 보자고 했다. 배란유도제를 처방해 주며 다양한 부작용을 얘기해 주긴 했지만,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그다지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러나, 배란유도제 주사를 맞고 며칠이 지나자, 회사에 앉아있으면 불편하고 더부룩할 정도로 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매번 입던 바지의 버클이 잠기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다시 난임과에 방문해 보니, 배란유도제 부작용으로 배에 복수가 차오른 것이라고 했다.
병원에서는 주사기로 바로 복수를 빼낼 수도 있지만, 그 방법은 오히려 다시 복수가 더 많이 차오를 수도 있어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주치의는 최소한 일주일 정도 입원을 해서 약물 치료를 하고 물과 이온음료를 아주 많이 섭취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변으로 복수가 배출되도록 하는 것을 권했다. 그 산부인과의 병동은 간호간병통합병동이어서, 보호자가 병실에 상주할 수 없고 병원에 소속된 간호사와 간병사가 환자를 도와주는 시스템이었다. 그렇게 혼자 책 몇 권, 노트북, 외장하드를 챙겨 6인실에 일주일 동안 입원을 했다. 복수가 차서 빵빵한 배가 불편해서 힘들긴 했지만 통증은 없었던 터라, 나름대로 혼자 침대에서 밥도 먹고 간식도 먹으면서 오랜만에 푹 쉬는 휴식 같고 편안했던 기억이 있다. 심지어 병문안을 왔던 선배들이 환자복을 입은 내가 편안히 노트북으로 영화 감상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나이롱환자라고 놀려댈 정도였다. 그리고 일주일 뒤, 복수는 다행히도 특별한 사건 없이 잘 빠져나가고 나도 건강하게 퇴원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M병원에서 권유한 2가지 방법 중에 병원에 입원을 하면, 그때와 같이 다시 금방 회복해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방법이 보호자인 남편도 편할 수 있고, 나도 더 빨리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와 남편은 입원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입원 의사를 밝히자, 병원에서는 신속하게 남편에게 여러 가지 서류를 제시하고 동의를 받은 뒤, 바로 입원 병동으로 내 침상을 옮겼다. 여러 병실의 중앙 즈음에 있는 간호사실 앞에서 보호자는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고, 안에서는 직원 분들이 도와준다고 했다. 여전히 몸에는 힘이 없는 터라, 정신없이 병실 침대에 옮겨졌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비틀거리는 몸으로 공용화장실을 다녀온 후 침대에 누웠다. 물론 누군가의 부축 없이 움직일 수 없어 간호조무사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다녀올 수 있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누워있는데도 빙글빙글 도는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입원할 때 남편에게 인사를 했던가. 남편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손도 흔들었나. 걱정이 묻어나는 인사를 건네는 남편의 목소리만 들었었나.’
그러나 더 이상 생각이 이어지지 못하고 이내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잠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잠이 든다기보다는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 그 뒤로는 M병원에서 일어난 일들이 이어지지 않고 깨져버린 그릇 조각처럼 기억의 파편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 비트윈
보통 아침에 잠에서 깨면 제일 먼저 휴대폰을 켜서 카카오톡, 블로그 등 다양한 알림을 먼저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병실에서도 여지없이 눈을 뜨자마자 남편이 보낸 비트윈 메시지가 있어 확인을 했다. 간밤에 남편은 갑자기 아내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아파 입원까지 하게 되니 몹시 당황했을 것이다. 그래도 메시지 속의 남편은 침착하게, 이 기회에 병원에서 하자는 검사는 모두 받자고 하며 더 필요한 건 없는지 물었다. 아마 평소에도 내가 자주 편두통을 앓았던 것을 떠올렸으려나. 가까스로 핸드폰을 들어 올리고 답장을 했다.
“ㅇㅇ”
남편을 더 이상 걱정시키고 싶진 않아서 최대한 멀쩡하게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치 술에 만취한 사람처럼 자음 두 글자를 입력하는데도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다. 더는 휴대폰으로는, 적어도 문자메시지로는 무언가를 더 할 수 없다는 걸 느꼈다. 남편도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답장이 왔다.
“좀 괜찮니?”
평소의 나라면, 괜찮으니 걱정 말고 회사에 잘 다녀오라고 답장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괜찮지가 않았다. 메시지로 그다지 괜찮지 않다고 대답하고 내 상태를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이미 손 끝은 힘이 다 빠져나가버려 더 이상 내 의지로 휴대폰에 무언가를 입력할 수가 없었다.
# 아침식사
“식사 나왔습니다.”
갑자기 들린 소리에 어렴풋이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가 날 조심조심 앉혀주었다. 아마도 병원의 아침식사가 나와서 간호조무사가 내 침상의 식탁을 펴고 식판까지 가져다 놓고, 누워 있는 날 깨웠던 것 같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눈을 뜨고 그릇 위에 덮여있는 반투명의 플라스틱 뚜껑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달리 뚜껑을 열 수가 없었다. 처음엔 한 손으로 열어보려고 했으나 실패. 그다음엔 두 손으로 열어보려고 했으나 또 실패.
‘왜 이러지?’
동시에 몹시 어지럽고, 순식간에 에너지가 고갈된 기분이 들어 더 이상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듯 그냥 뒤로 드러누워 버렸다.
# 머리카락
어젯밤에 갔던 공용화장실. 변기 옆의 벽에 붙어있는 보조장치를 붙들고 있었다. 엄마 뻘되는 나이 지긋한 간호조무사 두 명이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여전히 고개를 들 수 없어 푹 숙인 내 시야에는 엉망으로 헝클어져 얼굴 앞으로 마구 내려온 내 머리카락이 보였다. 손으로는 반쯤 내려가 허벅지와 무릎 사이에 걸쳐져 있는 바지를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손가락에 힘이 없는 것인지 감각이 없는 것인지 옷이 잡히지 않았다. 내 손으로 옷을 잡고 싶었다. 그런데 그 얇은 환자복 바지 한 장이 잡히지 않아 나는 흐느끼고 있었던가. 손끝이 저려 아파하고 있었던가.
“괜찮아요?”
“울어요? 울지 말아요.”
“어머, 어떡해.”
간호조무사들의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히려 나는 그 상황에서도 아프다거나 괴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당혹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이거 왜 이런 거지? 뭐지, 왜 안되지?’
# 척수액 검사
침대에 누워있는 나에게 의료진들이 왔다. 날 모로 눕히더니 등에서 척수액을 뽑아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갑자기 약 6년 전 아이를 낳을 당시 산부인과의 분만실이 떠올랐다. 아이는 41주 동안 내 배 속에 있었지만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유도분만을 했었다. 약을 투여하자 진통이 시작되었고, 생애 처음 겪는 고통을 12시간 넘게 참다가 일명 ‘무통주사’라는 척수에 맞는 주사를 맞았던 때와 비슷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때와 비슷한 두려움을 느꼈다. 척수에 무언가를 넣는다는 상상만으로도 무섭고 두려웠다. 등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제대로 척수액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들렸고, 정신은 이내 아득해졌다.
두서없는 기억의 파편들을 끝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불쾌한 꿈들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