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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 토야, 당근 토!

몸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by 구름


몇 시간 즈음을 자다가 깨다가 하며 누워만 있었을까.

저녁을 조금이라도 먹어야 한다고 나를 깨우는 남편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커튼 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도저히 몸이 일으켜지지 않아 고개를 거실 쪽으로 돌리니, 부엌은 환한 조명이 켜져 있었고, 아이는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아 있고 남편은 점심때 먹다 남은 전복죽을 차리고 있었다. 남편은 S병원에서 처방해 준 어지러움 완화 약을 먹으려면 조금이라도 음식을 먹어야 한다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책장에 기대어 발을 떼지 못하고 있는 나를 부축해 식탁에 앉혀주었다.


식탁에 기대어 앉았지만 고개를 살짝 들기만 해도 어지럽고 머리가 아파서 내 왼편에 앉은 아이와 맞은편에 앉은 남편의 얼굴을 볼 수조차 없었다.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해도 아이의 걱정 반 낯섦 반이 섞인 눈길이 느껴졌다. 작은 앞접시에 덜어진 전복죽을 최대한 먹어보려고 숟가락을 들었으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마저도 힘들어 두세 숟가락 정도를 간신히 입에 밀어 넣어 삼켰다. 그래도 약을 먹으면 좀 괜찮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약 몇 알과 물 한 모금도 같이 들이키고는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눕자마자 갑자기 엄청난 메스꺼움이 느껴져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숨을 고르려고 한숨을 내쉬는 순간, 방금 먹은 것들이 참을 수 없이 식도를 따라 역류하는 것이 느껴졌다.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으며 안방 화장실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간신히 화장실 안에서 남은 것들을 모두 게워내고 나오니, 그제야 남편과 아이가 놀랄 것이 떠올랐다. 입을 헹구고 씻고 있는데 화장실 문 밖에서 남편과 아이의 목소리가 웅성거리듯이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남편과 아이가 마른걸레로 바닥에 흥건한 묽은 토를 닦고 있었다. 몸을 가눌 수 없어 주저앉는데 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당근 토야, 당근 토!"


나에게 걱정하는 말을 건네며 바닥을 열심히 닦고 있는 아빠의 옆에서, 아이는 해맑게 걸레를 하나 손에 들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손을 뻗어 걸레를 넘겨받으며, 아이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하지 마, 하지 마. 엄마가 할게."


아직도 당시 아이의 눈빛, 미소, 표정과 음성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것이 내가 갑작스레 기약 없이 병원에 입원하기 전 제대로 본 아이의 마지막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나는 침대에 눕혀졌고, 남편은 일단 가까운 곳에 사는 나의 엄마와 아빠를 호출했다. 내 상태가 심각하다고 파악했는지, 119에 전화를 걸어 날 받아줄 수 있는 응급실을 다시 찾는 듯했다. 엄마와 아빠가 아이를 돌봐주기 위해 급히 도착했고, 이어 구급대원들도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낯선 이들이 우리 안방으로 들어와 내 옆에 서서 지금까지의 증상들을 물었고 남편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어 놓았는지 아직은 차가운 3월의 바깥공기가 느껴졌다. 찬 바람을 맞으며 나도 남편의 설명을 같이 곰곰 들었다. 내가 직접 말할 기운이 더 이상 나지 않았다. 곧이어 구급대원들은 현관까지 걸어갈 수 있겠냐고 나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침상을 집 안에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고 했다.


구급대원과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현관 앞까지 걸어가는데, 내 몸이 더 이상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방부터 현관까지의 그 짧은 길이 아까 낮에 들어올 때보다 훨씬 멀었다. 손과 발은 계속 저렸고, 이제는 다리에도 힘이 들어오지 않았으며, 고개는 여전히 들 수도 없어서 계속 내 발끝만 볼 수밖에 없었다. 날 걱정하는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고 날 부축하고 있는 남편과 구급대원의 손길은 느껴졌지만, 내 시야에는 현관에서 뒹굴고 있던 내가 좋아하는 털슬리퍼를 제대로 신고자 애쓰는 나의 서툰 발짓만 보였다.


현관에 있다던 침상은 내 예상과는 달리 완전히 눕는 형태가 아니라 기대어 앉을 수 있는 의자였다. 내가 비스듬히 기대어 앉자 모두 일사불란하게 침상을 밀어 엘리베이터에 태우고, 아파트 1층에 세워져 있던 구급차로 옮겼다. 구급차 안에 들어갈 때는 침상을 180도 눕혀서 태워졌다. 난생처음 겪는 상황에 남편도 당황스러웠는지,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할지 본인도 내 옆에 타야 할지 묻는 목소리에서 초조함과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래도 남편은 최대한 차분하게 구급대원에게 내 상태와 지금까지의 일들을 다시 한번 설명했다. 그리고 구급대원이 내 손과 발 쪽에 기계를 붙이며 내 상황을 체크하는 동안, 운전석(또는 조수석)에 앉은 구급대 팀장과 어느 병원으로 갈지 상의했다. 낮에 S병원 응급실에 갔다가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해 다시 돌아왔고, 오후엔 집에서 쉬었지만 더 악화되었으니, 다시 S병원으로 가기보다는 다른 병원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아마 다른 병원을 가도 오전과 동일한 검사를 할 거예요. 그러느니 다시 S병원에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다소 사무적인 말투로 S병원을 권유하는 팀장에게, 남편은 재차 다른 큰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우리를 태운 구급차는 근처에 응급실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좀 더 큰 M병원으로 향했다. 차가운 침상, 삐비빅거리는 날 선 기계음, 사이렌 소리, 덜컹거리는 구급차, 날 안심시키고자 하는 남편의 목소리... 모든 것이 낯설고 무서웠지만 그보다도 눈을 뜨면 두통이 심해지고 어지러움이 커져 왠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계속 눈을 감고 소리로만 상황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뜰 수 없으니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 최대한 귀를 기울였지만, 자꾸만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점점 꿈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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