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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은 일주일(1)

끝없이 이어지는 꿈, 꿈, 꿈 (1)

by 구름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정신이 들 때마다 내 주위의 상황을 파악하고, 오늘이 며칠인지 지금이 몇 시인지 알려고 했지만 거의 불가능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의 나는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사지마비, 안면마비뿐 아니라 동공이 풀린 채로 눈에 초점도 없었다고 했다. 내가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던 순간들도 알고 보면 영화 ‘인셉션’처럼 꿈의 레이어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 음료


정신이 든 것은 누군가 나에게 차가운 무언가를 쥐어준 때였다.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커피와 얼음을 동동 띄운 새파란 색의 파워에이드였다. 마침 목이 말랐던 나는 컵을 손으로 받아 꿀꺽꿀꺽 모두 마셔버렸다. 몹시 시원하고도 청량한 맛이었다.




# 갈증


엄청난 기갈이 느껴져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나는 M병원과는 다른 병원 침대에 누워 코로 약과 음식을 투여하는 콧줄을 코에 끼우고 있었고, 침대에 누운 상태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누워 있는 병실은 환자는 나뿐이었고, 몇 명의 간호사들이 들락날락하며 내 침상 옆을 지나다니는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갈증을 호소하자(말로 호소했는지, 표정으로 호소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젊고 예쁜 여자 간호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목마르세요? 어떤 걸 마시고 싶으세요?"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구체적인 음료가 떠올랐다. 스타벅스의 ‘바닐라크림콜드브루’와 ‘아이스자몽허니블랙티’. 회사에서 내가 즐겨 먹던 음료들이었다. 나는 간호사에게 두 가지 음료를 말했고(진짜 내 입으로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간호사는 근처 스타벅스에서 배달 주문을 하겠다고 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그 음료들을 가져왔고, 내가 직접 마실 수 있도록 빨대를 입에 대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간호사는 영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내 코에 연결되어 있는 콧줄로 음료를 넣어주겠다고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내 코를 통해 목과 입으로 시원한 것이 지나가며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놀랍게도 호스를 통해 먹는 것임에도 달콤한 바닐라크림과 고소한 커피 향, 상큼한 자몽향과 쌉싸름한 블랙티의 맛까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의 행복감이 정말 커서, 나중에 나도 이 병실에 있는 간호사들에게 스타벅스 딜리버리로 커피를 사드리고 감사하다는 인사도 꼭 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뒤에 현실로 잠깐씩 돌아올 때마다 나는 이 맛과 향을 다시 직접 느끼기 위해 버텼다. 검사를 위해 침대에 실려 어딘가로 이동할 때, 코끝에 느껴지는 카페의 커피 향을 최대한 많이 느끼기 위해서 숨을 크게 들이쉴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병실에서 간호사가 콧줄로 커피를 먹여준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생생하게 향과 맛과 차가운 감촉이 느껴져 정말로 진짜 현실이라고 믿었다.




# 스케줄


아파서 누워있기 전까지 나는 7살 아이의 새 학기를 맞이해서 아이가 다니는 여러 가지 학원 스케줄을 다시 조정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는 원래 집 근처의 영어학원 주 3회, 방문미술 주 1회 정도의 사교육만 하고 있었다. 다른 이웃 아이들보다는 훨씬 여유시간이 많은 편이었다. 7살부터는 피아노 학원, 미술 학원, 학습지 등등 여러 가지 다양한 분야의 사교육을 접해보도록 해주고 싶어 미리 상담을 여러 군데 다녀오거나 예약해 놓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직 스케줄이 확정되기도 전에, 병원에 이렇게 꼼짝없이 누워있게 된 것이다.


가만히 누워서 할 일이 없으니 머릿속으로라도 딸의 스케줄을 이렇게 저렇게 재편해 보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스케줄은 내 마음대로 조정되지 않고 너무 시간이 부족하거나 또는 너무 시간이 남거나 해서 답답했다. 답답함이 찾아올 때마다 나의 팔과 다리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누군가 짓누르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그 고통을 피하려고 팔과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저리고 아픈 느낌이 심해질 뿐이었다.


'그만, 그만 생각하자.'


애써 아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나로서는 다른 일을 떠올리기도 어려웠다.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은 그저 내 머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도 했다. 그냥 나의 생각뿐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것을 인지할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팔과 다리의 고통은 계속되고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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