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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방

차라리 꿈속이 나았다

by 구름


'중환자실'


내가 직접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그저 단순히 병세가 심각한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곳이라는 개념만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내 주변의 가족과 친구 중 중환자실에 입원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중환자실 외에는 특별히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장소였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청초한 모습으로 환자복을 입고 팔에는 수액 바늘 하나를 꽂고 누워 있고, 머리맡의 창가에는 쾌유를 비는 꽃이 화병에 꽂혀 있었다. 가족들은 주인공의 침대 옆에 앉아 주인공의 안부를 묻고 근황을 나누며 쾌유를 빌었다. 몇 달 후 우연히 재활병원에 입원한 채로 보게 된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 주인공(김지원 역)이 갑자기 쓰러지고 의식을 되찾은 뒤 입원해 있던 중환자실이 정확히 이런 모습인 것을 보고, 나는 혼자서 몹시도 괴로웠던 중환자실의 추억을 떠올리며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꿈에서 깨어난 내가 마주한 현실 속의 중환자실은 ‘하얀 방’ 그 자체였다. 외부와는 철저히 차단되고 의료진만이 내가 누워있는 곳에 올 수 있었으며 24시간 하얀 조명이 꺼지지 않는 곳이었다. 천국의 모습을 닮은 지옥. 그것이 내가 앞으로 기억할 수 있는 중환자실이었다.


내가 꿈속에 갇혀 있는 사이,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비틀대던 기억이 있던 M병원의 중환자실에서 K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고 했다. 놀랍게도 지금까지도 M병원의 중환자실은 아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일한 목격자인 남편의 말로는, M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당시 내가 묻는 말에 어눌하게나마 대답도 하고 오히려 질문도 했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K병원 중환자실 2번 병실에 누워있었다. 병원마다 환경이 다르겠지만, K병원 중환자실은 가운데에 간호사들이 일하는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을 둘러싸고 벽 쪽으로 환자별로 분리되어 있는 병실이 늘어서 있었다. 병실의 벽 한쪽은 의료진들이 환자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고, 유리벽 위로 각 병실의 번호가 크게 반투명 스티커로 붙어 있어 내가 2번 병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침대에 누운 상태로 발 쪽을 내려다보면 투명한 유리벽 뒤로 가운데 공간이 보여서 간호사와 보조원이 바쁘게 움직이며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아마도 2번 병실이 출입구 쪽에 가까운 편이었는지 가끔은 다른 병실 침대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유리벽 너머의 사람들은 언제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내가 누워있는 병실 안은 참으로 고요했다. 간호사나 보조원이 벽 너머에서 내가 있는 병실 안으로 들어오려면 발을 움직여서 열리는 자동문을 열고 들어와야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병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항상 ‘쿵’하는 소리에 이어 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내가 들을 수 있는 병실 밖 소리는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뿐이었다.


‘쿵 드르륵’


이 소리가 나면 누군가가 병실에 들어온다는 의미였다. 주치의가 들어와서 내 상태를 체크하기도 하고, 간호사가 들어와서 정기적으로 내 팔에 꽂혀 있는 주사를 바꿔주기도 했다. 그 외에도 수시로 누군가가 들어와 하루종일 천장을 보고 누워있는 내 자세를 고쳐주거나,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환자복을 새것으로 갈아입혀 주기도 했다. 여전히 눈을 뜨기 힘들어 귀로 들리는 소리에 의지했던 나는, 며칠이 지나자 그 소리가 들리면 약 기운에 꾸벅꾸벅 졸다가도 번쩍 정신이 들면서 고개를 빳빳이 들게 되었다.


간호사의 3교대 시간에 맞추어 이루어지는 주사 교체, 혈압 측정, 자세 정비, 환자복 교체를 위해 까무룩 잠이 든 새벽 시간에도 수시로 문이 열렸고, 그 외에도 보조원이 비품을 보강해 줄 때도, 내 상태를 보러 간호사들이 문득 들어올 때에도, 가만히 누워있던 나는 ‘쿵 드르륵’ 소리에 화들짝 놀라기 일쑤였다. 특히 간호사 교대 시간에는 간호사들이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인지, 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를 ‘정비’하고 다음 간호사들에게 인수인계를 해야 하는 것 같았다. 교대 시간이라는 것은 내가 인지할 수 없는 시각이었고, 그냥 어느 순간이 되면 간호사들이 등장했다.


“환자분, 간호사 교대 시간이라 정비할게요.”


기계음 같은 말과 함께 내 몸은 그들이 밀고 당기는 대로 자세가 바뀌고, 처음엔 따뜻하지만 금세 차가워지는 타올로 휙휙 닦여지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소변줄도 바꿔 끼워지고, 팔뚝에 꽂혀 있던 주삿바늘도 새로운 것으로 갈아 끼워졌다. 그리고는 다시 원래 자세로 돌려놓아지고, 옅게나마 들었던 잠에서 깨어 다시 내 몸이 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불편함을 인지한 채 괴로워하다 다시 잠드는 것의 반복이었다. 다시 잠들기 전까지는 팔과 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 그런 밤들이 정말로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괴로운 밤을 더욱 길게 만든 것은 중환자실의 하얀 조명 탓이기도 했다. 대학병원 중환자실은 위독한 환자들, 병세가 급격히 나빠지는 환자들이 많아서인지 24시간 하얀색 형광등 조명이 꺼지지 않았다. 평소에도 암막커튼을 치고 깜깜한 암흑 속에서 잠드는 것에 익숙한 나로서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간혹 깊은 밤에는 간접 조명처럼 어둡게 바뀌기도 했던 것 같은데, 그마저도 다른 병실의 환자가 위독해지거나 새로운 환자가 오거나 새벽에 검사가 있거나 하면, 바로 형광등을 켜야 했기 때문에 어둑함은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특히, 내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괴로워하는 밤이면, 당직 의사나 간호사가 수시로 내 병실에 들어왔기 때문에 밤새도록 하얀 조명 밑에서 자다가 깨다가 하며 깊이 잠들지 못했다.


차라리 고통스러웠던 꿈 속이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하얀 방에서 나는 몸 안에 갇힌 채 많이 울고 소리치고 화내고 괴로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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