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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다시 태어나면 꼭 나무로 태어날 거야

by 구름


20대의 나는 20대답지 않게 많은 것을 귀찮아했다.


물론 지금의 남편을 20살이 되던 해 4월 초에 만나 연애를 시작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 흔한 클럽 한 번 가보지 않고, 소개팅 한 번 해보지 않았다. 그다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오래된 입시 생활에 지쳐서였을까? 아니면 천성이 게으른 탓이었을까? 나름 ‘쿨’해 보이고 싶었던 걸까?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당시의 나는 나도 모르게 “아 귀찮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가장 친했던 대학 친구가 참다못해 제발 그 말 좀 그만하라고 대놓고 면박을 줬을 때에야, 비로소 귀찮다는 말을 밥먹듯이 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대학교 3학년 즈음 휴학을 하고 학원 강의,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취직을 위한 자격증 시험공부를 할 때였다. 아침 7시 반에 출석 스터디를 위해 도서관 1층에 매일 출근하고,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스터디를 하거나 학원에서 강의를 듣는 일상이었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친구와 휴게실에서 뒹굴거릴 때면, 우리는 보통 지쳐 있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공부를 언제까지 해야할까 푸념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단번에 합격했다면 좋았을텐데, 1차 시험에서 한 번 고배를 마시자 스트레스는 가중되고 작은 사건에도 크게 마음이 흔들리곤 했다. 당시 내 마음 속에는 정말 '바늘 하나' 설 자리가 없다는 표현이 적확했다.


어느 컴컴한 밤, 도서관에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며 같은 하숙집에 사는 친구에게 대단한 결심인 것처럼 말했다.


“나, 다음 생에는 나무로 태어날래.”


나무는 오래전부터 내가 좋아하던 생명체이다.


굵은 나무 기둥에는 하늘을 향해 여기저기 뻗어나가는 나뭇가지가 연결되어 있고, 나뭇가지의 끝에는 여러 가지의 빛과 색을 가진 나뭇잎들이 하늘하늘 바람을 따라 살랑거리며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평화’라는 단어의 시각화된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오랜 세월 한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나무는, 인간은 알 수 없는 세상의 이치를 모두 알고 있는 현자 같았다. 그래서 작은 스트레스에도 요동치던 당시의 내 마음이 괴로울 때면, 학교 도서관 근처의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나무를 바라보며 부러워하곤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건 나뿐만이 아닌 듯, 학교 도서관 한편에서 친구가 발견한 책 중에 “나무가 되는 법”이 있었다. 친구는 우스워죽겠다는 듯이 '말하는 나무가 되는 법'을 안내해주는 페이지를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서 나에게 보내주었다. 생각보다 나무가 되는 법은 심플했다.


1단계 : 근육을 키운다.

2단계 : 소식한다.

3단계 : 물구나무서는 법을 연습한다.

4단계 : 3단계를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도록 연습한다.

5단계 : 그러다보면, 뿌리와 나무가 팔과 다리에서 돋아나기 시작한다.


친절하게도 삽화까지 곁들인 그 책을 보며, 나무가 되는 것도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구나 싶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약 15년 뒤의 나는 대학병원의 중환자실에서 비로소 20대의 내가 꿈꾸던 것과 같이 나무처럼 가만히 있을 수 있었는데…. 이렇게나 괴로운 일일 줄이야.


다시는 나무가 가만히 서서 햇빛을 쬐고 비와 눈을 맞고 바람을 견디는 것을 평화롭게만 보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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