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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떠올리다

이대로 죽는다면... 하는 상상

by 구름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돌아온 이후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누워있는 것뿐이었다.


열흘 정도는 이상한 꿈들(아마도 섬망 증상)을 꾸느라 겉으로 보기에는 어떤 의사표현도 못하고 의식이 없었다고 한다. 이마저도 하루에 한 번 면회를 온 남편에게 나중에 퇴원 후 전해 들은 터라, 당시의 나는 내가 어떤 상황인지 인지하기가 어려웠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의식을 잃고 열흘이 넘게 누워 있었고 의식이 돌아온 이후에도 며칠 째 누워있기만 했는데도, 거의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의식이 또렷해지고 멀쩡하게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종종 죽음을 떠올렸던 순간들이 생겼다. 그전에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만큼 불편하고 괴로운 것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코에 연결된 호스로 유동식을 섭취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당시 나는 안면마비와 사지마비 증상으로 인해 음식을 씹어 삼킬 수 없었기 때문에, 코 안으로 수액이 들어가는 것 같은 호스를 연결하여 유동식과 약을 넣어주었다. 콧줄을 통해 내 코 안으로 어떤 액체가 들어온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니, 나는 그것이 몹시 불편했다. 코로 무엇이 들어올 때마다 거부감이 심했고, 자꾸 숨이 막히는 것 같고 역해서 자꾸 구역질이 나왔다.


그런데 그 느낌이 24시간 내내 지속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약 기운에 인지하지 못할 때는 괜찮았는데, 졸음이 사라지면 콧 속의 호스가 거슬리고 그 이질감이 너무 극심해서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공포감까지 느껴졌다.

어느 꿈속에서는 자꾸 숨이 막혀 잠이 깼고, 또 다른 꿈속에서는 선임 간호사가 선심 쓰듯 그 콧줄을 빼주기도 했다. 꿈결에 내가 무의식적으로 콧줄을 손으로 빼버리는 바람에, 엄청난 구역질을 하면서 다시 콧줄을 끼우고는 양손이 침대에 묶여 더욱 움직이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간호사가 식사 시간을 알리며 병실에 들어오면 나는 매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유동식이 코로 들어올 때마다 몸부림을 치며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간호사들은 종종 내 귀에 대고 큰 소리로 왜 밥이 먹기 싫은지 질문했다.


나는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코로 무언가가 들어오고 있어 숨 쉬기가 어려워요. 사레라도 들리면 숨이 막혀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무섭고 괴로워요.'


하지만 여전히 고개를 움직이는 정도의 의사표현만 가능했다.


간호사들은 내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수많은 질문들을 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장 내 상태랑 유사한 질문이었던 “속이 안 좋아요?”라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면 간호사들은 투여하는 유동식 양을 좀 줄여주곤 했다. 식사시간이 짧아지는 만큼 괴로운 시간이 좀 줄어들긴 하다 보니, 매번 나는 속이 안 좋거나 메슥거려서 식사를 하기 싫어하는 환자가 되어버렸다.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옮겨서도 며칠 더 콧줄로 밥을 먹었는데, 내가 중환자실에서 계속 속이 좋지 않다고 의사표현을 했던 것 때문에, 일반 병동 간호사실에서는 소화제도 처방해 주고 굉장히 느린 속도로 유동식을 넣어주었다. 그래서 유동식 1팩을 먹는데 거의 2시간 넘게 먹는 바람에 정말 힘들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계속 메슥거리거나 속이 좋지 않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신경 써주셨는데, 알고 보면 나는 한 번도 속이 안 좋은 적은 없었다는 사실.


날 살리려고 끼운 콧줄인데, 당시에는 콧줄 때문에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니, 몇 달이 지나 회복되고 나서 돌이켜 보니 조금은 우습게 느껴졌다.


또 다른 괴로움은 스테로이드 투여로 인해 체온 조절이 어려워서 생기기 시작했다. 스테로이드를 투여한 이후에는 체온이 확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는데 그 견딜 수 없는 더운 느낌을 말로 전달할 수 없어, 실험대에 묶인 실험체처럼 소리 지르고 울었다.


온몸을 비틀고 간호사들과 수차례 실랑이를 한 끝에 간신히 '몸이 너무 뜨겁다'는 표현을 하면 간호사들이 차가운 아이스팩을 가져다주고 나서야 나는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이스팩을 올리면 내 몸은 또 순식간에 추워졌다. 그러나 나는 애초에,


“선생님, 너무 더워서 그러는데 아이스팩을 잠깐 주시면 안 될까요?” 라고 말할 수 없어 몸부림친 것처럼,


“선생님, 이제 좀 추워서 그러는데 아이스팩을 치워주세요.” 라고 말할 수 없었다.


간호사들도 한참의 실랑이 끝에 아이스팩을 내 겨드랑이와 가슴에 얹어주고 나서 나를 진정시킨 후에는, 나에게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았다.(정확히는 관심을 가질 틈이 없었을 것이다.) 간호사들은 한참 동안 내 병실에 들어오지 않거나 들어오더라도 빠르게 무언가를 하고 나가버리는 바람에, 이젠 춥다고 아이스팩을 치워달라고 표현할 틈이 없었다. 게다가, 몸 안에 갇혀있는 나는 그새 사회적 체면을 되찾아버렸는지, 덥다고 난리를 쳐놓고 또 몇 분 만에 춥다고 말하는 것이 민망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냥 추운 것을 참고 간호사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곤 했다. 그렇게 아이스팩을 가슴과 배에 얹은 채로 잠들게 되면, 몸이 너무 차가워서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면서 누군가 내 몸을 얼음물 안에 담근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럴 때면 ‘아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렇게 점점 몸이 추워지다가 영영 잠에서 깨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 내 안에서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에이, 이런 아이스팩 정도로 어떻게 죽니?’


그러나 또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아니, 우리 작은 이모부, 외할아버지도 생각지 못한 순간에 하늘나라로 가셨잖아. 나도 그럴 수 있잖아.’


나는 가만히 누워, 우리 작은 이모부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엄마가 전해준 순간, 병원 장례식장에 가서 이모부 사진을 보고 로비에 그냥 앉아 울어버렸던 순간, 입관할 때 사촌동생의 오열하는 모습과 함께 우리 어린 딸과 남편을 떠올렸다.


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지금의 남편과 익산까지 같이 갔던 날, 눈이 벌게져서 날 맞아준 엄마와 이모, 삼촌들, 상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멍하니 할아버지 사진과 울다 지친 할머니를 번갈아 보던 때와 함께 엄마와 아빠를 떠올렸다.


이대로 내가 하늘에 가서 내가 정말 사랑했던 외할머니를 만나면, 외할머니는 뭐라고 하실까 상상도 했다.


‘왜 벌써 왔니, 어서 가라. 다시 가.’


그리고 이어 떠오르는 엄마 아빠 얼굴.


그러면서 이렇게 죽을 순 없다는 마음으로 묶여있는 손과 굳어버린 다리를 움직이며, 아이스팩을 치워보려 노력했다. 아이스팩을 치우지 못했을 땐,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우습게도, 이때 내 상태는 제일 악화된 상태를 넘어서고 점차 회복하고 있는 희망적인 시기였다.


그러니까, 어쩌면 내가 죽음과 가장 가까웠을 때에는 그것을 떠올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고, 비로소 죽음을 떠올렸을 땐 이미 죽음과 멀어져 가고 있을 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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