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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름

나를 버티게 해 준 힘

by 구름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열흘 즈음이 지나고, 스테로이드의 약효가 조금씩 보이자,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의식을 되찾은 뒤, 나는 남편이 중환자실 면회를 하루에 한 번 온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몇 시쯤 오는 건지, 오전인지 오후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남편이 올 때는 의사나 간호사와는 달리 ‘쿵 드르륵’ 소리가 나지 않았다. 처음엔 내가 눈을 뜨지 못해, 남편이 눈꺼풀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고 한다. 남편이 간신히 들어 올린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내 시야에는 마스크를 써서 눈 밖에 보이지 않는 남편이 가득 들어왔다. 회사에서 바로 온 건지 정장 차림인 것 같았다. 하얀 조명이 남편의 머리 뒤에 있어서, 마치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영화 브루스올마이티에 나오는 “신” 같았달까. 나는 지금도 그 장면이 몹시 ‘홀리’했다고 말하곤 한다.)

의식을 되찾았지만 몸은 여전히 마비되어 있었던 나는 하루종일 대부분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남편이 잠깐 오는 이 시간을 기다리며 버틸 수 있었다.


기억이 모두 뒤섞여서 시간 순서를 알 순 없지만, 남편은 매일 면회를 와서 나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었다. 이제 안심하라고, 자기가 다 알아서 한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해주고, 이제 바닥을 찍은 거라 좋아질 일만 남았다고 주치의가 말했다고 했다. 아이도 잘 지내고 있고, 맘대로 아이의 학원 스케줄을 다 바꿨으니 그냥 알고 있으라고 너스레를 떨며, 특유의 장난기 서린 목소리로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전날 밤 아이랑 크게 싸웠다고 했다. 어떤 날은 코털이 너무 많이 보인다며, 중환자실에서 나오면 코털 좀 다듬어야겠다고 우스갯소리도 했다.


난 보통 그 얘기들을 듣고 웃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하고 싸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평소와 같이 웃으며, “왜 그랬어, 싸우지 마. 사이좋게 지내.” 하고 말하고, 실없는 농담을 들었을 땐 킥킥하고 웃기도 했다. 그리고 남편의 말투와 그 내용들이 여전히 예전 같아 마음 한 켠으로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남편에게 들어보니, 대부분의 면회 시간에 남편이 본 나의 반응은 그저 “어”하는 신음 소리를 내거나 손을 조금 움직이는 정도였다고 한다. 그마저도 자유 의지로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고 하니, 생각할수록 정말 신기한 병이다.


어떤 날은 남편이 아이의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어 그 동영상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이의 “사랑해요, 빨리 와. 보고 싶어. 끝~” 하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 딸, 소중한 나의 아이, 나의 은우.


내가 울음을 터뜨리자, 남편이 아이는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며 영상을 여러 번 재생해 줬다. 그 목소리가 귓가에 선하여 아이가 정말 보고 싶었다. 갑자기 책에서만 보던 119 구급대원들과 함께 병원에 가더니, 집에 며칠 째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아이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유치원은 잘 다닐까, 얼마나 불안할까. 사실 이런 걱정들은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당시에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순수하게, '내 아이가 보고 싶다. 그립다. 슬프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뒤로 나는 검사를 위해 중환자실 밖으로 이동하거나 할 때, 다른 어린아이의 목소리 비슷한 것만 들려도 눈물이 핑 돌았다.


일반병동으로 옮기고 나서 남편이 전해주길, 아이의 영상을 보여준 것이 이 날이 처음이 아니었다고 했다. 맨 처음 보여줬을 때는 나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했다. 아마 내가 꿈속을 헤매고 있었을 때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발병한 지 1달 뒤 재활병원으로 옮기고 나서야 난 이 영상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처음에 남편은 이 영상을 아무 설명 없이 보여주었다. 영상 속 아이는 누워서 아빠의 안경을 장난스레 쓰고는, 특유의 꾸러기 웃음을 지으며 “사랑해요, 빨리 와. 보고 싶어. 끝 ~” 하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 순간 내가 당시 중환자실에 누워 듣고 울음을 터뜨렸던 영상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아이의 목소리는 내 투병생활 내내 귓가에 생생했고, 짠했고, 슬펐다. 그 슬픔이 중환자실에서의 내가 빨리 회복해서 일반병동으로 옮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남편이 면회가 끝나고 떠나고 나면, 그때부터 긴긴 싸움이 시작되는 기분이 들었다. 중환자실의 하루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이 길었다. 그런 환자의 기분을 알았던 것인지, 중환자실 선임 간호사는 남편에게 여러 장의 가족사진을 인쇄해서 가져오라고 했다. 가족이 정말 큰 힘이 된다는 말도 함께 했다.


남편은 바로 다음 날 여러 장의 가족사진을 인쇄해 왔다. 아프기 직전 다 같이 떠난 홍콩 여행 때 찍은 우리 세 식구의 셀카, 내가 찍어준 아이 사진들. 남편과 간호사는 내가 볼 수 있도록 눈앞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인쇄한 A4용지를 보여주며, 어떤 사진을 침대 위에 걸어놓을까 하고 나에게 질문했다. 역시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면회시간이 끝나 남편은 다시 회사로 떠나고, 간호사는 그중 우리 세 식구의 얼굴이 가장 크게 잘 나온 홍콩 여행 사진을 투명한 클리어파일 맨 앞에 끼워 내가 누워서도 그 사진을 볼 수 있도록 걸어주었다. 병실에 오는 간호사들은 그 사진을 보고 "아이가 귀엽다" "가족이 모두 닮았다" "아이 아빠가 참 잘생겼다" 같은 칭찬의 말을 해주었다. 난 쑥스러워서 웃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억지로 눈을 떠 흐릿하게 보이는 사진을 다시 한번 쳐다보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선임 간호사 역시 “어서 힘내서 딸을 만나러 가야죠.” 하는 응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걸며 다른 간호사들에게 ‘모성애’에 대해 얘기했다. 가족과 모성애가 회복에 정말 중요한 동기부여라고 했다. 그러나 난 모성애가 그리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넘치는 편도 아니고, 사실 사진을 보며 아이나 가족이 그리워 우는 것도 아니었고, 빨리 회복해야지 하는 다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선임 간호사의 말대로 사진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졌고, 그 평안함으로 긴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아프기 직전, 나는 종종 쓰던 블로그 일기에 이런 기록을 했었다. 어떨 땐 가족이 짐이 되기도 하고 벗어나고 싶은 굴레가 되기도 하겠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서로 힘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사실 당시 내가 아직은 어린 아이에게 전부가 되어버린 '엄마'라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어느 순간에는 부담스럽고 버겁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 생각을 반성하면서도 앞으로는 아이에게 내가 큰 힘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서 쓴 글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아이가 스스로 잘 견뎌줌으로써 나, 남편, 가족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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