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망은 계속된다
3월 23일 금요일
이 날짜와 요일을 내가 유난히 정확히 인지하게 된 이유는, 이 날 면회를 온 남편이 병원 규칙상 주말 동안 중환자실 면회가 되지 않아 2일 동안 못 보는 것이 걱정되었는지, 여러 번 나에게 이틀 뒤 월요일에 다시 면회올 거니까 조금만 더 참으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중환자실에서 거의 남편 얼굴의 등장을 기다리는 하루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주말에 남편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정말 슬펐다. 하룻밤만으로도 버티기 힘든데, 주말 내내라니…
그러고 나서 남편은 옆에 서 있던 선임 간호사에게, 지금 내가 마비되어 있는 몸속에 온전히 의식이 있고 점점 좋아지고 있는 거라면 생지옥이 아니겠냐며 언제쯤 일반병실로 갈 수 있는 건지 물었다. 선임 간호사는 특유의 친절한 말투로 아직은 좀 이르다며, 응급 상황이 발생할 수 있고 섬망 증상도 아직 조금씩 있기 때문에 좀 더 중환자실에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때 난 비로소 내가 꾼 꿈들, 그리고 그 꿈들이 현실과 뒤섞여서 이상하다고 느낀 것들이 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은 ‘어제 같은’ 상황을 내가 다 알고 있는 거라면, 너무 괴로울 것 같아서 물었다고 다시 한번 덧붙였다. 나는 속으로 ‘어제 어떤 일이 있었지..’라고 생각했으나 묻진 못했다. 여전히 질문을 할 기력도 없고 입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그 ‘어제’라고 칭해진 그 시각, 내가 느낀 것들이 어쩌면 현실이 아니고 섬망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좀 무서워졌기 때문이었다.
'어제' 밤, 다른 날과 같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만히 누워 귀로 소리를 듣는 것뿐이었다. 나는 2번 병실 밖의 상황에 엄청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간호사들이 누군가를 보고 엄청 귀엽다며 칭찬을 했다. 그 대상은 아마도 옆 병실 누군가에게 면회를 온 어린이였던 것 같다. 그리고 선임 간호사가 나에게도 여러 번 말했던 ‘모성애’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며, 병실 밖 사무 공간에 간호사들을 모아 그 어린이와 입원해 있는 어린이의 가족을 위해 작은 파티(?)를 하고 있었다. 풍선도 달고 귀여운 케이크도 준비했다.
순간 갑자기 나는 다리가 너무 무겁고 몸은 너무 뜨거워져 견딜 수 없어졌다. 이내 밖에 있는 간호사들에게 내 불편함을 호소하느라 마구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마 간호사들은 그 파티에 집중하느라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내 몸부림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참을 나 혼자 땀 흘리며 몸부림친 뒤에야, 간호사들이 들어왔고 난 간신히 “너무 덥다”는 의사표현을 전달하여, 가슴과 배에 아이스팩을 올리고 나서 진정할 수 있었다. 간호사들은 내 옆에서 이런 말을 서로 나눴다.
“아이가 다 느꼈대? 알고 있대?”
그런데 이 말이 뭔가 아이가 부정적인 것을 눈치챈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고작 덥다고 난리 쳐서 그 아이의 파티를 망쳤나..’라는 생각을 하며 잠들었던 것이다.
섬망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은 그냥 내가 혼자 상상한 것이었구나 싶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섬망 증상은 간헐적이긴 했지만 주말까지 이어졌다.
주말 내내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어느 순간 씻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히면, 간호사들이 드라이 샴푸로 내 머리를 감겨줘야 하는데 그 순서가 돌아오지 않아 답답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다 또 어느 순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면, 간호사들이 환자들이 잠든 깊은 밤 중환자실 어디선가 야식을 시켜 먹고 냄새를 솔솔 풍겨 심술이 나기도 했다. 당시에는 섬망인지도 몰랐다. 의식을 되찾고 사지 마비가 서서히 돌아오는 시기였는데도, 머릿속에는 현실과 꿈이 뒤섞인 상태가 계속되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섬망 증상은 보통 내가 무언가를 원하고, 그것이 잘 풀리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우습게도 내가 원하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것이 해소되지 않는 불만이 너무나도 커다란 분노, 괴로움, 절망, 슬픔의 감정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