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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Apr 17. 2021

검은색에 관하여 (2)

리틀 블랙 드레스

꿈을 많이 꾸는 편이다. 그런데 어떤 꿈은 너무 이상하고 이상하고 또 이상했다.

나는 깨어나서도 한참 동안 잔상을 떨쳐버리기 힘들 만큼 생생하고 강렬한 꿈을 어린 시절부터 종종 꾸었다. 그런 꿈은 현실의 나에게 달라붙어 일상의 기분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내 꿈은 대체로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같은 분위기였다.


성인이 된 이후 어느 날, 꿈을 기록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토록 이상한 스토리라면 소설의 소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깨어나면 바로 기록할 수 있도록 꿈노트와 필기구를 침대 옆에 두고 잤다. 그랬더니 낯설고 강렬한 꿈은 한 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꿈은 그렇다. 잡으려 하면 도망간다.


꿈을 기록하려 애쓰면서 알게 된 점은 강렬한 꿈은 대체로 컬러였는데, 때때로 흑백 꿈을 꾸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컬러 꿈과 흑백 꿈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니, 컬러 꿈은 얕은 수면 단계에서 자율신경계의 각성이 일어나며 꾸기 때문에  생생히 기억한다고 한다. 반면 흑백 꿈은 렘수면 단계에서 이루어져 한두 시간 뒤면 잊어버리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즉 깊은 수면에서 렘수면 단계로 넘어가서 꿈을 꾸는 것이 건강하고 효과적인 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의 흑백 꿈들은 어렴풋이 기억나거나 기억하려 애써도 금세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상하고 생생한 컬러 꿈이 자주 없으니 좀 허전한 마음마저 든다. 그렇다고 꿈을 꾸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흑백 꿈들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사르르 없어진다. 흑백 꿈은 내 의식과 무의식을 사라지게 만들어 나를 비우는 것 같다. 나의 어떤 부분을 텅 비운다.  




비어있고 동시에 가득 차 있는 것

서구 중세인들에게 예술의 주요 과제는 형태보다 빛을 어떻게 미적으로 표현하는가의 문제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빛을 눈에 보이게 표현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빛과 색을 하나의 감각으로 인식하고 색은 빛이라고 여겼다. 태양이 언제나 하늘에 존재하듯 색은 일상 곳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중세인의 관점으로 본다면 검은색은 빛의 부재를 뜻하게 되므로 색이 아닌 셈이다. 텅 비어 있는 것.


일본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Yohji Yamamoto)는 블랙 패션의 시인이라고 불린다. 서정적이거나 공격적이고, 반항적이거나 낭만적이며, 침울하고도 매혹적인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여왔지만 언제나 검은색을 고집한다. 요지 야마모토는 검은색에 중독되어 40여 년간 블랙의 미학을 패션을 선보인데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블랙은 겸허하고 동시에 오만하다.
- 요지 야마모토 -


 블랙은 일상적이고 쉬운 컬러이지만 신비로운 힘이 있다. 모든 빛을 삼켜버리고 사물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한다. 그리고 블랙 패션은 사람을 압도하는 횡포를 부리지 않지만, 또한 착용자가 그 위에 군림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것 같다. 착용자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긴장을 유지한다. 비어 있는 것 같지만 가득 차 있는 것.


블랙 성애자 요지 야마모토의 2020 FW 컬렉션 룩북 이미지 (출처: theyohjiyamamoto.com)




블랙 패션이라는 혁신

오늘날 샤넬은 클래식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지만, 백 년 전에는 도전정신으로 기존 질서를 뒤집는 혁신가였다. 샤넬은 모더니즘이 출범했던 시기에 현대적 라이프 스타일을 선도할 여러 가지 실험적인 디자인들을 선보였다. 또한 당당하고 활동적인 모던 여성상을 자기 자신을 통해 표현하며 '스타일'의 의미를 부각했다. 발상의 전환으로 저지(jersey) 소재를 사용한 스포티브 슈트, 모던과 추상의 극치를 보여줬던 No.5의 패키지와 네이밍, 관습을 깨고 인조보석을 사용한 코스튬 주얼리 등 패션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나는 그중에서도 샤넬의 가장 큰 혁신성은 여성 패션에서 검은색의 위상을 높였다는 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서양 여성 복식에서 검은색이 전면에 등장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유럽에서 검은색은 상복으로 쓰였던 색이었기에 일상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코코 샤넬은 검은색의 미적 가치를 발견하고 여성 일상복에 도입했다.

1926년 발표된 샤넬의 검정 드레스는 아르데코 풍의 간결하고 직선적인 형태였고 이는 곧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과도한 장식이 배제된 간결하고 실용적인 이 드레스는 검은색 만으로도 얼마나 우아할 수 있는지 방증했고, 검은색이 지닌 현대적 감각을 부각했다. 샤넬은 검은색이 표준화와 경제적으로 완벽한 복장을 위한 유일한 색이라고 말했다.


블랙은 표준화와 경제적 완벽을 위한 복장에 적합한 유일한 색이다.
- 가브리엘 샤넬 -


이 단순하고 혁신적인 드레스에 블랙을 적용한 이유에 대해서, 샤넬은 후에 또 이렇게 설명했다. '블랙은 강하다. 주변의 모든 다른 것들을 지운다.'


1926년 10월호 Vogue에 실린 샤넬의 오리지널 LBD (출처: Vogue.fr)
LBD를 입은 Coco Chanel. 1935년 (ⓒ Rex Features  출처: marieclaire.co.uk)




리틀 블랙 드레스

단순하고 우아한 이 드레스는 '리틀 블랙 드레스(Little black dress, LBD)'라 불렸고, 미국 패션잡지 보그(Vogue)는 포드(Ford) 사의 모델-T에 비유하며 대량 생산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모든 취향의 여성들을 위한 유니폼이 될 것이다'라는 보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샤넬의 LBD는 단순한 형태로 인해 제작이 쉬웠기 때문에 제조업자들에 의해 디자인 복제가 되고 생산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리틀 블랙 드레스의 유행을 더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고, 여성들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우아한 스타일을 만들 수 있는 LBD에 열광했다.

샤넬은 평생 동안 남성복의 요소를 여성복에 도입해 디자인 함으로써 남성복과 여성복의 경계를 뛰어넘고자 했다. 그런데 LBD는 계층의 경계선까지 허무는 획기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대량 복제된 LBD는 모든 계층에서 접근 가능한 다양한 소재와 가격대로 공급되었기 때문에, 이제 옷차림 만으로는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가늠하기 힘들게 된 것이다.     

샤넬 이후로 LBD는 많은 디자이너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재현되었다. 1950년대에 이르러 오트 쿠튀르(Haute-Couture) 전성시대에는 크리스찬 디올,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위베르 지방시 등 여러 쿠튀리에들이 블랙의 절제된 우아함을 다시 한번 유행시켰고, LBD는 패션계의 클래식 아이템으로 자리 잡는다.

LBD는 낮이든 밤이든 어떤 상황에도 어울릴 수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입을 수 있고, 체형의 결점을 감춰주며 자주 꺼내 입어도 사람들이 알아채기 어렵다. 그런 까닭에 크리스찬 디올은 LBD를 예찬하여 이렇게 말했다.


리틀 블랙 드레스는 모든 여성들의 가장 필수적인 아이템이다.
- 크리스찬 디올 -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지방시의 LBD를 입고 있는 오드리 헵번. LBD는 1950년대 세련된 취향을 가진 여성들의 유니폼이 되었다.






모든 색은 저마다의 역사와 상징이 있고 다양한 함의들을 지니고 있다. 모호하거나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대와 문화에 따라 색에 대한 평가와 해석이 다양하다. 그런데 오직 검은색의 의미만은 언제나 분명했다. 좋고도 나쁜.

블랙 패션도 그렇다. 침울하고 매혹적인. 비어있고 가득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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