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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Feb 02. 2021

하이힐 단상

 너와 함께라면 어쩐지 더 근사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라이프 스타일 트렌드가 변화하며 하이힐은 우리의 일상에서 점차 잊혀가고 있다. 일반 회사원들 조차도 구두 대신 운동화를 즐겨 신는 캐주얼라이징(casualizing)이 보편화되면서 이제는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오히려 드물어졌다.

나도 그렇다. 코로나 이후로 비대면 방식이 업무로 파고 들어온 탓에 외출도 드물어졌지만, 어쩌다 차려입고 신발장 앞에서 착장을 마무리하기 위한 선택의 기로에 서면 항상  캐주얼한 쪽으로 손이 간다. 이를테면 편하게 입은 날엔 러닝 운동화, 트렌디하게 입은 날엔 청키  로퍼, 클래식하게 입은 날엔 캔버스 스니커즈를 선택하는 식이다. 착장에 '요즘 느낌' 내고 싶은 의도도 있지만, 나이가 드니 하이힐의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의 체력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이힐에는 손대지 않은지 벌써 몇 년째다. 



하이힐, 잘 자고 있니?

신발장 속에서 빛바래 가는 하이힐들을 보면 아련하고 풋풋한 시간들이 떠올라 마치 헤어진 옛 연인 같다.

그래, 그땐 이 신발을 신고 거기에 갔었지. 저 신발은 그곳에서 일할 때  즐겨 신었었는데. 아 그때는 추운 날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마냥 좋았지... 등등 지금은 소원해진 하이힐들과 얽힌 시간, 인물, 장소, 에피소드가 떠오르고 나는 그때의 감정들을 추억한다.

타임슬립의 요술을 부리는 나의 신발장 맨 꼭대기에는 심지어 한 번도 개시하지 못한 고가의 하이힐 수 켤레가 박스채로 고이 잠자고 있다.  정말 손 안 가는 신발은 버리거나 그중 꽤 쓸만한 건 누군가에게 주어 많이 처분했다. 하지만 구입 당시 지불했던 가격을 생각했을 때 가슴이 쓰려 도저히 떠나보낼 수 없는 것들은 납골함처럼 수년 째 이렇게 모시고 있다.

(제일 오래된 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Saint Laurent앞에 Yves가 붙어있던 시절 제품으로 14년째 영면 중이신 14cm 높이의 은색 가보시 힐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한 엄청난 높이의 힐, 과도하게 튀는 컬러, 스크래치와 오염에 민감한 소재, 어딘지 모르게 옛날 감성, 너무 여성스러운 느낌.. 등등 지금 신지 못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고 구체적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가 평소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자주 신지 않을 것이 뻔한데, 굳이 그렇게 구입을 강행했던 이유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무언가에 홀렸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그냥 그 신발을 신으면 내가 더 근사한 사람이 될 것 같은 예감.

그런 말도 안 되는 예감에 휩싸였던 것 같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근사한 사람이 아닌 이유는 저 하이힐들을 신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못났지만, 이렇게 핑계대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아무튼 분명한 건 패션은 태도를 변화시는데, 그중 하이힐은 매우 드라마틱한 힘이 있다는 것이다.




신발은 당신의 몸짓과 태도를 변화시킨다.
신발은 당신을 육체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들어 올린다.  
Shoes transform your body language and attitude.
They lift you physically and emotionally.



크리스찬 루부탱의 레드솔 펌프스



강렬한 레드 솔(red sol, 붉은 구두 바닥)로 하이패션의 슈즈를 평정한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은 우리가 신발을 신었을 때 즉각적으로 얻게 되는 마법과 같은 현상을 위와 같이 말했다.




하이힐의 마법

하이힐을 착용하면서 시각적으로 변화된 신체 모습은 우리의 마음도 함께 변화시킨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결과는 의상 심리 분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이힐은 중력으로부터 우리의 뒤꿈치를 들어 올려 다리를 더 길어 보이게 만들고 몸의 곡선을 이상적 사회통념에 더욱 가깝게 만든다. 이를 통해 착용자는 자신감과 같은 자신에 대한 긍정적 감정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연구결과에 따르면 하이힐의 착용은 여성성의 향상을 표현함으로써 여성적 우월감을 갖게 한다. 흥미로운 점은 하이힐이 갖게 하는 여성적 우월감이란 관능미와 정숙성의 상반된 속성을 동시에 내포한다는 것이다.

높은 하이힐이 주는 불편함과 발바닥의 고통을 감수한다면 조금 더 문화적 이상미를 지닌 여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은 19세기 서양의 코르셋과 비슷한 속성을 지닌다. 코르셋은 이상적인 허리 사이즈를 만들기 위해 고통스럽게 허리를 졸라매야 했지만 남성에게 여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측면이 있었다. 때문에 코르셋은 여성의 매력, 즉 관능미를 과시하는 동시에 중상류층 여성들의 정숙미를 상징하는 아이템이기도 했다.


19세기 여성 신발 (출처: The Bata Shoe Musuem)


그렇다면 하이힐은 착용자가 아닌 관찰자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일까?

  

2014년 프랑스 남 브르타뉴 대학(Université de Bretagne Sud)의 니콜라 게겐(Nicolas Guéguen) 교수 연구팀은 단화보다는 하이힐을 신은 여성에게 남성들이 더 호의적이라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동일한 키와 신체조건을 가진 여성이 장갑을 떨어뜨렸을 때, 하이힐을 신은 여성에게는 93%의 남성이 장갑을 돌려주려고 쫓아간 반면 미들힐을 신은 여성에게는 52%, 단화를 신은 여성에게는 43%만이 장갑을 집어줬다. 또한 여성이 바에 혼자 있을 경우, 낮은 굽의 신발을 착용한 여성보다 하이힐을 신은 여성에게 말을 건네는 남성의 수는 2배 증가했다.

게겐 교수는 이러한 연구결과에 대해 하이힐을 신었을 때의 걸음걸이와 자세가 더욱 여성스럽게 보이는 것을 원인으로 보고, 매력적인 여성의 곁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심리라고 분석했다.




하이힐은 감정을 증폭시킨다

하이힐의 현대적 정의는 발꿈치가 높게 들어 올려진 여성용 신발을 뜻하지만, 복식사에서는 높은 굽을 가진 신발로 용어의 범위를 확장하여 그 유래를 찾는다. 그렇게 볼 때 하이힐의 시초는 기원전 10세기 고대 그리스의 코서너스(Lat.: cothurnus,  Greek: kothornos)라고 할 수 있다. (관점에 따라 9세기 페르시아 기수의 신발을 하이힐의 시초라 하기도 한다.)  '비극'을 뜻하는 코서너스는 멀리서도 배우들이 돋보이도록 높은 힐을 덧댄 신발이었다. 희극보다 복잡한 플롯을 지닌 비극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관객들을 몰입시키기 위해 코서너스를 신었고, 중요한 배역일수록 굽의 높이는 점점 높아졌다.


고대 그리스의 극장 구조와 코서너스 (좌. 출처: greekhighdefinition.com 우.출처: wikimedia.org)


신체가 확장되면 움직임이 커지고 대상의 시인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몸의 언어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강조되는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 침팬지가 가슴을 부풀려 자신의 힘을 과시하거나 수컷 공작새가 꼬리를 펼쳐 구애하는 것이 그러하다. 부풀린 가슴은 더 큰 위용을, 펼쳐진 꼬리는 더 큰 매력을 전달한다.


그렇다면 현대 패션에서 하이힐로 확대된 신체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걸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이힐은 신체를 확장하고 긴장시킨다. 그리고 어떤 몸의 언어를 강조한다. (패션 아이템으로서의 하이힐은 역사 속에서 권력의 상징 또는 페티시즘의 아이콘으로 기능해 왔다. 그러한 관점들은 다음에 논하려 한다.)

이러한 속성을 본인의 이미지 메이킹에 잘 활용했던 사례로는 마릴린 먼로를 꼽을 수 있다.   


먼로 워크(Monroe Walk)


마릴린 먼로는 걸을 때 엉덩이를 흔들고 반대 방향으로 어깨와 가슴을 크게 움직이는 걸음걸이로 유명했다. '먼로 워크(Monroe Walk)'라 불린 특유의 이 걸음걸이는 마릴린 먼로를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섹스 심벌로 만들었다.


페라가모가 마릴린 먼로의 스틸레토를 제작할 때 사용하던 구두 제작 틀(라스트). (출처: Museo Salvatore Ferragamo)

마릴린 먼로는 오드리 헵번, 그레이스 켈리, 소피아 로렌 등과 함께 페라가모의 충성스러운 고객이었는데, 특히 페라가모의 4인치 스틸레토 힐을 애용했다. 영화 <7년 만의 외출(The Seven Year Itch). 1955>, <뜨거운 것이 좋아(Some Like It Hot). 1959> 등의 유명한 신에서 페라가모를 신은 마릴린 먼로를 볼 수 있다.

 

마릴린 먼로는 신체 반동이 큰 먼로 워크를 완성하기 위해 한쪽 굽을 1/4인치 잘라냈다고 한다.









자, 오늘은 어떤 신발을 선택해볼까?

지구로부터 나를 얼마만큼 들어 올릴 것이고, 그로 인해 증폭시키고 싶은 나의 존재 메시지는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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