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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Feb 20. 2021

모자장수는 왜 미치광이가 되었나

계층의 경계선이 된 모자

코로나 시국의 겨울철 모자는 안 감은 머리나 부은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된다. 물론 젊은 멋쟁이들은 옷차림에 어울리는 베레, 버킷 햇, 비니 등을 적절히 잘 착용해 스타일의 완성도를 높이겠지만, 요즘의 나는 주로 은폐하고 위장하는 용도로 모자를 쓰고 있다. 그 의도가 무엇이든 오늘날의 일반인들에게 모자는 특별한 스타일을 위한 아이템이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서구 사회에서 모자는 외출 필수품이었다. 다시 말해 모자를 안 쓴 사람 찾기가 더 힘들었다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전혀 공감가지 않는 말이지만, 조지 버나드 쇼는 여성들이 갖춰야 할 옷차림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If a woman rebels against high-heeled shoes,
she should take care to do it in a very smart hat.
만약 하이힐을 거부하려는 여성이 있다면,
조심스럽게 실행에 옮기되 아주 멋진 모자를 써야 할 것이다. 

-George Bernard Shaw(1856~1950)-



If a woman rebels against high-heeled shoes, she should take care to do it in a very smart 

모자, 계층의 경계선

모자는 동양과 서양에서 수 세기 동안 착용자의 지위를 나타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지위가 높을수록 장식적이고 거추장스러운 모자를, 하층민일수록 작고 심플한 모자를 착용했다. 쉽게 말하자면 근로 소득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일하기 편하도록 활동성을 고려해 간소한 모자를 착용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더 장식적이고 더 거추장스러운 모자를 쓴 사람일수록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에게 머리를 조아릴 필요가 없는 계층일 확률이 크다.

20세기 초까지 모자의 형태와 크기는 사회적 우열을 가리고 계급 표식의 기능을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자는 코트나 드레스보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 다른 계층의 차림새를 모방하고 경계를 허물기 수월하다. 그러나 모자는 사회 계급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는 경계선과 같은 역할을 했다. 특정한 모자는 특정한 계층의 전유물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특히 19세기 서구에서는 모든 계층이 모자를 착용했고, 남자들은 모자를 쓰지 않고 외출하는 것이 옷을 입지 않고 거리로 나가는 것만큼 이상한 일이었기에 항상 모자를 착용했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실내에서조차 하루 종일 모자를 쓰고 있었고, 시위 중인 공장 노동자는 물론 도로를 공사 중인 보수 공들도 모자를 쓰고 일했고, 넝마주이도 모자를 쓰고 쓰레기를 주웠으며 시골 농부도 모자를 쓰고 농사를 지었다.    

미국 해양선 기관사들, 1982 (출처: washington.edu)
19세기 말의 노동자들  (출처: laborpress.org)





가엾은 비버에게 애도를

19세기 중반 실크로 만든 실크햇이 유행하기 전까지 약 300여 년간 최고의 모자 재료는 비버였다. 16세기 후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비버 가죽 모자가 크게 유행했고, 17세기에는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비버 모피나 비버 털 펠트로 만든 비버 햇(Beaver hat)이 크게 유행했다.  서구인들은 비버를 얻기 위해 북아메리카로 몰려가 남획을 했고, 늘 그렇듯 누군가는 이 틈바구니에서 모피 장사로 재벌이 되었다. American Fur Company, Hudson's Bay Company 등은 이렇게 북미 원주민과 비버 모피 거래를 통해 탄생했다.

패션에 매우 민감했던 영국의 찰스 1세는 그의 아내 헨리에타 마리아(Herietta Maria, 1609-1669)와 함께 당시 유행의 첨단에 있던 패션 리더였다. 이러한 멋쟁이 찰스 1세가 귀족들에게 비버 햇을 쓰도록 하는 복제령을 공표하면서 무수한 비버들은 멸종 직전까지 살육되었다.

비버 햇을 쓴 멋쟁이 찰스 1세 (Anthomy van Dyck c.1635, Louvere Museum © RMN-Grand Palais)

찰스 1세와 마리에타. 사실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둘은 크게 축복받지 못한 커플이었다. 의회와 귀족들이 프랑스에서 가톨릭 신자로 자란 헨리에타를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Lovelock 헤어의 찰스 1세 (Sir Antony van Dyck c.1635-6, Royal Collection)

 하지만 찰스 1세는 아내를 각종 모함으로부터 지켰고, 헨리에타는 새로운 문학과 예술로 남편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서로를 지지하는 든든한 동반자가 되었다. 패션 취향만큼이나 잘 맞았던 찰스 1세와 헨리에타는 알콩달콩 많은 자녀를 낳았다. 

찰스 1세 초상화의 헤어스타일을 잘 보면 좌. 우 길이가 다르다. 당시 사랑의 징표로 머리카락을 잘라서 주던 관습(lovelock) 때문인데, 기록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지만 다른 여자가 아닌 그의 아내에게 준 것이라고 믿고 싶다.    



사치스러운 의복과 장식으로 패션을 선도했던 찰스 1세는 의회와 첨예한 갈등 끝에 처형당한다. 물론 왕정파와 의회파 사이 갈등의 원인은 패션뿐만 아니라 군사 통치권, 세금 결정권 등의 다른 정치적 이슈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상이 다르면 꼴도 보기 싫은 것이 당연지사. 당시 의회파를 이끌던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옹호하던 왕정파의 긴 머리를 낡아 빠진 썩은 기사도(Chivalry)의 유물이라고 비난했다. 한편 크롬웰을 비롯한 청교도들은 비교적 짧고 둥근 머리를 고수했기 때문에 의회파를 'Roundhead'라 하고, 찰스 1세를 지지하던 긴 머리의 왕정파를 'Cavalier'라고 부르게 된다. 아무튼 확실한 건 머리가 긴 왕정파든 머리가 짧은 의회파든, 이들은 모두 모자를 썼고, 유행이 바뀌기 전까지 비버 햇의 착용을 멈추지 않았다.     

17세기 영국 내전 당시 뉴스에 실린 목판화. 긴 머리(왕정파)와 둥근 머리(의회파)의 싸움을 묘사하고 있다. (출처: cromwellmuseum.org)

    


 

미치광이 모자장수

비버 햇은 비버의 가죽이나 모피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비버 털을 펠트 상태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펠트란 동물성 단백질의 축융 성질을 이용하여 수분. 열. 압력을 가해 만든 피복 재료이다. 즉, 동물의 털을 비벼 빨고 두들겨 펴서 얇고 넓적한 천처럼 압착해서 만든 것이다. 

펠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우연히 수은 용액에 털을 담그면(carroting) 더 빨리 부드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모자 공장의 노동자(hatter)들은 최신 유행 모자를 오직 더 빨리 더 많이 만들기 위해 하루 종일 질산 수은 용액에 맨손을 담그고 비버 털을 빨아댔다. 수은을 입과 코로 들이마신 노동자들은 수은 중독으로 인해 극심한 피부병은 물론 신경계 이상 증세를 보였다. 손을 떨고, 말을 더듬고,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중얼거리는 치매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미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에 'mad as a hatter(모자장이 처럼 미친: 아주 미친)'이라는 관용어가 등장하고, 모자장이는 미치광이(mad hatter)라는 억울한 별명을 얻게 된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 1865)' 중 미치광이 모자장수 (일러스트 Tenniel. 출처: en.wikisource.org)




패션의 역사 속에서 유행은 때때로 누군가의 고통과 희생을 수반한 채 유지된다. 피복재료로 쓰이기 위해 도살되는 수많은 동물들, 열악한 패션 산업의 노동자들, 그리고 유행 아이템을 획득하고 사회적 인정을 받으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까지. 패션은 늘 모두에게 기쁨과 행복만을 주지 않는다. 

인간의 모자에 대한 집착은 이후로도 계속되었고 그 대상만 비버에서 왜가리와 백로로 옮겨갔을 뿐, 멋진 모자를 머리에 얹기 위한 동물 남획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1960년대에 이르러 젊은 베이비붐 세대가 문화를 주도하던 청춘시대(Swinging Sixties)가 도래하고 나서야 모자는 일상에서 사라지고, 격식이나 특별한 스타일을 위한 아이템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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