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라이프, 인간의 존재를 지우고 감금하는 무늬
인간의 역사에서 줄무늬는 어디에나 존재했다. 다만 인간이 줄무늬에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 편할 대로 해석하곤 한다. (온갖 악의적 의미가 덧 씌워진 중세의 줄무늬 이야기는 여기에 있다.)
현대 패션에서 줄무늬는 대담함, 경쾌함 등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클래식 아이템이다. 더욱이 몇 년 전 세인트 제임스 스트라이프 티셔츠가 '클론 템'으로 불릴 만큼 크게 유행한 탓에 많은 사람들이 줄무늬 옷 한 두 개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한때 악마의 무늬로 여겨지며 사회에서 배척된 사람들에게 강요했던 줄무늬를. 어째서 증오와 멸시가 아닌 다른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을까?
줄무늬의 이중적 의미
오랜 기간 서양 중세 역사와 상징학을 연구해온 미셸 파스투로(Michel Pastoureau) 교수는 스트라이프가 인테리어와 일상에 쓰이기 시작하면서 줄무늬에 대한 시각이 바뀌고 다양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 말한다. 더 엄밀히 말하면 중세 이후로 줄무늬는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전통적 의미 외에 또 다른 중립적 의미가 파생되어 발달해왔다. 중세시대에 문장(紋章, heraldry)이 크게 유행했는데, 멀리서도 눈에 띄도록 하기 위해 줄무늬의 시각적 구조를 차용했다. 특정 공동체나 가문을 구별하기 위한 기호로 쓰였던 문장은 컬러와 문양을 서로 대비시켜 시인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줄무늬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장을 다루는 학문에서는 이에 대해 줄무늬의 악의적 의미를 적용시키지 않는다.
만약 모든 줄무늬에 '사악한 존재에게 조종받아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증오와 멸시의 의미를 덧씌웠다면 바티칸 근위대의 복장이야말로 최대의 아이러니가 될 것이다. 기독교 최고 성전을 악마의 하수꾼 들이 지킨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줄무늬는 이처럼 이중적 의미를 지니며 발달했고 점진적으로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종속의 상징, 존재를 지우는 줄무늬
앞서 언급했듯이 서양 봉건시대의 줄무늬가 반드시 경멸이나 악마적인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천한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노예, 시종, 하인, 병사, 광대와 악사. 다시 말해 영주에게 은혜를 받고 있는 '아랫사람'들은 소속 가문의 색으로 분할된 옷을 입어 어딘가에 종속되어 있음을 상징했다. 하인들에게 줄무늬 옷을 제복처럼 입히는 문화가 15세기부터 16세기 중반 사이에 크게 유행하면서 줄무늬의 위상은 악마의 무늬에서 하인의 무늬로 크게 격상된 셈이다. 하인들은 줄무늬를 입는다는 인식은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근세를 거쳐 프랑스의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에는 하인들의 제복에 줄무늬가 사용되었고,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는 줄무늬 조끼가 시종과 관리인의 제복으로 채택되어 유럽 전역과 미국으로 퍼져나갔다.
줄무늬 옷이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에서 하인들로 옮겨간 현상에 대해 마쓰다 유키마사(松田行正)는 하인들이 실내 조도의 일부처럼 취급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근세에 이르러 줄무늬가 옷뿐만 아니라 커튼, 침구, 벽지, 타피스트리 등의 인테리어로 등장하면서 하인들은 그 속에서 눈에 띄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야 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줄무늬가 눈에 띄게 하는 기호로서 존재했다면 근세 이후 하인들의 줄무늬는 주변에 동화되어 존재를 희석하기 위한 장치가 되었다.
혁명의 이데올로기
18세기 말에 이르러 줄무늬는 뜻밖의 상징성을 얻게 된다. 줄무늬는 그 자체로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나타내게 되는데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이 큰 계기가 된다. 초기 아메리카 국기의 줄무늬는 미국이 영국에 종속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독립전쟁에 승리하며 그 의미는 완전히 뒤바뀐다. 동일한 줄무늬는 '예속'에서 '해방'으로 드라마틱한 의미 변화를 겪는다.
뒤이어 프랑스혁명에서 시민군에 의해 채택된 삼색휘장은 반 체제적 이데올로기를 상징하게 되었다. 프랑스혁명 정부는 삼색휘장을 새로운 체제의 성스러운 상징물로 여겼고, 이를 소홀히 여기면 반역자로 취급했다. 삼색휘장을 떼어 내거나 모독할 경우 엄중하고 가혹하게 처벌했고, 삼색 이외의 휘장을 사용하거나 판매하면 사형에 처했다. 줄무늬에 새로 새겨진 '혁명 정신'은 휘장뿐 아니라 패션과 결합하며 옷은 애국심을 고취하고 혁명이념을 선전하는 수단이 되었다. 혁명 세력은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줄무늬를 휘장에서 옷으로 확대해 입기 시작했고, 많은 시민들은 이를 추종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애국자임을 나타내고 혁명이념을 지지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줄무늬 옷을 입었던 것이다.
죄수복의 줄무늬, 자유의 박탈
서양 복식의 역사에서 흔히 떠올리는 줄무늬의 또 한 가지 쓰임새는 죄수복의 무늬이다. 영화 빠삐용 그리고 아우슈비츠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유대인의 이미지가 대표적일 것이다. 서구의 죄수복에 줄무늬가 사용되었던 동기와 의미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범죄자들을 일반적인 선량한 사람들로부터 배제하기 위한 표식이었다는 것에서 중세의 줄무늬와 일정 부분 통한다. 중세시대의 광인, 매춘부, 백정, 사형집행인 등에게 줄무늬를 입도록 하고 경멸의 의미를 덧씌운 것처럼, 죄수복의 줄무늬는 수치심을 유발하고 존엄을 훼손하는 기호였다.
죄수복에서 읽어낼 수 있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줄무늬가 자유의 박탈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광기의 역사(Histoire de la folie à l'âge classique)⟫에서 주장하듯 정상 질서 바깥에 있는 사회적 타자, 즉 광인들은 16세기 이전에는 멸시받을지언정 우리 사회 주변에 있었다. 그러나 이성 중심의 서구 문화는 광인들을 차츰 범죄자, 부랑자 들과 함께 감금하였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의 죗값을 '자유의 박탈'로 치르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줄무늬는 인간의 굴곡진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었다. 악마의 무늬에서 하인의 제복으로. 종속의 의미에서 해방의 의미로. 그리고 자신의 정치 이념을 증명하고 사회에서 배척당하지 않기 위한 표식으로. 또는 사회에서 배척하고자 하는 대상의 존엄을 훼손하는 기호로.
그러나 모든 줄무늬가 부정적 의미만 지닌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18세기에는 낭만의 표현으로 쓰이기도 했고, 19세기로 접어들어서는 젊고 건강한 이미지를 나타낸다. (스트라이프가 겪은 눈물 나는 수난의 역사 중 밝은 근대 스토리는 다음 기회에 쓰려한다.)
줄무늬는 그냥 줄무늬다. 인간이 그것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고, 지배와 처벌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세력을 모으고 선동하는 도구로 사용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