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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Feb 27. 2021

악마는 줄무늬를 입는다 (1)

스트라이프, 가장 낮은 곳에 새긴 무늬

살랑살랑 봄이 오는 기척이 오면 줄무늬 티셔츠를 입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특히 명도 차이가 큰 두 색상을 교차시켜 가로로 줄무늬를 만든 보더 스트라이프가(Border stripe) 유난히 더 많이 보인다. 특정 시기에 특정 패션 아이템이 지배적으로 채택되는 것을 우리는 '유행'이라고 부른다. 비록 그 시작이 패션 회사들의 마케팅 전략으로 인한 결과였을지라도, 다수에게 반복적으로 꾸준히 채택된다면 '클래식'이 된다. 이제 스트라이프 패턴은 마치 봄. 여름의 클래식처럼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계절에 스트라이프를 찾는 까닭은 그 패턴에서 느껴지는 색상 배색의 경쾌함과 반복 무늬의 시각적 리듬감이 날씨만큼 가벼워진 감정과 어울리기 때문이리라.




저주받은 악마의 무늬

오늘날 경쾌함과 대담함의 상징인 스트라이프는 사실 중세 유럽에서 불경스러운 것, 저주받은 악마의 무늬로 간주되었다. 


Veste, quae ex doubus texta est, non indueris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니


이스라엘인의 종교 율법 책 레위기(Levititus) 19장에는 이와 같이 특정 무늬를 금하고 있다. 레위기는 죄악된 세상의 인간이 하나님에게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지켜야 하는 여러 가지 율법을 기록한 것이다. '두 재료'라는 의미에 대한 해석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중세인들은 '두 색상'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즉 두 가지 색상으로 만든 줄무늬 옷을 입지 말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줄무늬를 금기시하게 된 원인 연구에 학자들은 두 가지 측면으로 접근한다. 

첫 번째는 이종교에 대한 혐오이다. 사막이 많은 이슬람권에서는 멀리서도 서로를 식별하고 소속을 쉽게 알아채기 위해 눈에 띄는 줄무늬를 흔히 입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종교의식에도 줄무늬 옷을 종종 입었고, 기독교인들은 오랜 종교적 숙적인 이슬람을 연상시키는 무늬를 용납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줄무늬가 지닌 시각적 속성이다. 강한 색상이 대비되어 연속 교차된 줄무늬는 무엇이 바탕이고 무엇이 무늬인지 뚜렷하게 구분할 수 없다. 모든 것에서 차원의 차이를 읽어내려 했던 중세인들은 바닥의 면과 무늬의 면을 구분할 수 없는 줄무늬를 눈으로 보아도 판독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줄무늬나 바둑판무늬는 질서를 파괴하는 불경스러운 것이라 여겼다.   


가르멜회 수도사들의 줄무늬 케이프 (Pietro Lorenzetti, 1328 Pinacoteca Nationale 출처: carmelies.net)


중세시대 사람들의 이러한 사회학적, 시각적 관점들로 인해 줄무늬는 점차 경멸의 상징이 되었다. 13세기 중반 가르멜회(Carmelties) 수도자들이 다른 수도회와 차별성을 두기 위해 눈에 잘 띄는 줄무늬 케이프를 입고 파리로 입성했을 때, 사람들은 이슬람교도와 같은 무늬를 입은 이들을 보고 경악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잡종 사제들(frères barrés)'이라 부르며 조롱하고 경멸했다. 프랑스어에서 barrés는 현재 줄무늬를 뜻하지만, 과거에는 잡종이라는 뜻도 있었기에 이슬람의 무늬를 입은 수도사들은 종교의 질서를 교란하는 자들로 비난받았던 것이다. 교황은 어떤 수도회 소속의 수도자도 줄무늬를 입지 말라는 금지령을 내렸고, 악마 같은 줄무늬를 입었다는 이유로 성직자들을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다양함은 죄악인가?

다양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꼽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지만, 중세 기독교인들은 다양함을 지옥과 연결해서 생각했다. 성실하고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변덕스럽게 다양한 면모를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배경과 무늬, 중심부와 주변부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다양성은 꽤 오랫동안 불경하게 여겨졌다.

라틴어에서 '줄무늬가 있는 것(virgulátus)'과 '다양성(varitas)'은 때때로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중세 시대에서 다양한 것은 기만하며 타락한 것으로 여겨져 줄무늬는 더욱 부정적 기호가 되었다. 그들에게 다양성이란 사회 질서를 교란하는 불순한 반역자이고, 다양한 사람은 교활한 속임수를 쓰는 배신자였다. 동물을 도축하는 잔인한 사람이고, 광기가 있는 이상한 사람, 신체장애가 있는 불충분한 사람이었다. 

사람뿐 아니라 동물에게도 이러한 가치 체계는 그대로 적용되었다. 얼룩무늬나 줄무늬가 있는 호랑이, 하이에나, 표범은 살상을 하는 잔인하고 포악한 짐승이고, 뱀과 말벌은 교활한 동물, 얼룩말은 악마의 지배를 받는 존재라 생각했다. 중세인들은 그렇게 다양성에 온갖 악의적인 의미를 덧씌우며 줄무늬와 동일시했다. 




줄무늬, 미천한 사람들이 입는 옷

사람들은 참 못됐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의 소속감 욕구는 어느 시대건 배척할 대상을 찾아 증오하고 혐오하며 상대적 안정감을 갈구한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경멸의 뜻이 담긴 악마의 무늬를 이제 그들 사회의 약자들에게 강요했다. 죄수, 사생아, 농노, 매춘부, 광대, 백정, 사형 집행수부터 유대인과 이단자까지. 당대 사회 밑바닥이라 인식되었던 '다양한' 사람들에게 줄무늬를 입도록 했고, 몸에 걸치는 의복과 장신구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줄무늬를 착용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줄무늬는 주목성으로 이들을 눈에 띄게 만들어 소위 '선량한' 일반 사람들과 섞이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불경스러운 상징성을 덧씌우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이를테면 사회에서 버림받거나 배척된 가장 미천한 사람들에게 찍는 낙인과 같은 것이었다.  



사형 집행인의 줄무늬 옷(Albrecht Altdorfer, 1506.  출처: wikiart.org)



중세 광대의 초상 (Marx Reichlich, c.1519-1520. 출처: commons.wikimedia.org)


당시의 문학 작품이나 회화의 묘사를 살펴보아도 줄무늬가 상징하는 불경함은 그대로 드러난다.  영웅은 백마를 타고 나타나지만, 악당은 다양한 색이 뒤섞인 말을 탄다. 배신자와 불한당은 여지없이 줄무늬 방패를 들거나 줄무늬 옷을 입는다. 

13세기에는 여러 가지 색상과 도형을 통해 가문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던 문장(heraldry)이 전 유럽에 대유행하고, 하인들이 소속 가문의 여러 상징색으로 면 분할이 된(parti-colored) 옷을 입게 된다. 그리고 계몽시대에 이르러 줄무늬는 점차 악마의 옷에서 하인의 옷으로 격상된다.




인간은 때로 나보다 못한 사람을 구별 짓고 차별하며 자신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패션은 이쪽과 저쪽의 편을 가르고 표식을 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어왔다. 그러나 패션은 아무 죄가 없다. 인간의 본성이 그러한 탓이고, 낯설고 다양한 것을 두려워하고 배척하려고 하는 인간의 무지함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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