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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Mar 27. 2021

악마는 줄무늬를 입는다 (3)

스트라이프, 즐거운 일탈을 허하라

나는 무척 지친 것 같다. 게으른 완벽주의자 성향을 가진 나는 모든 것을 잘 해내지 못하는 내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럴 바엔 시작하기 말걸, 수락하지 말걸, 도전하지 말걸. 온갖 후회가 밀려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들이니 몸을 일으켜 계속 나아갈 수밖에. 

이런 때에는 패션으로 약간의 도움을 받는다. 좋아하는 옷이나 아껴두었던 신발, 부들부들한 스카프 등 몇몇 패션 아이템을 착용하면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개인의 경험과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어떤 패션 아이템들은 확실히 우리의 감정을 어루만진다.  

나는 오늘 가족 모임에 스트라이프를 입을 생각이다. 맑고 청량한 하늘색과 눈처럼 깨끗한 흰색이 교차된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흰 구두를 신을 생각이다. 우울감을 아래로 내려두고 좀 더 가볍고 유쾌한 기분에 젖어들기를 바라면서.




뱃사람들의 옷

서구 사회에서 선원들이 줄무늬 옷을 입는 것은 오래된 관습처럼 여겨졌다. 17세기 중반 이후의 회화에는 흰색과 붉은색, 또는 흰색과 파란색의 줄무늬 옷을 입은 수병들이 등장하고, 1858년 프랑스 해군의 이너웨어로 채택되어 각국의 해군 유니폼에 도입된다. 


도대체 뱃사람들은 왜 줄무늬를 입게 된 걸까?

뱃사람들이 입었던 줄무늬 옷에서도 기호학적인 의미를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왜냐하면 줄무늬는 모든 뱃사람이 입었던 것이 아니라 허드렛일을 하는 하급 선원들이 입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줄무늬는 중세시대의 쓰임새처럼 그 집단내에서 가장 낮은 신분임을 나타내는 표식이며 차별의식을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중세 유럽 사회에서 줄무늬가 배척의 대상에게 강요되었던 이유는 여기에서 자세히 언급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고 자유를 박탈하기 위해 줄무늬를 이용했던 사례는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다른 견해는 상징적이거나 기호학적 해석 때문이 아니라 원단 생산의 기술적 문제에서 기인했다는 의견이다. 혹독한 바닷바람과 맞서야 했던 뱃사람들은 체온 유지를 위해 트리코(tricot)로 만든 옷을 주로 입었다. 트리코는 우리가 흔히 '메리야스'로 알고 있는 니트 조직으로 함기량이 높아 보온의 효과가 있고 신축성이 좋기 때문에 활동을 편하게 한다. 트리코는 17세기 중반부터 기계로 양산되었는데 당시 기술로는 고르게 쭉 연결해 편직 하지 못하고, 중간에 끊어짐이 발생해 가로 결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긴 양말이나 긴 티셔츠는 다른 색으로 교차해 편직 하곤 했다.


어쨌거나 줄무늬의 트리코 티셔츠는 실용적이었기 때문에 선원들의 옷에서 어부, 뱃사공 등 바닷 일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널리 펴져나갔고 배의 돛이나 깃발 등에 쓰이면서 '바다'를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로 확장되었다.  


1940년대 프랑스 해군(출처: stylecaster.com ©Getty Images). 프랑스 브르타뉴 어부들이 즐겨 입어서  'Breton stripe'라고도 한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일탈

온갖 악의적 의미가 덧씌워진 채 굴곡진 세월을 지내온 줄무늬는 먼바다를 상징하는 기호가 되었다가 이윽고 19세기에 이르러 보통사람들의 일상으로 진입한다. 서구 사람들은 생활이 윤택해짐에 따라 19세기 중후반부터 해변에서의 레저를 즐기며 여가를 보냈다. 먼바다 배위의 선원이나 돛에 쓰이던 줄무늬는 이제 파라솔과 접이 의자, 천막, 해수욕 복장 등으로 쓰이게 되었다. 

바다 위에 표류하던 줄무늬가 부정적 의미를 온전히 벗어던지고 해변에 발을 딛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줄무늬는 레저를 위한 여러 가지 용품과 의복에 더 본격적으로 쓰였고, 프랑스와 영국, 벨기에의 해변가는 줄무늬로 넘쳐났다. 여름철의 놀이문화와 맞물린 줄무늬는 도시에서의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난 상태, 즉 해방감을 주는 즐거운 일탈의 시간을 채워나갔다. 


 The football player, 1908. Henri Rouseau. Guggenheim Musuem 소장 (출처: commons.wikimedia.org)




예술가의 창의력을 깨우는 것

자연 발생한 줄무늬는 매우 드물다. 다시 말해 줄무늬는 인위적인 무늬라고 볼 수 있고, 자연 상태의 질서를 깨뜨리는 대범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속성과 일탈이라는 의미가 더해져, 20세기 초에는 줄무늬를 애호하는 괴짜 예술가들이 등장했다.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입체주의 미술 양식의 창시자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나 혁신적인 패션의 아이콘 샤넬(Gabrielle "CoCo" Chanel)이 대표적이다. 

피카소는 속된 말로 줄무늬 덕후였다. 흰색과 파란색으로 된 줄무늬 옷이라면 니트, 폴로셔츠, 바지, 카디건 등 가리지 않았고 줄무늬 옷을 입은 자신의 자화상을 남기기도 했다.

샤넬은 리비에라 여행에서 영감을 받아 1917년 노티컬 컬렉션을 통해 스트라이프 패션을 발표했다. 평범한 보통사람의 옷에서 얻은 영감이 하이패션의 소재가 되어 제안된 것이다.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샤넬. 샤넬은 '편하지 않으면 럭셔리가 아니다'라고 했다.


로베르 두아노가 촬영한 1952년 피카소의 모습. 피카소는 훌륭한 그림을 그리려면 자신의 엉덩이에 줄무늬를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줄무늬 티셔츠는 진 세버그, 브리짓드 바르도, 오드리 헵번, 제임스 딘, 말론 브란도 등 수많은 스타들에 의해 사랑받고 대중화되어 '젊음'이라는 이미지를 획득한다. 한때는 '악마'를 상징하던 불경스러운 것에서 '젊음'이라는 최고의 찬사라니. 비록 오명을 벗기까지 수백 년이 걸리기는 했지만 이처럼 드라마틱한 반전이 또 있을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질서를 무너뜨리고 교란하는 악마의 장난, 그리고 기성세대의 관습을 깨뜨리려 하거나 일탈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저항정신은 어느 지점에선가 서로 닿아 있는 듯하다. 통제되지 않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것. 스트라이프는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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