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가치
‘내가 진짜로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학생들의 작품을 지도하다 보면 작품 콘셉트를 잡는 초반에 학생들이 제일 많이 하는 호소이다. 그 나이 때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트렌드를 민감하게 항상 모니터링하다 보니, 시시각각 유행하는 것들이 다 좋아 보이고 다 따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자기 취향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여러 가지 트렌드를 흡수하더라도 창작자는 결국 자기 해석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창작 과정에는 자기 취향이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나게 마련이다.
다만 경험이 적은 나이이거나 자기 확신이 부족할 때는 대개 그게 무엇인지, 맥락을 잡아내지 못할 뿐.
취향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취향', 엄밀히 말해 철학용어로서의 '취미(Taste, Goût)'란 사물의 미적 가치를 알아보고 쾌/불쾌의 감정과 관련해 판단하는 능력이다. 취향이란 단어가 서구 사회에 처음 등장했던 15세기에는 '깊이 있는 이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인본주의와 산업사회가 무르익었던 18세기 이후 개인의 분별력이 중요하게 생각되어 '취향'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오늘날의 의미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칸트를 비롯한 18세기 철학자들이 말하는 미감에 기초한 판단은 '무관심성(無關心性, disinterestedness)'을 전제로 한다. 무관심성은 관심을 두지 않는 것, 즉 관조의 태도이다. 자기의 이익을 동기로 삼지 않기에 '그냥' 좋은 것이라야 한다.
패션을 적용해 생각해보자.
샤넬의 클래식 백은 해마다 가격이 오르는 탓에 감가상각의 원리를 비켜간다. 어떤 사람들은 샤넬 백은 되팔아도 손해 볼 것 없다는 생각에 오픈런으로 뭐라도 하나 쟁취하고 '샤테크'라 자부한다. 이들에게 샤넬 백의 소비는 취향에 의한 선택일까? 이들 선택의 동기는 아마 경제적 이득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뭐. 에르메스와 샤넬 중 후자를 선택한 것이 취향이라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브랜드 로고의 후광 효과를 떼어냈을 때 디자인의 미감을 근거로 같은 선택을 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취향, 나를 구별 짓는 것
취향은 나를 드러낸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취향은 무엇을 소비하는가로 말할 수 있다.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예술작품을 선호하는 가의 문제뿐 아니라 지금 당신이 일상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취향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1979년 발표한 저서 ⟪구별짓기(La Distinction)⟫에서 프랑스인을 대상으로 방대한 취향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는 칸트처럼 미학과 윤리를 분리하지 않는다. 부르디외는 미적 취향이 현실세계의 윤리적 성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모든 부분에 작용한다고 했다. 취향은 예술에 대한 미학적 취사선택뿐만 아니라 음식이나 옷의 소비와 같은 일상적 실천에도 드러난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취향은 '문화자본(cultural capital)' 즉, 교육기회에 대한 접근권, 문화예술의 향유 능력과 같은 것으로부터 형성된다. 그리고 취향은 그 사람이 처한 사회적 지위가 어떠한지 변별할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취향은 계급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유미주의적 취향, 중간 계급은 절충주의적 취향, 민중 계급은 스타일이 없는 대중 취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취향은 사회적 계급을 구분 짓고, 인간은 자신보다 상위층에 있는 사람들의 취향을 모방해 계층 이동을 열망한다. 인간의 이러한 속성은 역사 속에서 패션의 유행을 만들어 왔다. 루이 15세의 애인이었던 마담 퐁파두르가 사냥에 나섰다가 걸리적거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위해 끈으로 묶어 올렸던 헤어스타일이 삽시간에 온 나라에 유행한 역사 라던가. 패션사에서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도 비슷한 작동원리로 패션이 유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몇 년 전 삼성가의 큰 사모님이 들었던 이세이 미야케의 바오바오 백, (전) 작은 사모님이 들었던 보테가 베네타의 카세트 백이 미친 듯이 유행한 현상이 그 사례이다.
좋은 취향
그렇다면 좋은 취향은 경제적 풍요가 담보되어야 성취할 수 있는 것인가?
좋은 취향이 곧 상류층의 취향이라고 본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취향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특정 계급의 전형적 표식에 맞추거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쫒는 것이 아니다.
좋은 취향은 섬세하게 다듬어서 고도화된 취향. 즉 작은 차이를 분별하고 아름다움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취미의 기준에 대하여(of the Standard of Taste)⟫에서 아름다움이란 대상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전적으로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미를 지각한 것에서 다른 사람은 추를 지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흄에 의하면 미의 판단은 객관적 인식 판단이 아니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
또 흄은 '사물을 섬세하게 감각할 줄 아는 좋은 습관은 인간 삶에서 위대한 안내자 역할을 한다'고 했다. 좋은 습관을 부단히 훈련해 나의 취향이 견고해지면, 일상은 작은 차이와 변화를 깨닫는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
섬세하게 다듬어진 취향은 작은 차이를 식별하고 더 나은 쾌감을 주는 것을 고를 수 있는 심미안이 된다. 좋은 취향으로 채워진 삶은 풍요롭기 때문에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다른 누군가의 삶을 열망하거나 세상의 기준에 휘둘리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유학할 당시, 교수님의 개인 작업실에 초대받아 방문한 적이 있다. 교수님은 나에게 커피를 권하며 '초코 에클라와 사과 타르트를 준비했어. 뭘 먹을래?'라고 물었다. 나는 늘 그렇듯 '아무거나 괜찮아요'라고 대답했다.
'넌 취향이 없니?'
교수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디자이너는 '아무거나'라고 대답하면 절대 안 된다고 하면서.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차라리 돼지력 발휘해서 둘 다 먹겠다고 할 걸 그랬나. 한국에서 나고 자라 뿌리 깊은 유교 걸이었던 나는 어른에게 내 취향을 주장해서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배웠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취향을 밝히지 않는 것을 미감이 둔한 사람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항상 내 취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 깊게 생각했다. 그 결과 지금 내 취향이 세련되게 고도화되어 확실히 견고해졌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왜냐면 나는 여전히 내 삶에서 어떤 결핍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일할 때 나의 후배가, 혹은 나의 학생이 자기 취향을 반영할 기회가 있으면 마음껏 선택하도록 한다. 볼펜 브랜드나 포스트잇 색상처럼 사소한 사무용품을 선택할 때, 혹은 스케치를 핸드 드로잉으로 해야 할지 디지털 드로잉으로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네 미감을 따라 선택하라'고 권한다.
미감을 따라 행하는 일상의 작은 선택들이 자신의 취향을 섬세하게 다듬는 과정이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