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노스탤지어와 미적 평가에 대한 단상
제정신이니?
90년대 말 어느 겨울, 내가 광화문 바닥을 다 쓸고 다닐 기세로 빨간 체크무늬 나팔바지를 만들어 입고 집을 나설 때 엄마가 물었다.
'어. 왜?' 나는 제법 당당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대문을 나서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에서 느꼈다. 아아. 어쩌면 약간 실성한 사람처럼 보일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조금 더 추가 묘사를 하자면, 그 당시 나는 머리를 짧게 잘라 녹색으로 물들이고 밥 딜런처럼 부풀렸었다. 그리고 술(tassel)이 주렁주렁 달린 가죽 재킷을 만들어서 함께 입었다. 각종 수입 병맥주 뚜껑으로 펜던트를 만들어 가방에 한 가득 붙이고 다녔다. 여기에 화룡정점은 명동 편집숍에서 득템 한, 앞코가 지나치게 뾰족하고 화려한 카우보이 부츠인데, 사실 내 발에는 좀 작았다. 하지만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해 새끼발톱이 네 번째 발가락을 찔러 피가 나고 오래 걸으면 점차 시야가 아득해지는 육체적 고통쯤은 기꺼이 감수했다. 오직 스타일을 위해서! (애증의 카우보이 부츠는 아직도 신발장 속에 가지고 있다)
그때는 그랬었다.
세기말 미니멀리즘이 몰아쳤던 그때 대체 왜 내가 잠시 동안 웨스턴 무드에 꽂혔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와 '아리조나 유괴사건', '델마와 루이스' 등의 영화를 좋아했던 시기였으니 그 영향이 좀 있지 않았을까. 아무튼 나는 의식의 흐름대로 컬러를 고르고, 패턴을 만들고, 장식을 달며 흔한 요즘 유행과 엄청나게 다른 독특하고 신선한 조합이라고 신났었지만. 엄마는 이렇게 평가했다.
쯧쯧..
니 눈에는 정말로 그게 이뻐 보이는 거니? 엄마는 너무 괴상해 보이는데.라고 하시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엄마는 내 옷차림에서 그 옛날의 로커빌리(rockabilly) 혹은 히피(hippie) 같은 분위기를 느꼈던 모양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심하게 다리를 떨며 윙크를 날리던 그 로커빌리, 환각 상태에서 사랑과 평화를 외치던 그 히피 말이다. 50-60년대를 생생히 기억하던 엄마 입장에서는 세상 촌스러운 구닥다리 패션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무채색과 뉴트럴 톤의 단정한 옷들에 좀 질렸던 터라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고, 어쩌면 해외 패션 잡지에서 보았던 레트로 이미지가 무의식 속에 데자뷔처럼 엉켜 그 옛날 스타일에 끌렸던 것일 게다.
이렇게 패션은 언제나 싫증과 호기심, 결핍과 대안의 변증법 속에서 변화한다. 그리고 새로운 대안은 종종 과거의 향수 속에서 발견된다.
레트로, 뉴트로
새로움을 쫒는 것은 패션의 숙명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옷이 생리적 욕구를 충족한 순간, 즉 추위와 외부 위험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기능을 넘어서면서 패션은 늘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유행 패션의 지속적인 자극에 피로해진 사람들에게 패션 업자들은 발 빠르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새 대안이 많은 소비자의 공감을 얻으면 유행 패션이 되고, 사람들은 또다시 싫증을 느껴 새로운 자극으로 이동해 간다.
이때 소비자들의 폭넓은 공감을 얻기 위한 쉬운 방법은 과거 기억을 자극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나버린 시간을 추억하며 과거를 사실보다 더 긍정적으로 회상한다. 그때가 지금보다 좋았지-라고. 누군가의 어린 시절에 느꼈을 법한 감성을 재해석한 상품은 경제력을 갖춘 소비주체로 하여금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패션은 현재의 유행에 싫증난 소비자들에게 과거 추억을 소환하는 노스탤지어 마케팅을 해 왔다. '레트로(retro)'로 감성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그런데 최근 몇 년간 레트로 열풍의 특징은 본인 세대가 겪어 보지 않은 이전 시대 분위기를 소비한다는 것에 있다. 이를테면 어린 소비자층인 MZ세대들이 1980-90년대 풍의 패션을 적극적으로 즐기는 현상이 그러하다. 추억을 소구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극으로 즐긴다는 의미로 뉴트로(newtro)라 부른다.
그때는 그랬지
유행은 지나간다. 어쩔 수 없다.
지난 주말 만난 대학 동창은 하얀색 스키니 진을 입고 나왔다. 패션 연구기관의 팀장으로 있는데도 말이다.
요즘 스키니 진을 뭐라 부르는지 알아?
엄마 바지..
21세기에 태어난 세대와 대학교에서 나름 함께 호흡하고 있는 내가 이와 같은 고급 정보를 발설하자 친구의 동공은 몹시 흔들렸다. 아아아. 그리고 이내 탄식했다. 십여 년 전 최고 유행 아이템이, 야속하지만 지금은 중년의 상징이 되었다. 이렇듯 유행 패션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적 평가가 달라진다.
영국의 미술사학자 제임스 레이버(James Laver)는 저서 ⟪취향과 패션(Taste and Fashion, 1943)⟫에서 유행의 법칙을 이렇게 설명한다.
유행에 10년 앞서면 망측한(indecent)
유행에 5년 앞서면 뻔뻔한(shameless)
유행에 1년 앞서면 대담한(daring)
유행일 때는 맵시 있는(smart)
유행이 1년 지나면 촌스러운(dowdy)
유행이 10년 지나면 흉측한(hideous)
유행이 20년 지나면 우스꽝스러운(ridiculous)
유행이 30년 지나면 재미있는(amusing)
유행이 50년 지나면 진기한(quaint)
유행이 70년이 지나면 매력적인(charming)
유행이 100년 지나면 낭만적인(romantic)
유행이 150년 지나면 아름다운(beautiful)
옷이 된다.
유행 말고 스타일
유행은 지나간다. 예외가 없다.
그러니 신경 곤두세우고 모든 유행을 흡수할 필요가 없다. 최근 몇 년간 유행 아이템인 트랙 솔(track sole) 슈즈도 10년쯤 뒤에는 세상 투박하고 흉측하게 느껴질 수 있다.
만약 멋쟁이로 오래도록 평가받고자 한다면, 특정 룩(look)을 단편적으로 취해 유행 패션에 편승하는 것은 언제나 지는 게임이다. 그보다는 나와 잘 어우러지는 스타일을 갖추는 것이 더 지속 가능한 방법이다. 내 피부색, 체형, 생활양식, 태도, 취향, 가치와 잘 어우러지는 일관된 양식, 바로 그런 스타일.
유행은 지나가고 스타일은 영원하다
입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은 유행을 뛰어넘는 스타일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위와 같은 명언을 남겼다.* 유행은 변덕스럽게 다가왔다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일관성과 지속성을 갖는 전체적 분위기와 같다.
스타일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 시간에 획득되는 기술 같은 것도 아니다. 스타일은 각자가 살아낸 삶의 방식과 축적된 시간을 통해 몸에 각인되어 있는 고유의 에너지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쫓아 유행을 흉내 낼 것이 아니라 각자의 스타일을 보듬고 다듬어야 한다. 그게 남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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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행은 지나가고 스타일은 영원하다.
흔히 샤넬이 한 말로 알려져 있으나, 입 생 로랑이 했다는 게 더 정확하다. 왜냐면 샤넬은 '스타일은 남는다'라고 했고, 입 생 로랑은 '스타일은 영원하다'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La mode passe, Le style reste.' Gabielle chanel (1965)
'Les modes passent, le style est éternel.' Yves Saint Laurent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