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로지너스, 유니섹스, 젠더리스
요즘은 디자인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학생들은 졸업 심사를 위해 자신의 콘셉트와 스토리텔링을 세우고, 디자인을 도출해 최종적으로 작품으로 완성해야 한다. 두 학기에 걸친 긴 시간 동안 학생들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고군분투한다. 열정과 에너지를 쏟는 만큼, 학생들은 작은 평가와 피드백 하나하나에 울고 웃는다. 물론 대범하고 당차 보이는 학생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매우 예민하고 연약하다.
그때는 나도 그랬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머리카락이 엄청나게 많이 빠졌다. 난생처음 여드름이란 녀석을 만났고 생리불순을 겪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에서 패션스쿨을 다닐 때는 언어장벽 때문에 한층 더 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살았다. 그 학교는 교수님과 모든 학생들 앞에서 매주 컬렉션 라인업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하는데, 거의 전날 밤은 늘 밤을 새웠다. 그리고 발표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잘 못하는 프랑스어를 더 엉망진창으로 바보같이 우물거렸다. 누군가의 평가 의견에 반박이나 해명을 하고 싶어도 긴장감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외국어를 세련되고 자유롭게 구사할 수 없어서, 쉽게 수긍하거나 포기해버리기 일수였다. 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외국어를 할 때의 나는 이 처럼 대인배가 된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한국에 패션을 배우겠다고 오는 외국인 유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아시아 국가뿐만 아니라, 유럽 및 미주 지역에서도 온다. 그런데 가끔 외국인 유학생들이 수업시간 중 속상한 마음에 눈물을 흘린다. 본인 작품에 대한 내 말이 아팠을 수도 있고,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답답함과 타지 생활의 고단함이 뒤엉켜 울컥했을 수도 있다. 모두가 보는 데서 엉엉 우는 것은 아니지만, 슬쩍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얼마 후 돌아온다. 그런데 그들의 코 끝이 빨갛거나, 눈이 충혈되어 있는 것을 나는 알아챌 수 있다.
오래전 내 모습이 떠올라 안쓰럽고 미안해진다.
디자인 스케치를 놓고 몇 주째 나와 대립 의견을 보이던 한 외국인 학생이 있었다. 콘셉트가 모호한 여러 가지 요소가 복잡하게 섞여 있는 스케치가 마뜩잖아 나는 더 정리를 하거나, 강약을 조절하자고 학생을 설득하는 중이었고, 학생은 디테일을 줄이거나 삭제하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몇 주째 실랑이를 벌이느라 다른 학생들에 비해 진도가 뒤쳐지니 본인도 답답했던 모양인지, 어느 날 그 학생이 내 앞에서 또르륵! 눈물을 흘렸다.
'아무튼 수정을 좀 더 해봅시다. 관점이 불분명한 채 너무 많은 요소가 섞여 있어서 조화롭지 않아요. 근데 이게 남성복이었나? 남자 모델에게 입힐 거죠?'라는 나의 물음에 학생은 울면서 대답했다.
그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요. 다 만들고 나서 더 어울리는 사람에게 입힐 거예요.
아..! 순간,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나는 수업시간에 '패션에 있어 젠더 구분의 강요는 이제 촌스러운 발상이다. 지금은 젠더리스의 시대이다'라고 수없이 말해왔으면서, 정작 아직도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이분법에 여전히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콘셉트의 카테고리를 분명히 나눠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어쩌면 Z세대의 감성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젠더를 구분해 온 패션
옷은 그것을 입은 사람이 누구인지 설명한다.
나이, 직업, 경제 수준, 사회적 지위와 같은 것들 말이다. 더 나아가 심리적 상태, 취향 혹은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을 엿볼 수도 있다. 그리고 종래의 패션을 통해 착용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단서는 성별의 구분이었다. 체형과 인체 굴곡을 세밀하게 반영한 옷은 그럴 수밖에 없다. 생물학적 성차에서 신체적 특성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니까.
그런데, 남자 혹은 여자가 마땅히 따라야 할 것으로 고착화된 사회적 역할과 문화적 관습 또한 패션에 그대로 적용되어왔다. 이상적 아름다움에 대한 시대적 기준이 달라지면 그에 맞춰 패션도 탈바꿈해왔지만, 패션은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뚜렷하게 구분해 왔다.
남자 옷은 이러해야 하고 여자 옷은 저러해야 한다는 관념은 신생아의 옷에도 무섭도록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이를테면 남자아이는 하늘색에 바탕에 곰돌이나 우주선이 그려져 있거나, 여자아이는 핑크색 바탕에 리본이나 꽃무늬 따위가 뿌려져 있는 옷을 입히거나 포대기로 감싼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각하기 이전부터 그렇게 길러졌다.
앤드로지너스
앤드로지너스란 그리스어로 남자를 뜻하는 앤드로스(andros)와 여자를 뜻하는 지나케아(gynacea) 합성어로,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한 몸에 지닌 것을 말한다. 쉽게 생각하자면 자웅동체의 개념이다.
앤드로지너스 룩은 남성과 여성의 특성을 한 데 겹쳐서 표현한다. 다시 말해 남자가 여자의 옷을,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는 젠더 플레이 룩이라 할 수 있다. 앤드로지너스 패션은 남성과 여성의 특성이 혼재된 채 섹슈얼리티를 전면에 내세우기도 하고 지우기도 한다. 양성적이거나 중성적이거나.
양성성의 매력은 무척 아이러니하다.
자신의 생물학적 성과 일치하지 않는 몸치장을 차용할 때 드러나는 묘한 분위기는 섹슈얼리티를 더욱 부각하기도 한다. 예컨대 마를렌 디트리히(Marie Magdalene Dietrich)의 매니시 룩(Manish look)은 그녀의 성적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마를렌 디트리히는 1930년대 영화에서 팜므파탈 캐릭터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배우였다. 그녀가 영화 '모로코(Morocco)'에서 남장을 하고 등장했을 때 대중은 그 묘한 매력에 압도되었다. 남성복 슈트 차림에 짙은 화장을 하고 담배를 피우는 그녀의 모습은 터프하고 거친 듯 하지만, 매력적이고 센슈얼했다.
마를렌 디트리히는 실제로 양성애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여자들의 바지 착용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1930-40년대에 바지를 즐겨 입었기 때문에 '할리우드에서 가장 옷 잘 입는 남자'라는 별칭이 붙었다.
앤드로지너스 룩이 주로 남장을 즐기는 여자들의 패션, 즉 남성을 모방하는 여자들의 옷차림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남자들도 다양한 방법으로 소위 여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패션 요소를 즐겨왔다. 짙은 화장, 화려한 의상, 하이힐의 1970년대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와 같은 글램 록(Glam Rock) 스타들, 198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컬처 클럽(Culture Club)의 보이 조지(Boy George)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패션의 본질은 새로운 이상을 좇는 것이다.
앤드로지너스 룩은 고착화된 성의 관념을 뒤섞는 방식으로 새로운 성(sexuality)으로서의 낯설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한다. 그렇게 새로운 제3의 무엇은 보는 이의 마음을 빼앗는다.
유니섹스
앤드로지너스 패션이 언제나 섹슈얼리티를 부각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한쪽의 성적 특성에 치우쳐 있는 패션은 오히려 성의 차이를 지움으로써 성적 매력을 감소시킨다. 유니섹스 룩(unisex look)이 그러하다.
유니섹스 룩은 매스큘린 룩에 치우친 남녀 복장의 단일화로 중성적 모습을 지향한다.
1960년대 서구에서는 민주주의가 성숙하며 흑인, 여성, 청소년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와 지위를 향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또한 사회에 진출한 여성들이 많아지면서 남녀평등을 위한 '여성해방운동(women's liberation movemen)'의 물결이 거세졌다. 이러한 사회 현상은 1960년대 후반,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지우는 유니섹스 룩의 등장으로 이어져 크게 유행했다.
유니섹스 룩은 접두어 uni가 의미하듯, 남녀의 생물학적 성차를 지우고 단일화하는 패션을 말한다. 유니섹스 룩은 크기만 다를 뿐, 남성과 여성을 대상으로 동일한 디자인의 옷을 제안했다. 백화점에서는 유니섹스 패션을 다루는 '히즈 앤 허즈(His'n' Hers)' 코너가 생겨났고, 캠퍼스에는 같은 옷을 입은 남. 녀 커플들이 나타났다.
당시 크게인기를 끌었던 혼성 듀오 '소니 앤 셰어(Sony and Cher)'도 같은 디자인의 무대의상을 착용하곤 했다. 또한 가정에서 만들어 입는 홈패션 패턴도 남/녀의 구분이 없는 것을 판매했다. 즉, 동일한 디자인의 다른 사이즈로 패턴으로 만든 유니섹스 룩은 엄마, 아빠, 아들, 딸을 포함한 온 가족이 모두 같은 옷을 유니폼처럼 입을 수 있었다.
고대 사회나 또는 동양에서는 남녀 혼용의 의상이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없는 유니섹스 룩이 1960년대 처음 등장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1960년대의 유니섹스 룩은 남녀평등이라는 이념과 함께 재등장했기 때문에, 주로 남성화된 여성의 이미지가 지배적이었다. 이렇게 섹슈얼리티가 제거된 유니섹스 룩은, 패션의 기능 중 오랫동안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섹스어필'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현상은 젊은 베이비붐 세대가 사회 분위기를 이끌던 당시 시대상과도 관련이 깊다. 이들 세대에게 이상적 아름다움이란 전통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들은 더 이상 우아한 여성이나 강인한 남성의 기성 모습을 좇는 것이 아니라, 밝고 쾌활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지향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등장한 유니섹스 트렌드는 10여 년 뒤 주류 흐름상에서 쇠퇴했다.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인한 불황과 실업문제가 대두되면서 여성들에게 다시 보수적인 이미지를 기대한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젠더리스
젠더리스(Genderless)는 생물학적 성이든 사회학적 성역할이든 그러한 구분 자체를 해체한다. 젠더리스 패션은 2010년대 중반부터 하나의 트렌드로서 각광받기 시작했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Z세대의 지지 속에 이제는 패션을 넘어 거대한 문화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동안 패션 브랜드들은 전통적으로 여성복 혹은 남성복의 카테고리에서 디자인을 기획하고, 제품을 양산해왔다. 소비자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타기팅(targeting)한 패션 상품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소비패턴을 역행하는 소수는 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경계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을 따라 선택하는 소비 흐름이 생겨났고, 그들을 향한 부정적 시선이 차츰 줄어들었다.
K-Pop 아티스트들의 패션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살펴보면 그런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전에도 밝혔듯이 나는 BTS의 팬이기에, 관련 유튜브 영상이나 기사를 많이 찾아본다. 불과 4~5년 전까지만 해도 '남자가 왜 화장을 하느냐' 혹은 '사내가 왜 샤넬 귀걸이를 하느냐'는 부정적 반응이 꽤 많았다. 심지어 '케이 팝'은 '게이 팝'이냐고 비아냥거리는 마초적 관점의 외국인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BTS의 지민이 스커트를 입었다고, 샤이니의 태민이 배꼽티를 입었다고, 위너의 민호가 진주 목걸이를 했다고 '너의 성 정체성이 도대체 무엇이냐'라고 따져 묻지 않는다.
성의 구분이 더 이상 무색해질 것이라는 시대 감성을 읽어낸 패션 브랜드들은 몇 년 전부터 성 개념을 배제하고 브랜드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구찌(Gucci), 발렌시아가(Balenciaga), 버버리(Burberry), 톰 브라운(Thom Browne)과 같은 영향력 있는 럭셔리 브랜드들은 남성복과 여성복으로 구분해 진행하던 컬렉션을 통합해 선보이며 이러한 변화에 앞장섰다. 이후 구찌는 노선을 번복했지만, 변화의 흐름은 지속되고 있다.
구찌는 밀라노 남성복 패션위크의 부흥이란 사명을 떠안고, 2020년 가을 컬렉션부터 남성복 단독 컬렉션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남성복과 여성복의 패션쇼를 따로 개최해 선보이고 있을 뿐, 디자인만 놓고 보면 성의 경계가 없는 젠더리스 패션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오버사이즈 스타일을 사랑했고, 마음에 드는 옷이라면 남성복도 서슴없이 구매하던 나로서는 최근의 젠더리스 열풍이 무척 반갑다. 파는 사람은 효율을 우선시하고, 사는 사람은 자신의 취향과 미감을 따르면 되는 것이니, 모두가 행복한 일 아닌가!
젠더리스 패션은 성을 특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 정체성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것과는 다르다. 무언가를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어 가르던 경계의 개념을 초월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특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편견 없이 그 자체를 바라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을 그냥 사람으로.
그리고 임의 규범에 갇히지 않은 우리는 더 자유롭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