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누구와의 사귐이 첫사랑이었는지 딱히 모르겠다.
처음으로 손을 잡은 이를 첫사랑으로 해야 하나? 아니면 고등학교 때 저녁밥을 먹었던 친구네 하숙집 교대 다니던 오빠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부족한 용돈을 쪼개 수업시간마다 바나나 우유를 상납했던 나의 고등학교 때 윤리선생님이 첫사랑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내가 크로켓을 사 먹어야 할 돈으로 바나나 우유를 갖다 바치면서도 하나도 아깝지 않았으니 그 보다 더 한 사랑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 수많은 사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첫사랑을 고르려니 그 ‘첫’이란 글자 하나로 이렇게 고민을 한다.
대학을 들어가고 처음에 무지하게 학교를 다니기가 싫었다. 내가 학교를 다니기 가장 싫었던 이유가 뭐였을까? 아마도 외로움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1학년 때라 수업도 거의 교양과정이 전부였다. 시간표에 맞춰 교양학관에 있는 강의실을 겨우 찾아 들어가 보면 같은 과 친구들이 간혹 눈에 띄기도 했지만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 같은 나오면 그네들은 다 뿔뿔이 흩어지고 나는 혼자였다. 오죽했으면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저기 경영대까지 4학년이던 언니를 찾아갔을까. 그렇지만 밥만으로는 근원적인 해결책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맨날 징징거리는 나에게 언니는 동아리 가입을 권했다. 여차저차하여 영어회화 동아리에 가입했고, 4월 중순이 넘어서는 학교가 내 세상이라 활개를 치고 다녔다.
동아리 활동은 재미있었다. 실제로도 공부 빼고는 다 재미있었다. 짧은 머리에 머슴애 같았던 나는 국민 남동생으로 복학생 선배들 틈에 끼어 하루는 맞아서 울고, 하루는 족구장에서 공에 맞아 울고 그러면서도 굳이 그 동아리에 뼈를 묻을 기세로 살았다. 지금도 그들은 나를 만나면 지금은 안 울고 다니느냐고 묻는다.
내 나이가 몇인데 울기까지....
1988년 여름. 방학이 되자마자 우리 동아리는 남해 물건리로 MT를 갔었다. 그때는 자가용도 없는 시절이니 빨간 버스를 타고 남해군까지 가서 다시 남해에서 물건리를 지나는 버스를 갈아타고 동네 앞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 또 캠핑용품을 이고 지고 동네와 들판을 지나서야 겨우 바닷가 방풍림에 들어섰다. 텐트를 치고,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먹고, 선배들을 따라 처음으로 낚시도 했다. 제대로 된 물고기는 잡히지도 않고 복어만 잡혔다. 작은 복어의 배가 뽈록하게 부풀어 오르는 걸 처음 내 눈으로 보고 신기했었다. 그렇게 세상 신기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었으니 그저 신나기만 했다.
그때가 1988년이었고 피노키오에 “사랑과 우정사이”라는 노래가 유행했었다. 단합대회에 가면 기타 반주에 맞춰 반드시 불러야 한 노래였고, 우리도 기타 잘 치는 선배 옆에서 사랑과 우정사이부터 별별 노래를 다 소환하느라 거의 밤을 새우고 있었다. 그때 내 한 해 위 선배가 어물쩍 고백 아닌 고백을 했고, 안 그래도 바닷가에서 낭만이 차고 넘치는데 고백까지 받았으니 그날 밤을 꼬박 새우고 마지막까지 둘이 남아 일출을 봤었다. MT를 다녀오고 총무가 사진을 인화해 주는데 그 모든 단체 사진에 나는 그 선배와 나란히 있었다.
그 선배의 큰 그림에 내가 들어가 있었던 게 아닐까?
이후 고백 한 번 받았다고 바로 사귀자 이럴 수도 없고, 동아리 가입하고 나서 내내 붙어 다니던 사람을 고백을 받았다고 해서 내외하기도 어색하고, 이래도 저래도 어색한 관계로 얼마동안 지내다가 연애 1일이 시작되었다.
사랑의 달콤함이란....
이제부터 우르르 뭉쳐나갔던 학교 앞 막걸리 집을 손절하고 선배들과 동기들의 눈을 피해 둘이서 도망 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래봤자 기껏 학교 앞 돈가스 집이고, 진주극장에서 영화 보는 걸 넘어서지는 못했다. (같이 본 영화는 이젠 제목은 생각도 안 난다.) 그렇게 한 달쯤 만났고, 이런저런 감정 선을 정리하지 못해서 결국엔 헤어지게 되었다. 그 뒤 그 시대의 수순대로 선배는 입대를 했고, 간혹 과사무실로 편지를 보냈고, 나도 짧은 답장을 보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졸업과 함께 고향에서 직장을 다녔고, 선배는 내가 졸업을 한 후 복학을 했고, 이후 전공을 살려 기업에 취직을 했다. 우리가 짧은 연애 긴 이별을 한 후에도 누구도 동아리를 나가지는 않았으니 굳이 직접 연락을 하지 않아도 일간지를 받아 보듯 서로 삶을 전해 들었고, 또한 내 소식도 전해졌을 것이라 안다. 15년쯤 전에 프랑스에 현지 근무를 하던 선배는 급히 신원증명서를 받아야 했고, 우리 시 민원실로 전화해서 내 선배임을 직접 밝히고 부탁을 했단 소리를 담당자한테 들었다. 그렇게 굳이 궁금해하지 않아도 내게 첫 고백을 한 사람이자, 내가 처음으로 이별을 통보했던 남자와의 인연은 꾸역꾸역 이어져 왔다. 지금도 동아리 졸업생들끼리 모임이 있으니 한국에 돌아왔다는 선배를 모임을 다시 시작하면 만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내 첫사랑은 그 선배가 맞다. 적어도 첫사랑이라면 길을 걸으면서 손이 잡고 싶어 마음이 간질간질해야 하고, 영화를 보더라도 영화보다는 팝콘 통에서 스치는 손끝의 기억이 더 선명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순간이 있었던 사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헤어졌고 지금도 가끔은 왜 헤어졌을까가 궁금하다. 그때는 눈물, 콧물을 쏟을 만큼 울고불고했던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첫사랑은 이르디 이른 봄 서둘러 핀 청매화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겨우 한낮의 햇살이 조금 따뜻해졌을 뿐인데 서둘러 꽃잎을 틔우다 꽃샘추위에, 춘설에 얼어버리는 청매화 같은 존재, 아직 성숙하지 못해 내 감정하나 추스를 수 없을 때 감히 나 아닌 누군가를 맘에 담았으니 그게 온전히 성숙할 수 있었겠는가? 나의 마음이 조금만 더 단단했을 시기에 만났더라면 더 좋은 만남으로 이어지고 어쩌면 지금 우리는 한 집에서 바자마를 입고 첫사랑의 기억은 다 버리고 생활인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른 봄의 청매화가 비록 매실로 이어지지는 못해도 향기 나 감동은 때맞춰 피어 튼실한 매실로 남을 꽃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첫사랑이 너무도 싱겁고 가볍게 스쳐지나 아쉽다고는 하나 지금도 여름방학 바닷가의 기억,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굳이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는 살짝 밀어주던 선배의 좁은 어깨, 시청 앞 ‘토요일은 밤이 좋아’라는 노래와 함께 맥주를 마셨던 고주잠자리의 기억. 이 모든 걸 기억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게 첫사랑이 갖는 향기가 아닐까? 이렇듯 내 첫사랑의 기억은 우리가 만났던 시간보다 몇 백배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와 나를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묶는다.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나이가 들고 이젠 먹은 나이만큼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20대의 풋풋함을 나눈 내가 나의 첫사랑과 함께 나이를 들어간다면 그 또한 의미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여성성을 잃어가고, 아름다움과 멀어지는 나의 모습으로 그의 앞에 있지 않아도 된 걸 가끔은 안도한다. 그런데 나만 그럴까? 그도 또한 옅어지는 머리숱과 나오는 배를 감당하지 못할 때 스무 살 시절의 이별을 고마워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