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설날을 며칠 앞두고 문여사님과 데이트 중
낼 모래가 설이다.
나이가 들고 설날이 설렜던 적은 없는 것 같고, 내 설날의 설렘은 시골에 살았던 그 시절의 청산과 함께 끝났지 싶다.
몇 번 이야기 하긴 했듯 내 고향마을은 지리산이 빤히 올려다보이는 산골이다. 설날쯤이면 지리산에는 항상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고, 덕분에 우리 동네는 징그럽게
추웠다. 그리고 눈도 잦았다.
눈 온 뒷날 이불 빨래한다는 말이 있다. 한겨울에 이불 빨래를 해도 괜찮을 만큼 맑고 햇살이 따사롭다는 말이겠지. 실제로 눈이 온 뒷날쯤이면 설맞이 이불 빨래를 했었다. 빨간 고무 대야에 가마솥에서 데운 더운물을 퍼 담고, 하이타이를 풀어 비눗물을 만든 후 묵은 이불들의 홑청을 뜯어 대야에 넣고 발로 푹푹 밟아가면 누렇고, 시커먼 땟물이 벗겨냈었다. 이렇게 애벌빨래를 한 후 마당에 솥을 걸어 빨래를 푹푹 삶아 화창한 겨울 마당에 넣어두면 빳빳한 장작처럼 얼기도 했지만 금세 좋은 햇살에 말라갔다. 이불 홑청이 다 마르기 전에 밀가루 풀을 먹여 다시 빨랫줄에 길게 널었다가 꾸덕꾸덕해지면 엄마와 할머니는 마주 앉아서 다듬이질을 하셨다. 그렇게 방망이로 내려치는데도 신기하게 구멍도 안 나고 천이 팽팽하게 펴졌으니 그 다듬이질 힘의 조절이 신기했었다. 다듬이질이 끝난 홑청은 한 번 더 빨랫줄에서 바람을 쐬면 빳빳하게 살이 펴지면서 깨끗한 홑청이 되었다. 빨래를 끝낸 홑청을 입힌 새 이불을 덮고 누우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얼마나 풀을 빳빳하게 먹였던지 얼굴이 베일 듯 아파서 불편했던 기억도 선명하다.
이렇게 시작된 설 준비는 우물가에서 두부콩 한 말을 고무 대야에 불리는 것으로 본격적인 음식 장만에 들어갔다. 지금처럼 하루 이틀을 앞세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일주일쯤 전부터 시작되는 행사였다. 그러니 정작 설날쯤이면 장독에 담겨있던 두부가 그렇게 맛나지 않았던것으로 기억한다. 불려둔 콩이 물러져 본래 모양의 두 배쯤이 되면 우물가 시멘트 위를 깨끗하게 씻고 한쪽에 밀어뒀던 맷돌의 짝을 맞추는 등 잔뜩 분주해진다. 그리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엉덩이에 깔 것들을 준비하셔서는 자리를 잡고 마주 앉아 맷돌을 돌리셨다. 고부지간에 이런저런 동네 사람들 이야기, 우리 이야기 등을 나누시면서 시나브로 돌리시는데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나 할머니께서 잠깐잠깐 자리를 비우는 순간이 되면 그 자리를 차고 들어가 몇 번을 돌려보지만, 두 분이 돌릴 때와는 확연히 다르게 어찌나 힘이 들고 콩이 골고루 안 갈아지든지…. 지금 생각하면 그게 바로 요령이지 싶다. 콩물을 끓이고, 거르고 간수를 넣고 굳히는 과정을 해야 따끈하고 고소한 두부가 만들어졌다. 하루는 꼬박 그렇게 분잡스러워야 콩이 두부가 되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설음식을 준비기간에는 꼭 장날이 끼어 있었다. 장날이 되면 엄마를 따라 옥종장에 가고 싶어 안달했었던 기억도 함께 있다. 엄마는 설 장을 보러 갈 때는 마른 쌀 몇 되박을 이고 가서 튀밥을 만들어 오셨다. (아니 그 전 오일장에 다녀오시면서 튀밥을 만들어 오셨는지 기억이 오락가락하기도 한다.)
그 튀밥으로 유과와 강밥을 만드셨다.
어머니께서 유과를 만드시는 과정은 복잡했다. 며칠 전부터 찹쌀인지 멥쌀인지는 모르지만, 쌀가루를 시루에 쪄 반죽이 되면 겉에 밀가루을 묻혀 아주 얇게 밀어 아이 손바닥만 하게 만들었다. 방을 하나 비워 그늘에 말렸는데, 이삼일이 지나면 고구마 빼떼기처럼 딱딱한 조각이 된다. 그 조각이 아주 바싹하게 잘 마른 날. 장작불을 붙여 달군 큰 가마솥에 말 통 콩기름 한 통을 다 부어 끓이셨다. 그러고는 어머니께서 부뚜막에 쪼그려 앉아서 몇 바구니나 되는 그 조각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성껏 일궈 내셨다. 그 작은 고구마 빼떼기만 한 조각이 기름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면 내 얼굴보다 커다란 동그란 유과 모양이 만들어져 나왔다. 그게 신기해서 그 뜨거운 기름 솥 주변을 왔다 갔다가 하면 어머니는 기겁하셨다.
어머니께서 부뚜막 기름 솥에 유과를 일궈 내실 때 할머니께서는 큰 방에 돗자리를 깔고 그 위로 한 지를 다 깔아 두셨다. 그리고 또 시뻘건 숯불을 화로에 옮겨 담아 방구석 자리에 놓고 화로 위로 물엿 솥을 올려 끓이셨다. 그 옆에 널찍한 대야에는 쌀 튀밥을 잘게 부숴 가득 담아 따로 준비하셨다. 어머니께서 기름에 튀겨낸 둥그런 뻥튀기는 할머니 손으로 옮겨 물엿 솥에 풍덩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튀밥 가루에 뒹굴어 하얀 옷을 입었다. 그렇게 고구마 빼떼기같이 딱딱하고 무맛이었던 이상한 것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유과가 되었다.
촐랭이 방정을 떨고 돌아다니다가도 유과를 만들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방에는 얼씬도 못 하고 문밖에서 할머니께서 가끔 내어 주시는 부서진 하사품을 기다릴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절절 끓는 기름도 겁나고, 찐득거리는 물엿도 펄펄 끓고 있으니 얼마나 위험한 작업이었을까? 하루해를 꼬박 넘기도록 유과를 만드시고 그 물엿을 다시 끓여 튀밥이랑 땅콩을 넣어 강밥도 한 바구니 만드셨다.
강밥은 유과에 비하면 난이도가 새 발의 피 정도였다. 큰 대야에 끓인 물엿을 붓고 쌀 튀밥과 땅콩을 부어 넣어 북북 비벼 틀에 넣어 긴 막대로 밀어내면 네모반듯한 어마어마하게 큰 강정이 만들어졌다. 그런 뒤에 틀에 넣은 채 살짝 문을 열어 찬바람이 방을 훑어 지나가게 해서 강정을 딱딱하게 만들었다. 굳어진 널찍한 강정의 틀을 조심스레 벗겨내시고 망나니 칼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내셨다.
그렇게 또 하루를 보내고
또 어머니께서는 설날이 된다고 무엇을 준비하셨을까?
설빔도 준비해 주셨고, 닭을 잡아 떡국 장도 만드셨다.
아~ 가장 먼저 머슴살이 와 있던 아재가 손수레를 끌고 옥종장에 가서 떡국을 뽑아 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미리 불려둔 쌀을 대소쿠리에 담고 그 밑에 빨간 고무 대야를 받쳐 손수레에 실었다. 아재의 손수레에는 우리 집 쌀만 있는 게 아니라 6·25 때 남편이 전사하고, 자식들은 장성해 도회지에 나가는 바람에 혼자 지내시는 문산댁 아지매나 할머니의 올케 되시는 옥종 할매 집 쌀까지 함께 실려 있었다. 아침에 집을 나선 아재는 해그름때나 돼서야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가래떡을 대야마다 가득가득 싣고 돌아 오셨다.
김이 나는 가래떡 맛!!!
지금도 흰 가래떡을 그렇게 좋아하는데, 먹을 것도 없었던 내 어린 시절에는 얼마나 맛있었을까? 그걸 한 가닥 잡고 참기름에 찍어도 먹고, 꿀에도 뒹굴어도 먹었다.
가래떡은 집으로 오자마자 넓직한 대바구니에 층층이 바람구멍을 만들어 다시 쌓아져 젖은 무명천을 덮고는 꼬들꼬들 말라갔다. 시간대를 미리 계산하고 떡을 만들어 오신 탓인지 이틀쯤 지나 새벽잠이 어스름할 때쯤이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와 나무 도마에 부엌칼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에 잠이 깼다. 그 소리는 콩나물 단지에서 나는 비릿한 콩나물 냄새와 그 단지에서 흘러내리는 또르르 하는 물소리와 함께 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와 할머니께서는 이런저런 동네 사람 이야기도 나누시고 누구네와 누구네의 바람난 이야기, 싸운 이야기 등도 곧잘 하셨는데 내가 턱밑에 쪼그리고 떡을 주워 먹고 있다가
“누구 이야기야?” 하고 물을라치면
“으~ 산성 밑에 누가 그랬다네.”로 내 입을 막으셨습니다만 나 또한 알건 다 안다고 대충 누구의 이야기라는 것쯤은 대부분 알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설날은 새벽부터 밤까지 내리 며칠을 고단하게 들볶고 나서야 우리 곁에 와 주었다.
햇살이 따뜻한 주말 어머니를 모시고 당신께서 좋아하시는 황태구이를 먹고는 동네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남편과 아이들은 좀 앞서가고 어머니와 나는 좀 떨어져천천히 걷게 되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젊은 주부들이 삼삼오오 산책을 나와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젊은 시절이 생각이 나셨는지
“아이고 설이 낼 모랜데 안주인이란 것들이 저래 다 나와 있고…. 세상 참 좋아졌다.” 이러셨다.
참 나 원….
그대 딸도 지금 강아지 데리고 이러고 나와 있답니다.
요새야 겨우 세뱃돈 몇 푼에 설날을 기다리는 내 아이들은 내가 기억하는 여러 날을 걸쳐서 내내 신났던 설날의 설레는 풍경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와 산책길에 새록새록 기억하게 되었던 설날을 풍경. 이런 내 유년의 따뜻함이 오롯이 어머니의 고단함을 기반으로 했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된다.
문여사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