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가 살아있는 영감님 옷을 다 갖다버려 당황스러운 날
전날 밤, 아버지의 옷을 다 갖다 버린 엄마는 병원 복도에서 기어이 눈물을 보이셨다.
아버지는 오토바이 사건 이후로 병원에 입원하시고 몇 번의 고비를 넘기셨다만 늘 그렇듯 부활하셨다. 그런 아버지께 우리 형제들은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아버지의 상태가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엄마는 엄마대로 노구를 끌고 아버지를 따라다니느라 더 기운을 빼고 계신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아버지 형제분들끼리 별스럽게 우애가 있어 매주 화요일이면 작은아버지께서 부산서 버스를 타고 새벽같이 내려오셔서 아버지를 돌보고 계신다. 덕분에 작은아버지께서 오시는 날이면 막차 시간에 맞춰 돌아가실 때까지 충분히 쉴 수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미 작은아버지께서도 팔순에 가까운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겨우 두 살 위인 형님의 대소변을 받아 내는 모습은 죄송하기보다 숭고해 보인다.
작은아버지가 오시면 엄마는 휴가를 받아 집에 가서 몸도 좀 눕히고, 목욕탕도 다녀오신다.
화요일을 푹 쉬시고, 수요일 아버지와 온종일 병원에서 토닥거리시다 저녁에 나와 교대를 하시고 집에 가셨다. 그렇다고 내가 6시에 근무 교대하듯 교대를 해 드리는 것은 아니니 병원에 가면 9시가 넘는다. 그 시간에 나와 교대를 하고 집으로 가셨으니 이미 깜깜해진 시간에 불 도 다 꺼진 집을 들어서셨을 것이고, 종일 비워둔 8월의 집안 공기는 덥고 잔뜩 습하지 않았을까?
거실에 쓰러지듯 누웠는데 갑자기 병원에 누워 있는 영감님도 불쌍하고, 다 늙어 병원에 따라다니고 있는 당신의 신세는 더 기가 차서 눈물이 터지더라셨다. 눈물 한 바가지를 쏟고 불도 안 켠 거실에 누워 있어 봐도 잠도 안 와 옷장에 넣어둔 앨범을 보실 거라고 옷장을 여는 순간 그 안에 나란히 걸려 있는 아버지 옷이 보이더라네.
‘아이고 저 옷들을 영감이 다시 몸에 걸치겠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버지 돌아가시고 저 옷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더란다.
지금에야 미리 옷 다 갖다 버렸다고 하면 자식들이며, 시누나 시동생들이 서운해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겠지만 그때는 이것저것 아무 생각도 안 나고 그래도 사람들 안 볼 때 갖다 버려야 되겠다는 생각만 들더라고 하셨다.
자식 5남매를 다 결혼시키고 집안 대소사에 일일이 다 참견하고 다니시는 할아버지는 옷 욕심도 좀 있어 시기마다 사둔 양복과 겨울 코트 등 옷장이 가득했다. 대충 입으시는 평상복까지 아버지 돌아가시면 무덤가에 가서 태워드릴 생각에 그나마 좀 얇고 최근에 산 봄 자켓 하나와 양복바지 하나를 빼서 옷장에 걸어두고, 나머지 옷을 다 꺼내 놓으니, 방이 한가득하더란다. 입고 나설 때는 별 옷도 없다 싶었는데 꺼내 놓고 보니 어찌나 많던지 엄마는 어안이 벙벙하더라고 한다. 그걸 시장에 가실 때 끌고 다니시는 바구니 실어 몇 번을 들락날락하며 아파트 담벼락에 붙여세워 놓은 헌옷 수거함에 다 가져다 버리셨단다. 다버리고 나니 속은 시원한데 맘이 이상해 한잠도 못 주무셨다며 새벽같이 병원에 오셨다. 새벽에 눈이 꽹해서 오셔서는 나를 잡고 지난밤 이야기를 주절주절하셨다.
아이고 당신도 늙은이이고, 보태서 영감님 병 수발로 오만 기운이 다 빠져 이젠 죽을 기운도 없다는 할매가 어떻게 그 무거운 옷을 그 밤에 다 갖다 버렸을까? 돌아가시지도 않은 영감 옷은 왜 버렸냐며, 아버지께서 다시 집에 가시면 그때는 할매 죽었다는 시덥잖은 농담을 하며 어머니를 위로했었다. 그렇다고 막 서운하고 그렇지는 않았다.
그런 일이 있고 며칠 뒤 아버지께서는 또 기적을 일으켜 지금까지 병원에서 보여주신 모습과는 확연하게 다르게 빠르게 빠르게 회복하셨다. 대학병원에서도 더 이상 아버지께 해 드릴 치료는 없고, 이미 회복을 하고 계시니까 2차 의료기관으로 가시든 아니면 요양병원 같은 곳으로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이런저런 상의 끝에 제일병원 간병인 병실로 옮겼고, 그날 아버지께서는 재활훈련을 받으셨다.
누워서 사경을 헤매시던 아버지가 재활훈련을 받으러 내려가시고 병원복도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엄마는 또 눈물을 흘리셨다. 아버지가 재활을 잘 받더라도 건강한 사람으로 퇴원 하실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당신께서 아직은 건강하니 요양원으로 보내실 수는 없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집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가면 당신 앞날이 태산같아 걱정이고, 저래 불편한 몸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고생하실 영감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다 하셨다.
엄마는 눈물 끝에 아버지의 옷을 죄다 갖다 버린 게 생각이 나신 듯
“채영오메야 니 오데가서 너거 아부지 입을 헐직한 옷 두벌만 사 온나. 바지는 츄리닝 같은 걸로 사고, 세타도 목이 너~린 걸로 사 온나 ” 하시면서 비싼 거 말고 헐직한 걸로 사라고 몇 번을 다짐 받으셨다. 그날 그 병실 복도에서 나는 또 엄마한테 ‘왜 그렇게 옷을 퍼떡 갖다 버렸냐며, 아버지 집에 가서 옷 내놓으라 하심 엄마 인자 죽었다.’며 씁쓸하니 또 히죽거렸다. 그 순간은 부활(?)하신 아버지가 우리 옆에서 조금은 더 계실 것 같아 안도하는 맘도 분명히 함께였다.
우리가 그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버지는 재활훈련을 잘 받으셨고, 병실에 올라오셔서는 거의 두 달 만에 처음으로 휠체어에 의지하긴 하셨지만 화장실에 가셔서 볼 일을 보셨다.
그게 끝이었다.
재활은 이미 모든 근육이 다 없어진 아버지 몸에는 너무도 큰 충격이 준 듯 했다. 멀쩡한 나도 헬스장 첫날은 몽둥이 찜질을 한 것 같은데 근육이 거의 없는 아버지 몸이 어땠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밤새 꽁꽁 앓는 소리를 내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도 못하고 엄마는 또 간병인이 있는 방에서 간병인 보조가 되어 아버지의 간병을 시작하셨다. 이틀 뒤 아버지는 조금씩 회복을 하시고, 간병인도 엄마더러 밤에는 걱정말고 집에 가서 편히 주무시고 와도 되겠다고 해서 저녁을 먹은 뒤 아버지께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려고 하니 아버지께서는 엄마더러 ‘내가 인자 버림을 받는 갑다’고 하시더란다. 그 소리에 또 엄마는 짐을 풀어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하셨다.
그 한 번의 재활훈련을 끝으로 아버지는 병원 침대에서 내려와 보지 못하고 세상을 옮겨 가셨다. 물론 내가 엄마의 명을 받아 사 간 헐직한 츄리링 바지와 목이 넓은 티셔츠는 몸에 걸쳐 볼 기회조차 갖지 못하셨다.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날.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집을 둘러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영정사진과 혼백을 든 오빠와 장조카의 뒤로 줄줄이 딸들과 손자, 손녀, 그리고 당신의 동생들과 또 그들의 식솔까지 함께 한 마지막 길이었다. 아버지의 가장 사랑하는 막내 동생인 우리고모와 나란히 걷게 되었다. 고모는 엄마가 아버지의 옷을 갖다 버린 이야기를 꺼내시면서 엄마의 노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미리 아버지 옷을 버렸다는 소리를 들으니 고모 맘이 안 좋더라며, 왜 니 엄마는 살아 계신 니네 아버지 옷을 죄다 갖다 버렸는지 모르겠다고 서운하다 하셨다.
‘그러게 고모......., 할매가 무슨 본 정신으로야 그리하셨을까요........,
옷을 갖다 버릴 때 할매가 살짝 노망이 들어서 그랬지 않았을까요?
할배는 병원에서 정신 줄을 잡았단 놨다 하시고, 할매는 집에서 덩달아 정신 줄을 살짝 놓고 있었나봐요.‘라는 말을 주절주절 엄마를 변명했다.
고모가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다. 내 오빠가 병원에서 그러고 있는데 올케언니가 우리오빠 옷을 다 갖다 버렸다고 하면 그들의 삶에 아무 영양가도 없는 나임도 불구하고 올케언니한테 서운한 맘이 들겠다 싶다. 나중에 오빠 옷 갖다 버리고 싶어지면 맘껏 갖다 버리시고, 뭐~ 더 보태서 오빠를 버리고 싶으시면 버리셔도 좋은데 나한테 말씀만 말아 주셨으면 좋겠다. 그게 또 내가 우리 형제들을 사랑하는 방법인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