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세의 문 여사님의 가을기억(2019년도)
내가 사는 소도시에서 39년 만에 전국체전이 열린다고 체육관 지붕이 날아갈 만큼 폭죽을 쏘는 대던 시간에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낼이 토요일이니 시간 되면 고향마을 올 수 있냐는 전화였다. 그냥 오라고 하셔도 별말 없이 갈 것인데도 굳이 콩을 털었더니 좀 나와 무거워 들고 오실 엄두가 안나 그러시다며, 오늘 시골집에 주무시겠다고 하셨다.
토요일, 주중에 밀려뒀던 병원 방문이며, 집안일을 끝내고 점심시간 어중간하게 맞춰 고향마을에 도착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가족 모두가 도시로 나왔지만, 그때부터 30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시골의 밭에서 매년 어머니께서는 먹을 것들을 거둬들이고 계신다.
10월 마지막 주말이라 그런지 바람은 서늘하고, 건조했지만 햇살은 맑고 따뜻했다. 집에 들어서는데 허술한 대문간에 노란 국화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나를 막아설 만큼 풍성했다. 꽃송이마다 꿀벌들이 와글와글하는 통에 우리 집 강아지 두 녀석은 근처도 못 가고 스멀스멀 뒷걸음을 쳤다.
큰 언니가 우리 곁을 떠나고 난 이후 엄마는 노란 꽃에 유달리 애정을 쏟으신다. 언니가 이 세상과 저세상을 넘나들 때 꿈결처럼 형부랑 꽃집을 차려 노란 꽃을 팔 거라고 했던 말이 어머니의 가슴에 박힌 것 같다. 언니가 떠난 다음 봄날 어머니께서는 완사장을 지나시다 노란 국화 화분을 사서 시골집 대문 앞에 옮겨 심으셨고, 먼저 간 딸에게 밥을 먹이듯 거름을 더 많이 주고, 혹 꽃대가 쓰러질까 지지대를 세워 묶는 등 정성을 쏟으셨다.
내가 도착했을 때 어머니께서는 올해의 가을걷이를 이미 다 끝내놓으셨다.
콩은 쌀 마대 한 마대와 광목 보자기에 반 보자기쯤이 더 있으니 허술한 농사치고 대단한 수확이었다. 땡초는 검정 봉지에 반 봉지, 팥은 검정 봉지에 꽁꽁 싸 두셨는데 내 주먹으로 한주먹 남짓이다. 녹두도 비슷하다. 어머니께서는 저런 걸 키우시느라 여름 내내 식은 밥 한 덩이를 싸 들고는 고향마을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셨을 것이고, 대충 수선해 둔 불편한 잠자리에서 여름 내내 뒤척였을 것이라 생각하니 괜히 짜증이 났다. 그래도 그것도 못 하게 하면 속에 불이 나서 시골에라도 나가 있어야 사는 것 같다고 하시니 그래…. 가셔서 밭에 일하시면서 살아보시라 내버려 두고 가끔 이렇게 심부름이나 한다.
콩 마대를 옮기고 손을 탈탈 털고 있는 나를 보는 어머니의 얼굴에 뿌듯함이 가득하다. 심지어 배시시 웃으시기까지 하시며 이만하면 메주도 쑤고, 두부도 두어 되박은 해 먹을 수 있겠다고 자랑하셨다. 나한테도 한 바가지 줄 테니 콩국 해 먹으라는 인심을 잊지 않으셨다. ‘아이도 됐다고…. 요새 콩 한 되 몇 푼이나 한다고’ 하는 말이 목구멍 앞까지 나오는데 퍼뜩 삼켰다. 팔순을 벌써 넘기고 허리가 다 굽은 우리 문 여사님이 콩을 심으면 앞으로 얼마나 더 심을 것이며, 내가 저 콩으로 언제까지 콩국수를 만들어 먹을 수 있을지 이젠 그 남은 시간을 걱정해야 할 순간들이 다가오고 있다. ‘주시면 감사히 먹겠다고, 문 여사 콩이 유난히 고소하다고’ 설레발을 좀 쳤다.
콩을 두 가마니(?)나 싣고 집으로 오는 길에 완사장에 들러 어탕국수도 한 그릇도 하고, 장날에만 판다는 찹쌀 도넛도 사서 나눠 먹으면서 집으로 왔다.
엄마는 올해로 84살이 되셨다.
엄마가 일흔이 되셨을 때쯤 아버지의 병시중으로 몸과 맘이 피폐해져 있었을 때쯤이었을 것이다. 시골에서 밤 산이며, 텃밭을 건사하시던 먼 피붙이 되시는 아지매가 기운에 밀려 사천 어디 작은 임대아파트를 마련하셔서 동네를 떠나시자, 어머니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시며 시골에 텃밭을 가꾸고 싶다는 의사를 비치셨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줄줄이 손자들 돌보셨고, 겨우 손이 좀 편해지나 싶으니 영감님께서 덜컥 암에 걸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영감님 병시중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셨을 텐데, 당신 몸 돌볼 생각은 안 하고 또 일을 만드냐고 오빠나 올케의 성화를 부렸다. 나도 그 맘과 다르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아버지랑 아파트에 갇혀 티격태격하시는 두 분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시골 텃밭이 어머니한테는 압력밥솥 공기구멍 같을 것이라고 언니 오빠들을 설득했다. 결국 그렇게 어머니의 텃밭이 만들어졌다.
어머니께서는 텃밭을 만드시면서 딱 5년만 하다가 기운 달리면 그만둘 거라고 하셨지만 지금 그 세배의 시간을 넘기고도 봄이 되면 엉덩이를 들썩이시고, 고사리가 날 철이면 고사리를 누가 끊어갈까, 행여 세어져서 못 먹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사흘에 한 번씩은 시골행 버스를 타신다. 그리고 우리를 만날 시간이 되면 고사리를 몇 뭉치를 수확하셨다는 둥 자랑을 하신다. 몇 년 전 이웃에 사시는 어머니와 자매처럼 지내시는 분께서 매년 공짜로 먹기 부담스럽다고 고사리 값을 쳐 주셨는지 고사리를 해서 돈을 4만 원이나 벌었다고 자랑하셨다. 그 해 우리 형제들은 모이기만 하면 이젠 996만 원만 더 팔면 고사리 해서 천만 원 수익을 올리실 거라고 우리는 이제 곧 고사리 재벌 2세가 될 것이라고 설레발을 쳤었다. 이후로 어머니는 시골 텃밭에서 나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만 원 한 장 수익을 본 적은 없지만 그 텃밭 덕분에 우리 형제들의 봄 밥상은 봄나물로 풍성했고, 겨울에는 국가에서 청청하게 관리되는 수변구역에서 생산되는 무농약 배추로 김장하는 호사를 누렸다.
이젠 나이가 들어 김장배추를 심으실 수도, 그걸 수확할 기운도 떨어져 우리 집 김장은 해남 절임 배추로 대체되었다. 대신 손이 덜 가는 콩이나, 들깨는 심고 계시는 것이다.
가을이 깊다.
어머니를 이쁘다고 기억할 시간이 내게는 없었다. 나는 나의 유년을 기억할 때 사람의 모습이나 얼굴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내 친구들의 모습이나 나의 모습도 내 기억 밖의 일이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께서 예뻤는지 키가 컸는지 작았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어머니와 외출하면 주변 사람들이 우리 어머니를 보고 참 곱게 나이 들어간다고들 하니 나이가 들기 전 어머니께선 분명 참 예뻤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 이쁜 시절 다 보내고 이제야 나는 겨우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기 시작했는데 이젠 저 얼굴을 마주하고, 콩나물 콩을 고르고, 꽈배기를 나눠 먹을 시간이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내년에도 어머니께서 밭에 콩을 심고 싶다고 하시면 같이 텃밭에 나가 땅을 고를 생각이고, 시내버스 타고 가신다 하면 열심히 교통카드를 충전해 드릴 생각이며, 콩을 수확해서 가지러 오라고 하시면 후딱 콩을 실으러 나갈 생각이다. 고맙게 내 몫으로 따로 담아 주신다면 그 또한 너무 맛있겠다며 호들갑도 떨며 감사한 맘으로 내 몫을 챙겨 올 것이다.
가까이 나이 드신 어머니께서 계시니 또 다른 근심이 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런 소소한 일상들을 되돌아보건대 나는 아직은 어머니께서 계셔서 참 좋다.
내 나이 오십에도 넘었음에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