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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주의자 (1)

by 김모음



부원장은 학원에서 없어선 안될 존재이다. 학원의 거의 모든 일을 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수업을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학생관리, 시간표관리, 상담, 학습지 만들기, 광고 전단지 만들기, 선생님들 교사용 지도서 챙기기, 배달 업체에 점심 예약하기 등 큰 일부터 사소한 일까지 부원장이 없으면 학원이 그대로 멈출 지경이다. 이 많은 일을 하면서도 큰 실수도 하질 않는다. 아이들을 다루는 실력도 수준급이다. 부원장은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가 있다. 아이들도 첫 만남부터 그걸 느끼다 보니 웬만한 개구쟁이가 아니면 부원장의 말을 잘 듣는다. 아이들 앞에서 원맨쇼를 많이 하다 보니 ‘개그맨’ 소리를 듣는 나와는 사뭇 다른 재질의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갓생을 사는 사람을 보면 존경스러우면서도 신기하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나도 언제인지 기억이 안나지만 열심히 살려고 몸부림칠 때가 있었다. 일로서 나를 증명해 보이려 했고 그러려면 열심히 일해야 했고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땐 지금보다 한 참 젊었을 때고 지금은 그저 ‘하루 버티면 되었다’ 하는 마음이 더 크다. 부원장을 보며 자신의 일을 좋아하면 저렇게 자발적으로 일하게 되나 보다 생각하고 있을 즈음 겨울 방학 시즌이 찾아왔다. 학원은 방학 때 얼마나 새로운 아이들이 유입되느냐가 일 년의 흥망을 결정하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원장은 특강을 했다 하면 새로 들어오는 신입 회원을 전원 정규 수업으로 전환시킨 레전드 실력자였다. 물론 나는 신입이었지만 ‘나는 실력이 모자라서 아이들이 특강만 듣고 정규 수업 등록 안 하고 다 가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은근한 압박까지 느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특강은 ‘초등학교 1학년 과학 논술’과 ‘초등학교 3학년 역사 논술’ 두 수업이었다.


평소의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면 실시간으로 기가 빨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어색해한다. 그래서 아이들 앞에서 한 편의 쇼를 하듯 수업하는 것이 가능할까 생각했는데 체질일 정도로 나와 잘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내 정신연령이 아이들과 비슷하기 때문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라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과학논술을 듣던 4명의 친구는 엄마들끼리 친해서 다 같이 특강을 신청한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정규수업도 넷이서 함께 들을 수 있도록 반을 새로 개설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 새로 만든 반의 선생은 꼭 내가 했으면 좋겠다는 조건도 붙였다.


“선생님, 3월부터는 수업이 늘어나니까 화요일 아니면 수요일 4시 30분 수업 개설하는 쪽으로 상담해 보세요.”

부원장이 주로 시간표 관리를 하기 때문에 귀띔을 해줬다. 나는 과학특강에서 정규수업으로 전환하는 학부모와 스케줄 조율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님, 화요일과 수요일 4시 30분에 수업이 가능할 것 같은데요, 언제가 괜찮을까요?”

“수요일은 안되고요, 화요일이 좋겠네요.”


이렇게 한 명씩 전화를 하다 보니 화요일 4시 30분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나는 부원장에게 말했다.


“화요일 4시 30분 2학년 수업 개설했습니다.”

“어? 그 시간 안 되는데요?”

“..... 네?”


부원장은 화요일 4시 30분에 자신이 하던 수업이 있는데, 어린 아들의 학원이 끝나는 시간이 그즈음이고 데리러 갈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학원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신이 하던 그 수업을 나에게 주고 자신은 아들을 데리러 갈 계획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럴 거였으면 진작에 나에게 가능한 시간표를 정확히 알려줄 것이지 지금에서야...?


요즘 아이들은 학원을 기본 2~3개를 다니기 때문에 스케줄이 빡빡하다. 그래서 4명의 학생 모두가 공통으로 비는 시간을 찾기란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이미 시간표를 정했는데 다시 번복을 하는 것은 학부모들에게 컴플레인을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사유가 되고, 곧 수강 취소로도 이어질 수 있다. 시간표 하나 제대로 못 짜는, 체계가 없이 굴러가는 학원이라는 이미지도 줄 수 있기 때문에 더욱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거짓 변명을 만들어서 학부모에게 다시 전화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논술학원입니다. 죄송하지만...”


감사하게도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시간표가 변경되었고, 이틀 후.


“부원장님, 제가 해야 한다는 그 수업은 어떻게 준비하면 되나요?”

“아, 그거 안 하셔도 돼요. 제가 그냥 하기로 했어요. 시부모님이 아들 학원에 데리러 가 주시기로 했거든요.”

“아.... 네, 잘 되었네요.”


전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대본을 쓰고 떨리는 마음으로 ‘죄송하지만’으로 입을 떼기 시작해서 시간을 변경해야 했던 내 진땀들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 기분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티 스토리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chaegdogme.tistory.com/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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