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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업을 좋아한다고요? (2)

by 김모음





아이의 엄마가 처음 학원에 방문했을 때 고민을 가득 가지고 상담을 했었다고 한다. 한글을 완전히 깨치기 전에 영어유치원을 다녔고, 덕분에 영어는 굉장히 잘했지만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는데도 한글실력이 현저히 뒤처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말도 어눌하고 제대로 된 한글 쓰기가 안되었다. 엄마는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았고 다니던 영어 관련 학습을 모두 끊어버리고 국어에만 집중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 사연을 안고 나에게 온 아이였다.


이 아이의 전적을 듣고 나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2학년 2학기 초였지만 아이는 ‘예쁘다’ ‘귀엽다’ ‘사과’ 같은 단어의 맞춤법도 매번 틀렸다. 그리고 말할 수 있는 최대의 표현이 ‘기쁘다, 좋다, 싫다’ 같은 1차원적인 것이었다. 모국어를 좀 더 배웠어야 할 나이에 들어본 적도 없는 타국의 언어를 배우느라 혼자서 씨름했을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갔는데 이제는 모든 수업을 한국어로 진행하니 머리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글쓰기로는 이 아이의 어휘실력을 제대로 향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나는 원장과 부원장에게 상담을 했고 결론은 시중에 있는 어휘 문제집을 숙제로 내주면서 따로 봐주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전화로 아이의 엄마에게도 상황을 알려주면서 숙제를 추가로 내줄 테니 아이가 잘할 수 있도록 옆에서 잘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아이와 나의 10분 연장 과외 수업이 시작되었다. 숙제를 해오면 우선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고 M&M 초콜릿을 경품으로 칠판에 복습 겸 퀴즈를 내주면서 아이의 승부욕을 자극해 흥미를 잃지 않도록 유도했다. 그렇게 겨울방학이 끝날 때까지 나와 그 아이의 퀴즈는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엄마는


“이제 영어학원을 다녀야 할 것 같아요. 논술이랑 시간이 겹쳐서요. 여기까지만 할게요.”


라며 그 아이와 나의 마지막을 알렸다.

아... 여전히 높은 그 영어의 벽이란...


나와 함께 수업을 하면서 글쓰기 실력도 많이 늘고 쓸 수 있는 단어도 늘었다. 혼자서는 한 글자도 먼저 쓸 수 없었던 아이가 겨울 방학 때는 맞춤법은 틀렸어도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기는데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좀 괜찮아지려나 하는 찰나에 3학년이 되었고, 3학년은 초등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영어 수업이 시작되는 학년이다. 엄마로선 그 적정한 타이밍을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영어유치원을 졸업한 모든 아이들이 다 모국어를 활용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다. 모국어도 잘하고 영어도 잘해서 다른 아이들보다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흥미를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좋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도 있는 법. 모든 아이들이 다 똑같을 순 없고 아이들 마다 가진 능력이 다르다. 언어적 능력이 뛰어나지 못한 아이들은 외국어를 모국어보다 먼저 학습하게 되면 혼란이 온다. 분명 집에서는 엄마 아빠와 한국어로 대화하는 데 유치원에서는 선생님이 영어로 물어보고 친구들도 영어로 대답하니 어느 쪽에 맞춰야 할지 모르는, 말 그대로 멘붕의 상태가 되어버린다.


“영어유치원 보냈다가 나중에 후회하고 논술학원에 보내는 경우 진짜 많아요.”

원장은 잘하는 경우엔 학원을 보내질 않았을 테니 자신이 일하는 위치에서는 안 좋은 케이스만 보게 되는 것도 있지만, 상식적으로 내 나라 말을 먼저 똑바로 알아야 외국어도 공부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니냐는 거다. 학부모들의 잘못된 영어에 대한 추앙이 멀쩡한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부원장도 한 마디 거들었다.


“저도 영어 유치원 보냈다가 잘 됐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 없어서 제 아이들은 영어 유치원 안 보내요.”

헐... 나름 교육부심 넘치는 부원장이 저런 소리를 하는 것 보니 정말 안 좋은 경우를 많이 봤나 보다.


“ 그리고, 대부분 엄마들이 하는 소리가 ‘우리 아이가 영어는 잘하는데 그에 비해 국어가 좀 떨어져요.’라고 하는데, 사실 까보면 영어도 잘 못할걸요? 그냥 어른들 앞에서 생활영어 한 마디 했는데 어른들은 깜짝 놀라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면 아이들은 거기에 신이 나서 엄마가 좋아할 만한 말만 아는 ‘척’ 하는 거예요. 엄마들은 그게 영어를 잘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고요.”


사실 나는 내심 영어유치원을 보내는 가정을 부러워했었다. ‘여유가 있으니 저렇게 아이에게 좋은 걸 해 줄 수 있구나. 저렇게 영어유치원을 졸업하면 아이는 영어를 굉장히 잘하겠지? 그야말로 출발선이 달라지겠네. 역시 부가 부를 낳는다고 여유 있는 집 아이들이 공부 잘하는 건 그만큼 어렸을 때부터 투자가 이루어지기 때문이구나’ 하면서 보잘것없는 집에서 태어난 나의 아이들이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친구를 경험해 보면서 모두에게 다 좋은 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아이도 만약 영어유치원에 갔다가 언어적 혼란이 와서 힘들어한다면 그건 오롯이 100% 내 책임이니 말이다. 나 같은 소인은 그 죄책감을 절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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