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이 워커홀릭이라면? 직원은 할 일이 늘어난다. 이건 사회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진리이다.
학원 원장은 이 일을 정말 좋아한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아이들의 생각이 커가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더 많이 알려주고 싶어 한다. 그리고 행동파이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각 행동으로 밀어붙이는 사람이다. 사업가로서 좋은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을 벌이는 걸 좋아하는 원장 때문에 부원장의 일은 점점 늘어난다. 그 여파는 나와 다른 선생님에게도 온다.
한 반에 6명이 정원인 논술 수업은 같은 학년끼리 묶어서 진행한다. 흔히 말하는 레테(레벨 테스트)가 없이 시간표만 맞으면 수업이 가능하기 때문에 같은 반 안에서도 각자의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 원장은 이러한 기존의 체계가 아이들에게도 비효율적이라 생각했고 대대적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수준별 독서 프로그램."
그룹수업을 하면 아이들끼리 책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며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수준별 학습은 1:1이라 그런 이점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적정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이런 수업을 하기 위해서 학원의 선생님들은 수업시간을 제외한 시간엔 모두 스캐너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프로그램엔 새로운 교재가 필요하고 Chat GPT는 교재를 만들 수 있는 최적의 도구였다. 교재를 만들기 위해서 시중의 책을 한 장 한 장 모두 스캔을 해야 했다. 나도 예외일 순 없었다. 그리고 원장은 또 새로운 시도를 꾀하고 있었다.
“모음 선생님, 이번 해부터는 중학생 교재를 바꿔볼까 해요.”
“뭘로요?”
“기존에 나와있는 교재들은 마음에 드는 게 없어요. 그래서 새로 만들어볼까 해요. 선생님이 좀 만들어 주셨으면 해요. 제가 Chat GPT를 써보니까 맘만 먹으면 교재 만들 수 있겠더라고요. ”
“...네...”
“선생님, 중학생 이번 기말 시험 보는 거 내신대비를 해달라고 요청이 와서 해줘야 할 것 같아요. 혹시, 4주만 주말에 나와 주실 수 있나요? 나 혼자 하려고 했는데, 혼자서는 좀 역부족일 것 같네요. 시험 범위는 여기서 부터 여기까지구요...”
“선생님, 이번 겨울에 예비 중1 문법 특강을 열어볼까 해요. 교재는 이게 괜찮을 것 같고요 그리고 중학교 세계사도 여름방학에 이어서 할 거예요.”
폭풍처럼 밀려오는 잡무에, 맡고있는 수업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학원에서 나는 수업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되었고 5학년과 6학년을 기본으로 중1과 중3, 그리고 양념처럼 3학년과 4학년 수업도 하나씩 배정해 주었다. 한 학년의 수업이 학원 전체로 봤을 때 적게는 1개, 많게는 3~4개 정도 되는데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한 학년을 한 사람이 전부 맡는 것이 수업의 질적인 면으로 볼 때 가장 좋다. 하지만 시간표는 랜덤이었고 한 번의 수업을 위해 그 학년을 맡을 경우도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학년이 4개나 있었다. 이렇게 되면 난 한 번의 수업을 위해 집에서 공부를 해야 하고 그런 학년이 많아질수록 학원에서 일하는 시간 외의 근무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못하겠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내 주특기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음에 꾹 담고 둔한 척 하기이다. 집에선 할 말 다 하지만 밖에만 나가면 뭐든 yes를 남발하는 습관이 항상 발목을 잡는다.
“모음 선생님, 잠깐 할 말이 있는데요.”
“무슨 일로...?”
“선생님이 중학생 교재도 만들고 또 중학생 수업도 많이 하시니까 수고비 겸으로 해서 한 달에 20만 원씩 더 드리려고 해요. 그러니까 좀 더 수고해 주세요.”
오, 매달 보너스가 생겼다! 20만 원이면 한 달 월급의 약 1/4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물론 매달 내가 일하는 시간에 따라서 월급이 달라지긴 하지만 평균 급여로 계산하면 그 정도가 나온다. 파격적 우대다. 순간 기쁨의 함성을 질렀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제야 최저시급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자발적으로 하는 일에는 별 감흥이 없지만, "해야하는", "의무적으로" 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평소 당연하게 하던 일도 갑자기 싫어지고 오히려 반감이 생겨버리는 몹쓸 지병이 있다. 아이들 수업용으로 책을 읽는 것은 의무적 책 읽기였고, 억지로 해야 하는 일에 무시무시한 지랄병이 돋는 나는 10분 만에 휘리릭 훑어버린다. 당연히 무슨 내용인지 모른다. 하지만 수업을 해야 하므로 그렇게 억지로 네 번, 다섯 번을 훑는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수업준비가 좀 오래 걸린다. 학원 커리큘럼은 대체로 매년 거의 같지만 나는 최강의 저질 기억력을 자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작년에 그 책으로 수업을 했었다 하더라도 올해는 깔끔하게 리셋되어 있는 상태이다. 새 책처럼 읽고 공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에겐 매년 새로운 도전과제를 주는 원장이 있다. 똑같은 내용을 우려먹을 수 있는 기회를 최소화시켜준다. 나의 하수급 능력치 인해 이런 업무 시간 외의 일이 늘어가는 상황에서 이 정도는 받아야 된다는 합리적 사고가 금세 자리 잡았다.
어느 날 원장과 부원장의 대화 한 토막을 들으며 나는 또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원장님, 제가 서점에 갔다가 이 세계사 교재를 봤는데요, 핵심만 간결하게 되어있어서 어렵지 않게 수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용이 많으면 아이들이 너무 어려워하잖아요. 이번 방학엔 이 교재로 바꿔서 수업하는 게 어떨까요?”
“아.... 그러네요, 괜찮네. 지금 사용하는 건 자세한데 아이들이 좀 복잡해하고 어려워해서 계속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이거 좋네요.”
새로운 도전과제가 아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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