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by 밀란 쿤데라
더 깊은 철학적 사유를 누릴 수 없음이 안타깝다. 주인공들의 단편적인 모습을 이해하는 것 까지가 나의 한계였음을 밝힌다.
토마스는 인생을 가볍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다. 한 번의 결혼 경험이 있지만, 오히려 그 경험이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자유를 누리던 토마스는 테레사를 만난 후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한다. 「해야만 한다」를 계속 읊조리는 것을 보면 자신의 가벼움을 자중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그의 본성은 가볍지만 감정이 깊어질수록 고민은 깊어지고 삶이 점점 무거워진다. 반면 사비나는 병적으로 무거움을 거부한다. 예술가인 그녀에게는 자유의 마지노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감정만 느끼고 싶을 뿐, 그 감정에 뒤따른 조금의 책임도 거부한다. 아니, 사랑도 무겁다. 사비나의 그것은 유희에 가까울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랑에는 소유라는 욕망이 뒤따라 다닌다. 그리고 소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사비나는 책임이 싫다. 책임이 생기면 삶이 무거워진다. 이 무거움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싫다. 시쳇말로 인생의 꿀만 빨면서 살고 싶다. 그래서 그녀는 현실, 심지어 자신과의 타협도 없이 추구하는 바 대로 살아간다.
그리고 눈앞에 있지만 동시대에 사는 사람 같지 않은 사비나에게 흠뻑 빠진 프란츠는 몽상가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상형에 가까울 수도 있다. 훈훈한 외모, 번듯한 직장, 취미로 음악과 예술을 즐길 줄 아는 여유 등 모든 것을 다 가진 완벽남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런 스스로의 모습이 지루했나 보다. 속박이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비나에게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매력을 느끼고 그것에 집착한다. 그래서 타인의 눈에는 완벽한 프란츠였으나 정작 그 자신은 그 모습이 답답했고, 그 틀을 깨고 싶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안타깝고, 현실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인 테레사는 무엇 하나 그냥 넘기기가 힘들다.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에 의미부여를 하면서 괜히 힘들어하다가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기도 하고, 죄책감에 힘들어한다. 내가 소설 속 테레사였으면 당연히 테레사처럼 힘들어했겠지만 제삼자의 눈으로 보니 해결책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토마스의 자유로운 연애가 힘들었던 테레사에게 ‘어쨌든 토마스는 너에게 항상 돌아오잖아. 토마스가 너만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잖아. 그녀들과 너와의 차이, 그것만 기억해. 넌 토마스에게 특별해.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진심으로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네 인생의 초점을 토마스에게만 맞추지 말라고, 세상엔 즐길거리, 관심 가질 거리가 넘쳐흐르니 고개를 조금만 더 들어 저곳을 바라보라고 조언해 주고 싶다.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을지 언정, 잠깐 부끄러울지 언정 그 순간만 참으면 된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희미해지고, 운이 좋다면 미화가 되기도 한다. 그 찰나만 지나가면 된다. 하지만 순간순간이 의미가 있고 무거운 테레사, 한국 이름으로 번역하자면 김모음은 그 찰나를 버티기 힘들다. 그리고 양심, 인정, 체면, 통념 등 나를 주저앉힐 요소가 많다. 사비나의 ‘배신’이 필요하다. 배신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도 학습될 수 있을까?
소설 속 네 명의 주인공은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고민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섞이면서 살아가지만 결국 그 끝은 죽음이다. 큰 짐을 지면서 끙끙거리고 살던, 모든 것을 내 던지고 살던, 막 내버리려는 찰나이건 간에 누구에게나 삶은 유한하며 그 끝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그 끝은 모두에게나 오는 것이고 그게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좋은 것을 먼저 선점하고 누리는 자가 이득이다. 인생, 별 거 없다. 인생은 1회뿐이라 연습도 없고, 리셋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비교도 할 수 없고, 따라서 수우미양가의 평가도 불가능하다. 내가 좋으면 그만이고, 조건과 한계를 붙이며 굳이 스스로를 자제할 필요도 없다. 혹시나 실패했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두 번 째도 없고, 죽으면 그만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