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by 요시모토 바나나
나는 죽음에 취약하다. 아무도 정답을 알려주지도 않고, 죽음 이후에 관해 그 어떤 과학적 근거가 있지도 않고, 그래서 ‘카더라’ ‘할 가능성이 있다’의 주장만 가득하다.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 그래서 호기심으로 접근해 보지만 결국 내가 믿는 것이 나만의 이론이 되는 식이다. 어느 순간 두려워졌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미루게 된다. 어떨 땐 죽음이 가장 편하게 느껴져서 얼른 그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갈대처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다가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곁눈질로 흘겨만 보다가 결국은 눈을 감고, 심지어 감은 눈을 손바닥으로 한번 더 가리고 있다. 지금 나의 상태이다.
키친은 남은 사람들의 여전한 삶을 보여준다. 여전히 살아야 하기에 죽은 자의 빈자리를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보여준다. 남은 사람은 너무 힘들다. 떠나간 사람의 빈자리와 그 충격, 공허함을 감당하기 어렵다. 글쎄, 그것이 그렇게도 힘든 일일까? 아직 나는 경험해 보지 못했다. 조부모님들이 돌아가시긴 했지만, 같이 보낸 시간이 길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내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쏟은 것에 비해 받은 마음과 정성이 더 크기에 나의 아쉬움과 고통이 크지 않다. 이 부분에서 나의 비정함과 인간성 결여가 여실히 드러난다.
어릴 적부터 부모로부터 자주 듣던 말이 있다.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실제로 정이 없어서 들었던 소리였는지, 자주 듣다 보니 진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 이제는 그 인과관계마저도 따지기 힘들지만 내 뇌리에는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저렇게 힘들어할 일인가?’라는 의문이 계속 생겼다. 미카게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이가 많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언젠간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변이 없는 한 자신보다 할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카게는 힘들다. 할머니의 빈자리가 크고 그녀가 없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막막하다. 당연하다. 미카게 평생을 같이 살아왔고 자신을 돌봐 준 분이니 그 빈자리와 허전함이 얼마나 클까. 그런데 그 공허함이 그리도 정신 못 차릴 정도라는 것이 의아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면서 얼마의 돈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미카게는 이미 성인이기에 자기 한 몸 먹여 살리는 일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딱히 큰 어려움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여전히 살아야 하는 인간은 당장의 사는 문제가 바쁘기에 비극과 슬픔은 결국 희미해진다. 미카게도 결국은 자신의 시간을 찾게 된다. 살아야 하니까. 뒤이어 나오는 사츠키, 히라기, 우라라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방황한다. 하지만 자신의 시간을 찾을 때까지 그 슬픔의 깊이가 왜 그리 깊었는지, 인정머리 없는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유이치는 어처구니없이 아빠이자 엄마인 보호자를 잃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죽음이다. 그래서 유이치의 방황은 미카게보다는 이해하기 쉬웠다. 당황스러움에 현실도피를 하고 싶은 마음은 내가 자주 가졌던 마음이기도 하다. 물론 유이치처럼 누군가의 죽음 때문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유이치보다는 오히려 죽음에 담담한 유이치의 보호자 에리코에 더 눈길이 갔다. 그녀가 멋있었다. 유이치를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산 삶이었다. 노력이 들어간 만큼 유이치와 삶에 대한 애정도, 집착도, 미련도 크기 마련인데 어찌 그리도 가볍게 죽을 수 있을까. 그녀의 담백함을 닮고 싶다. 사실 나는 남겨진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다. 내가 죽으면 세상은 끝이기에 남겨진 사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고, 또, 신경을 쓴다는 게 불가능하다. 남겨진 이들은 슬픔도 잠깐이고 언제 그랬냐는 듯 하루하루 책임질 목숨들을 한가득 짊어지며 사느라 버겁다. 정 떨어지는 말만 써대는 나 자신이 참으로 정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