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기점으로 대부분 남자들의 대학생활도 시즌 1, 2가 있겠지만, 여대생에게도 이 시기는 급변의 시기다.
1년에서 2년을 꼬박 함께 강의를 듣고, 과제를 하고, 운동도 하고, MT도 가고, 술도 마시고.
많은 시간을 보낸 동기들이 눈물의 입대를 마치고 나면 비어버린 강의실은 전혀 낯선 복학생들이 채운다.
학교에 남아있던 여자 선배들, 혹은 먼저 복학한 선배들에게 그들의 일화를 미주알고주알 챙겨 들었기에 낯선 듯 친근한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전공 강의실에서 북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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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 튀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물론 그가 내 첫 남자 친구가 된 B였다.
개강파티에서 B를 처음 만났었는데, 마주 앉은 선배 하나가 나를 <술아:술을 잘 마신다고 놀리며 ‘술아’라고 부르곤 했었다.>라고 소개했고 그는 내 별명을 듣자마자 배가 찢어지게 혼자 웃어댔다.
너무 웃어 좀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어쩐지 쾌활한 그 웃음이 괘씸하면서도 천진해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마치 날 쫓아다니기라도 하는 마냥 B와 나는 자주 마주쳤고, 그때마다 복도가 쩌렁쩌렁하게 나를 반기며 “술아”를 외쳐댔다.
“술아!”
“술아!”
“오, 또 만났네. 안녕 술아!”
사람이 북적이는 복도 건, 공대 건물 입구 건 상관없이 매번 B는 나를 반갑게 부르며 인사했다.
가끔은 무안해 ‘아, 진짜 저 인간은 뭐야?’ 싶으면서도 남자 동기들의 공백이 퍽 외로웠기에 B의 반가운 인사가 나쁘지만도 않았다.
나중에 중간고사 즈음 알았지만, 우연히도 B와 나의 시간표는 20학점 중에 19학점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심지어는 같이 옆에 앉아 시간표를 짰던 친구와도 수강신청 실패로 2학점이 달랐었기에, 학교에서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은 당연히 B가 되었다.
매일 만났다.
거의 모든 강의를 같이 들었기에 자연스레 과제도 B와 얘기했고, 지각해 출석이 아슬아슬할 때면 서둘러 뛰라고 챙겨 문자를 보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B는 착한 사람이었다.
그와 어울리는 동안, 두 번 정도 코끝이 시큰거리게 감동받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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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과 체육대회에서 3학년 여자 선배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그냥 자리를 채우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워하는 신입생도 꽤 있었지만, 이미 지난 2년 동안 워낙 부지런히 학과 행사에 참여해 온 터라 학관 밥 좀 많이 먹었다고 빠지기도 머쓱해 그날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행사 말미에 번호표 추첨 행사를 진행했고, 우연히도 난 1등 상품인 PSP에 당첨됐었다.
자세한 걸 따져보지 않더라도 30만 원을 호가하는 고가품이었기에, 상자를 들고 오는 손이 얼떨떨했다.
특히 게임에 관심이 많은 남자 선배들이 북적북적 선물을 들고 오는 날 둘러쌌고, 그때 선배 하나가 빠르게 내 손을 낚아챘다.
그는 ‘아! 이거 내 거였는데! 짜증 나’ 하고 탄식을 지르더니, 이내 포장을 뜯고 심통을 부린답시고 새 상품에 침을 뱉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화를 내고 뭐 할 틈도 없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포장이 뜯긴 채 침이 묻은 PSP가 다시 내 손에 들려있었다.
이런 XXXX!
당황해 화도 못 내고 멍하게 서 있었는데, B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에 있던 PSP를 가지고 갔고, 입고 있던 티로 슥슥 선배의 침을 닦아냈다.
같이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분명 화가 난 표정이었지만 그는 침착하게 PSP에 묻은 침을 깨끗이 닦아냈고, 조심스레 다시 내 손에 건넸다.
어이없고 화가 나 울렁울렁하는 마음 어딘가에 뭔가가 싹을 툭 틔워내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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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 시험이 다가올 즈음에는 B와 제법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룹을 지어 시험공부를 같이 하기도 했는데, 그 날따라 B와 나는 아침부터 계속해서 엇갈렸다.
그냥 그런 날인가 보다 했었다.
내가 도서관을 향하면, 그는 밥 먹으러 자리를 비우고 다시 교수님을 뵙기 위해 자리를 비우면 ‘도서관인데 어디냐?’고 문자가 왔다.
11월의 추위는 코를 맹맹하게 만들기 좋은 찬 공기를 잔뜩 몰고 왔다.
쌀쌀한 공기 때문인지 나는 아침부터 콧물을 좀 훌쩍거렸고, 첫눈이 올지도 모른다는 예보가 있어 친구들도 모두 대체로 분위기가 좀 들떴었다.
덕분에 그날 하루 종일 도무지 공부하기가 싫었다.
아침부터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면서도 매점과 복도로 들락거리며 친구들과 수다를 좀 떨었고, 오후쯤이 돼서는 ‘에라이 나는 모르겠다’며 단짝 한 녀석과 노래방으로 향했다.
둘이서 두 시간 동안 꽉 채워 노래나 부르고 오자며 신이 나서 단골 가게로 달려갔다.
노래방에 있는 동안 B에게서 다시 도서관에 있다는 문자가 왔지만, 그저 공부하고 있겠거니 하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곧 다시 돌아온 도서관에서 만난 그는 얄팍한 가을 점퍼를 턱밑 끝까지 올려 입고 떨고 있었다.
호된 감기에 걸렸다고 했고, 도서관에서 약을 먹고 내내 자고 있었다며 얼굴은 빨갛게 열꽃이 피어 있었다.
나를 보자, 희미하게 웃던 B는 주섬주섬 점퍼 주머니에서 약들을 챙겨 내밀었다.
“성광이한테 너도 감기 기운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약 주고 가려고 기다렸어.”
“응? 감기 기운? 저요?” 하며 깜짝 놀랐다.
아마 복도에 나와 수다를 떨 때, 내가 코를 훌쩍이던 걸 선배 하나가 보고 기억해 이야기했었던 것 같다.
사실 난 감기 기운이 그다지 심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걸 전해주고자 난방도 잘 되지 않는 도서관 문쪽 자리에서 두어 시간을 기다린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왜소한 체구였는데, 감기까지 걸려 B는 쪼그라 들 듯이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리고 뽀시락 거리며 주머니에서 꺼내 준, 병에 든 감기약이 너무 따뜻해서 다시 한번 놀랐다.
식을 까 봐 품에 잘 품고 있었다며 그가 배시시 웃었다.
그 감기약의 온기에, 언젠가 싹을 틔워두었던 마음속 무언가가 물 먹은 콩나물 마냥 마음속에서 쑤욱 자라났다.
그렇게 나는 그 해 12월, 첫 연애를 시작했다.
내 20대 내내 유일하게, 그럴듯한 것보단 따뜻하고 행복했던 <튼튼한 연애>였다.